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37화 (137/193)

< 갱도(3) >

“형제님, 다수의 흔적이라고 하셨습니까? 혹시 어디 소속인지···.”

“잠시만요.”

앨런은 시바의 물음에 눈을 감고 거미를 조종했다. 돌기둥 뒤에 가만히 숨어있던 거미가 흔적을 따라 슬금슬금 움직였다.

이곳은 동굴이라 실수하면 소리가 크게 울리기에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원시림에서는 소음이 좀 발생해도 바람 소리겠거니 하고 넘기겠지만 여긴 그렇게 속이기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이동한 거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휴식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작은 카메라 아이로 열심히 그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앨런은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1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습니다.”

“소속을 나타내는 마크는 아예 없습니다.”

“그럼 용병 아닐까요?”

“아뇨. 용병이라기엔 소속감과 규율이 느껴집니다. 비밀스러운 작전을 수행하러 내려왔으리라 짐작됩니다.”

테일러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시바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고민하고 있어. 이 아래에서 수상한 짓 하는 놈들이 엠엠코 말고 있겠어? 내 말이 맞지?”

“네. 지상에서 엠엠코 무력부대가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눈여겨봤습니다. 나름 위장한다고 했지만, 핵심 부품이나 룬문자가 풍기는 마력이 유사합니다.”

“엠엠코의 영역에 다른 기업이 함부로 들어올 리가 없지. 그러기도 힘들고. 일단 이동하자.”

휴식을 마친 일행은 동굴이 교차하는 곳에 도착했다. 앨런 일행의 통로에는 X 표지판이 있었다.

“저들도 이 뒤로는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요. 따라가죠.”

“네? 반대로 움직이면 입구인데 왜 따라갑니까?”

케이든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앨런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어···, 제가 실수라도···?”

“엠엠코 측에서 비늘지렁이를 처리했다고 했었죠.”

“네.”

“그런데 녀석의 몸통은 갱도에 딱 알맞은 크기였습니다. 그러니 안전하다는 말은 애초에 거짓말이었습니다.”

“왜죠? 왜 우릴 속인 거죠?”

“외부의 자극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비늘지렁이는 배가 부르면 한동안 가만히 있습니다.”

케이든은 동굴로 미끄러져 내려올 때 테일러의 어깨에 실려있던 충격으로 구토를 하느라 이야기를 못 들었지만, 이쯤 설명하면 무슨 맥락인지 충분히 이해할 머리가 있었다.

“허···. 그럴 거면 차라리 동물을···.”

“녀석의 덩치와 길이는 기억합니까?”

“네. 그렇게 커다란 녀석은 처음 봅니다. 존재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경외심마저 듭니다.”

“몸집이 있는 만큼 식사량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더욱이 마력도 충족시켜야겠죠. 암석에 섞인 아이스틸보다는 우리가 달수정으로 캐낸 원석에 마력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지속성도 좋습니다. 배가 쉽게 부르고, 포만감도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굳이 우리를 제물로 써야 했을까요? 그냥 돈을 더 써서 먹이를 충분히 마련하면 됐을 텐데.”

“케이든 씨는 돈보다 사람을 더 가치 있게 판단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법입니다. 여기까진 추측입니다. 비늘지렁이가 동물보다 사람을 더 선호해서 던져줬을 수도 있습니다.”

“하···. 저도 의심 가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엠엠코에서 마진을 늘리려고 유통 비용을 우리에게 전가하려고 했는데, 필사적으로 막았거든요. 아마 8개월 정도 지났을 겁니다.”

케이든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테일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겸사겸사 처리하려는 거네. 그리고 말 잘 듣는 녀석들로 데려오겠지. 아무리 막장이라도 함부로 죽이면 주변의 시선이 따가울 텐데, 괴물이 한입 거들면 변명하기도 쉽지.”

“참 어지러운 세상이군요.”

“시바, 네가 수도원에서만 살다가 나와서 그래. 10만 코인만 줘도 사람 찌르겠다는 놈들이 수두룩할걸.”

“랑카에서는 1만 코인이면 충분합니다. 1+1 행사도 할걸요.”

