< 카사라(1) >
“미궁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앨런이 질문을 던지자, 소파에 길게 누워있던 테일러가 목만 길쭉하게 옆으로 뺐다. 앨런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생각이 많아?”
“저 아래에서 알파 같은 특이한 현상을 만났으니, 당연히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죠.”
앨런이 작은 기억수정을 흔들었다. 내부에는 알파의 머리카락으로 진행한 유전자 감식 결과가 들어있었는데, 기관으로부터 지하인과 일치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종족이 같아도 생김새는 확연히 달랐다. 알파의 눈동자는 맑고 피부는 깨끗했다. 반면에 지하인의 눈은 뿌옇고 피부에는 돌 같은 각질이 있었다.
“생김새는 왜 그리 다를까요?”
“나한테 물어봐도 모르지···.”
“마법? 저주? 아니면 진화의 결과?”
“또 시작이네.”
아무렇게나 내뱉는 단어를 통해 사고를 확장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실마리를 찾기도 하는데, 지금은 답이 안 나왔다.
테일러는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손뼉을 강하게 치며 앨런의 주의를 돌렸다.
“차라리 아이스틸에 집중하지 그러냐. 그건 알파와 달리 현실에 있으니까.”
“아, 그렇죠.”
아이스틸은 얼음이면서 금속의 성질 몇 가지를 지닌 물질이다. 얼음은 예로부터 보관 시간을 늘려줬고, 실제로도 그런 쪽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알파를 둥그렇게 감싼 형태는 동면장치를 떠올리게 했으며, 실제로도 그런 역할을 지녔으리라.
“나타나자마자 바로 사라지는 바람에 연구할 수 없는 점은 아쉽군요. 그렇다고 알파를 일부러 죽게 하는 것은 꺼려져서···.”
“아무리 지하인이라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그럼 카사라에 가볼 생각이냐?”
카사라는 솔도스 연방이 자리 잡은 신대륙 최북단에 있는 주의 명칭이며, 아이스틸의 유일한 산지이기도 했다.
“알파와 관련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스틸을 거기에서 얻을 수 있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곳이 알파와 연관이 있을까?”
테일러가 소파 근처 테이블에서 맥주캔을 집어 들더니, 원산지가 적혀있는 부분을 앨런에게 보여줬다.
“철수네 나라에서 만든 맥주인데 맛이 좀 밍밍···. 아, 이게 아니지. 맥주도 바다를 건너온 것처럼 미궁의 창조자가 아이스틸을 거기에 옮겨뒀을 수도 있잖니.”
“그럴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앨런의 왼쪽 눈에서 빛이 뿜어졌다.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뭉쳐서 광산이 있던 하얀 산맥을 조성했다.
“여기도 예전에는 평평한 설원이었어요. 과거의 모습이 유적의 형태로 나타난 거죠.”
“거기랑 미궁은 좀 다르잖아.”
“오토마톤이 나타난 시점에서 다르진 않죠. 제 말뜻이 뭔지 아시겠어요? 미궁의 창조자 혹은 창조자들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예요.”
“그냥 쉽게 말해주면 안 되나.”
“불가능하니 단서를 이리저리 흩어놨겠죠.”
도마뱀 꼬리라도 되는지, 어느새 원래 길이를 거의 따라잡은 수염을 손질하던 시바도 한마디 했다.
“형제님, 카사라에 있는 아이스틸의 산지는 파괴자가 점거하고 있는데 어떻게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파괴자는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아이스틸을 캐거나 폭발물을 터트려도 무시하지만, 일정 영역에 들어가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이명과 달리 가만히 놔두면 해가 없어서 솔도스 연방도 웬만하면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뜨겁게 데여서 그래.”
그도 처음부터 파괴자라 불리진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는 그저 덩치 크고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아이스틸은 미궁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새로운 자원이 발견되자, 권리를 따낸 기업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입점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당연히 채굴 영역도 점점 넓어졌는데, 어느 날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침묵을 지켰다. 어떠한 경고도 없이 등장해서 중장비를 이쑤시개처럼 분지르고, 기업이 고용한 용병들을 솜사탕처럼 뭉개버렸다.