앨런의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가 그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 나도 알지. 일단 케이든의 의견에 따라 입구 쪽도 정찰해보자. 여긴 광산이랑 가깝잖아. 선택지를 늘려서 나쁠 건 없지.”

“네.”

앨런은 테일러의 말대로 거미를 입구 쪽으로 보냈다.

동굴과 달리 그쪽은 굉장히 밝았다. 엠엠코 소속 인원들이 튼튼한 장비로 몸을 감싸고 입구를 지켰다.

한쪽에는 푸른빛을 강하게 발산하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수면이 일렁거리더니 잠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밖으로 빠져나왔다.

‘광산의 호수와 연결된 장소구나. 일단 기억만 해두자.’

앨런은 자신이 본 광경을 그대로 설명했다.

“방비가 튼튼해요. 생존자를 발견하면 도와줄까요?”

“아닐걸. 살려놓고 계속 보상해주는 것보다 죽이고 처리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형제님, 왜 그리 잘 아십니까?”

“내가 속했던 단체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런데도 그 자리에 있다 보면 보이는 게 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기왕이면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게 좋았다. 앨런은 룬펜을 들어서 은신을 위한 룬문자를 여기저기 새겼다.

“저들이 들어온 입구에서 여기까지는 통로가 하나만 있고, 저 앞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다른 길이 있길 어머님께 빌겠습니다.”

“아니면 돌파해야지. 사람이라고 주저하지 마라. 놈들은 엠엠코 소속이라 정화봉사단에 넣을 수 없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앨런의 작업이 끝나자 일행은 전진했다. 중간중간 작은 통로가 보였으나 아쉽게도 막힌 길이거나, 너무 좁아서 진입하기 곤란했다.

“비늘지렁이가 뚫어놓은 길이겠죠. 거미를 보내서 통로를 확인해도, 어차피 사람이 못 지나가니 쓸모없습니다. 음···.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일행이 벽에 바짝 붙었다. 잠깐 그러고 있으니 모습이 점점 흐려지다가 동굴의 벽면과 비슷하게 변했다. 가까이 와서 주물럭거리지 않는다면 몰라볼 정도로.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으니,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대령님은 안 내려오셔?”

“지렁이가 움직이면 대처한다고 위에 남으셨어.”

“배불리 먹여서 잠재워 놨는데 돌아오면 안 되긴 하지. 현명한 선택이야. 어떻게 그런 괴물이 여태까지 이 아래에 있었지?”

“파괴자 때문에 탐사하기도 곤란하고, 여기는 땅속이니까. 놈이 광산까지 굴을 안 뚫었으면 우리도 몰랐을걸.”

“저 앞에 가면 거대한 결정이 있잖아. 불투명해서 안쪽도 안 보이는데 아이스틸이 맞긴 하나?”

“연구원들이 아이스틸이라 했으니 맞겠지.”

“그만 떠들고 빨리 움직여. 늦었다고 욕먹으면 니들 탓이야.”

“어차피 가봐야 지렁이 냄새만 맡을 텐데···.”

전투원들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앨런이 나타났다. 다른 일행도 슬그머니 움직이자 동화가 풀리며 본 모습이 드러났다.

“손이 근질거려서 참느라 힘들었다. 케이든, 정신 차려.”

테일러가 눈을 질끈 감은 케이든을 흔들었다. 단시간에 워낙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반쯤 혼이 나간 모습이었다.

케이든을 달래며 이동한 앨런은 거대한 공동을 발견했다. 축구 경기장 몇 개를 붙여놓은 듯한 넓이라 거대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수 있었다.

테일러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원래 입구에는 경계병을 배치하는 게 상식이거늘.”

“바쁘니까요.”

앨런의 말대로 전투원들은 작은 비늘지렁이를 상대하느라 바빴다. 상대적으로 작다는 의미지, 길이가 짧아도 5m는 되었다.

벽면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해서 암석이 불쑥 솟아오른 곳 뒤에 몸을 숨겼다.

“뭐 이리 넓냐.”

“갱도에서 봤던 녀석의 보금자리 같아요. 반대쪽 벽을 가득 채운 아이스틸 결정 보이시죠?”