사람이 워낙 많이 죽어서 솔도스 연방의 귀에도 사건이 들렸고, 기업들의 로비로 인해 군대가 출동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모두 박살이 났다. 처음에는 중대가, 그다음에는 대대가. 지휘부가 화들짝 놀라서 파견한 특수 능력자 부대조차도.
남자는 경고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영역을 벗어나서 카사라 주에 있는 모든 군부대를 파괴해버렸다.
테일러는 시바와 맥주캔을 부딪치며 옛 기억을 안줏거리로 꺼냈다.
“내가 젊었을 때의 일이지. 아직도 기억나. 솔도스가 군부대 하나를 미끼로 삼아서 운석을 떨어트리고, 번개 폭풍을 부르는 등 전략 마법 몇 개를 번갈아 썼는데 파괴자는 멀쩡하더라고.”
“저도 봤습니다. 크레이터를 빠져나오는 파괴자의 사진이죠?”
“맞아. 그 사진 찍은 기자는 떼돈 벌었을 거야.”
“어···. 생각해보니 파괴자는 웨어베어잖습니까.”
“그게 왜?”
“알파도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마침 색깔도 비슷합니다.”
“걔는 가죽이고 파괴자는 자기가 변신하는 거잖아. 뭐, 둘 다 사람 말을 안 한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네. 알파는 으르렁거리고, 파괴자는 아예 입을 안 열고.”
테일러가 힐끔 쳐다보니, 앨런은 눈을 감은 채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앨런! 이건 내 생각인데, 다른 별에 사는 초 문명의 외계인들이 우리 엿 먹어보라고 미궁을 만든 거 아닐까?”
“형제님, 숙취 해소 성법 걸어드릴까요?”
“진짜 그렇게 믿는다는 게 아니라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고.”
테일러가 앨런에게 다가갔다.
“뭐하니?”
“카사라에 어떤 의뢰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연구하러 가서 의뢰까지 하려고? 참 알뜰하기도 하지.”
“돈은 언제나 필요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아저씨도 알다시피 장비도 실력입니다.”
돋보기로 세포를 볼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럴 때는 현미경이 필요하고, 사용하려면 당연히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지식이나 정보도 같은 맥락이고.
“시온도 같이 가니?”
“미궁도 아닌데요.”
“하긴 지상의 의뢰와 매칭 시스템은 완전히 다르지. 녀석이 이상하게 우리와 자주 부딪치긴 하는데, 명색이 브레이커의 직원이니까.”
“마침 적당한 의뢰가 있네요. 아이스틸 채광 작업자 보호요.”
“파괴자를 어떻게 막을 건데.”
“그 사람 말고 몬스터나 강도로부터 지키는 겁니다.”
테일러는 앨런의 옆에 앉아서 아이스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아이스틸은 어떻게 얻게? 특수한 장비가 있어야 채광할 수 있잖아. 기업이 애지중지하는 장비를 너한테 써보라고 줄까?”
“가서 보면 되죠.”
“···뭐라고?”
“일꾼들을 보호하면서 장비를 살펴보면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겠죠.”
“며칠 만에 역설계를 하겠다고?”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별문자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중하기 시작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리는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시바가 끼어들었다.
“형제님, 내기하시겠습니까?”
“좋아. 나는 가능하다는 쪽에 건다.”
“그럼 저는 반대···. ···? 왜 가능에 거십니까? 분명 힘들다는 뉘앙스였는데.”
“그래서 내기 안 할 거야?”
“어머님이 도박을 싫어하셔서.”
“또 이상한 핑계 대기는.”
*
비행기 창문으로 보는 카사라는 계절의 변화를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 북쪽은 아직도 하얗지만, 남쪽은 초록색이 가득했다.
“봄도 끝물인데 여긴 아직도 눈이 많네.”
“북쪽이니까요. 저쪽이 파괴자가 점거한 영역인데, 비행 금지 구역이기도 합니다.”
“쫓아가서 고도가 낮아지면 공격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괴물이야. 사람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힘을 지녔지?”
수면 안대를 벗은 시바가 하품했다.
“형제님이 전성기에 심도 4였으니, 7이랑은 겨우 3단계 차이 아닙니까?”
“또 이상한 소리 하네. 4와 5의 차이는 1에서 4보다 커. 그다음 단계도 마찬가지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끝이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돼. 마치 우주처럼. 그래서 내가 교관으로 빠졌었지.”
“어쩌면 파괴자는 심도 8일 수도 있겠습니다.”
“심도 7 위로는 딱히 구분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 파괴자가 측정에 응한다면 몰라도.”
물론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솔도스 연방은 그때의 교전 데이터를 토대로 파괴자가 얼마나 강한지 추측하고 있겠지만, 그런 정보를 민간에 풀 리가 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앨런은 마중 나온 낡은 트럭을 발견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담배를 끄며 손을 흔들었다.
“메이즈시티에서 오신 분들이죠? 참 멀리에서도 오셨네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일감을 찾은 이유라도 있을까요?”
“우리가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그건 아니죠. 일만 잘하시면 됩니다.”
직원이 테일러의 말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지 엔진 소리가 유달리 거칠었다.
“너무 심하게 흔들리잖아. 좀 불안한데. 앨런, 왜 이쪽 의뢰를 받았어?”
“대기업은 운영하는 직속 무력팀이 있거나 용병회사와 계약을 맺어서 인력 수급이 원활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작은 회사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시바가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수염을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제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용병은 워낙 특이한 분들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분명 공고에 임금을 적어놨는데, 여기까지 와서 깽판을 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두 분 정도면 오히려 착한 부류에 속합니다.”
굴곡 없이 직선으로만 뻥 뚫린 길을 달리고 있으니, 여유가 생긴 직원이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혹시 모신교 사제십니까?”
“저는 수도승입니다. 치료나 봉사를 주로 담당하시는 분들을 사제라 부르고, 전투를 치르는 이들을 보통 수도승과 수녀라고 칭합니다.”
“오, 귀한 분이 오셨군요. 수도승이 용병 일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몬스터나 강도도 결국엔 구제해야 할 대상이니까요.”
“오···. 모신교 분들의 신념은 확실히 단단합니다. 카사라에 있는 분들도 몇 명 만나봤는데 다 비슷한 말을 하시더군요.”
“악은 처단이 먼저, 교화는 그다음입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직원은 끝없이 뻗어있는 길이 지루했는지, 금방 입을 열었다.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겁니다. 회사 측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용했으니, 그냥 경치나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계시면 됩니다.”
“고요할수록 경계해야 하는 법이지요. 게다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니 설렁설렁할 수는 없습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최근에는 강도들도 잠잠한데.”
“흠···.”
시바가 룸미러로 앨런을 슬쩍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앨런과 만나고 참으로 많은 사건과 사고를 겪었다.
‘이 또한 어머님이 예비하심인가?’
마침 저 앞에 마주 오는 트럭이 보였다. 트레일러를 연결해서 덩치가 매우 컸다.
직원이 말할 구실을 찾았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아이스틸의 원석을 운반하는 트럭입니다.”
“트럭만 홀로 있군요.”
“노상강도가 있지만, 그리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닙니다. 대기업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간 큰 짓을 할 놈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노려도 원석이 아니라 제련소를 노리겠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쪽은 몬스터죠.”
“왼쪽에 있는 녀석 말인가요?”
앨런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하얗고 푸른 비늘을 몸에 두른듯한 거대하고 길쭉한 벌레가 땅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일대는 얼마 전에 대기업 쪽 용병들이 청소했다고 들었는데···.”
< 카사라(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