“저런 게 왜 존재하는 거지?”

“통짜 아이스틸 같네요. 내뿜는 마력이 비늘지렁이를 유혹하겠죠.”

“어마어마하게 크군. 앨런, 우리가 얼마나 걸어왔지?”

“파괴자가 걱정되시는 거죠? 어림잡아서 7~10km쯤 떨어져 있을걸요. 동굴 길이 워낙 구불구불해서 정확한 판단은 어려워요.”

“그 정도면 충분해.”

일행이 숨을 돌리며 빠져나갈 길이 있나 탐색하는 사이, 앨런은 본격적으로 내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달수정 렌즈로 만든 고정형 채광기가 아이스틸 결정을 향해 빛을 쏘아내도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채광기 몇 개는 비늘지렁이의 공격으로 고장 난듯했고, 전투원들은 공동의 주인들을 하나하나 처치하는 중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관측 기기를 사용해서, 비늘지렁이의 시체와 아이스틸 결정을 조사했다.

아이스틸 결정 표면에 동그란 것들이 포도알처럼 붙어있는데, 안쪽에서 꾸물거리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테일러 역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비늘지렁이의 산란장인가? 그런데 왜 네 발이 달려있어?”

“형제님, 저건 말입니다. 혹시 눈에 이상이?”

“며칠 전에 앨런이 점검 해줬거든. 나도 보여. 말이 왜 지하에 있냐 이 말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의 뱃가죽이 요동쳤다. 길쭉한 생명체들이 마구 헤엄치는 모습처럼. 그 움직임이 한계에 다다르더니.

끼에엑!

복부가 터지며 새끼 비늘지렁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섭취했는지 배가 빵빵한 녀석들이 철퍽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광경이나, 연구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에비를 가동, 마법을 부려서 작은 녀석들을 처치했다. 그럴수록 비늘지렁이들이 난리를 부렸지만, 어차피 상대는 전투원이 했다.

골렘이나 오토마톤이 주로 방어를 담당했다. 설령 전열을 뚫고 들어오는 녀석이 있어도, 전투원의 몸은 두꺼운 마력 방어막이 보호했다.

전투는 엄청 자극적이지만, 그게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전투원들도 마찬가지로 지루한 기색이었다.

“그냥 구멍을 전부 막아버리면 안 되나?”

“그게 되면 했겠지. 단단한 돌도 파고드는 놈들인데 그걸 못 뚫을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대령님이 데스아이 보내주신다고···. 아, 왔다.”

앨런이 빠져나왔던 통로에서 은회색 구체가 등장했다. 구체는 공중에 뜬 상태로 전투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경로를 막은 비늘지렁이가 존재하면, 표면 장갑을 일부 개방하고 포구를 내밀었다.

콰앙!

포격 한 방에 5m짜리 비늘지렁이가 핏물로 변했다. 많은 적을 감지한 구체는 사방으로 포구를 내밀었다. 마치 성게 같은 모양새였다.

한 방에 적이 사라지니, 공동의 소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전투원들의 자축을 본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왜요?”

“데스아이는 관측 능력도 대단해. 수준 낮은 투명화 마법은 쉽게 꿰뚫어 봐.”

테일러의 말대로 데스아이가 변화를 일으켰다. 표면 장갑이 물결치더니 마치 사람의 동공처럼 변했고, 주변에 적이 남아있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데스아이가 곳곳을 훑을 때마다 묵직한 마력의 파장이 요동쳤다. 그 시선은 앨런이 숨은 장소로도 향했다.

기이잉!

유독 강한 출력을 몇 번 뿜어내더니 다른 장소로 눈을 돌렸다.

테일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시바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정작 앨런은 그런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고, 데스아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살펴보고 싶은데···.’

부유, 관측, 포격 능력이 참 매력적이었다. 다른 기능도 있을 테지만, 일단 눈에 띄는 특성은 3가지였다.

그때,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앨런, 저기 보이지?”

“네.”

테일러가 가리킨 곳에는 다른 통로가 뚫려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있는 장소의 반대 방향이었다.

공동을 가로질러 이동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전투를 마친 부대원들이 다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무리 은신 성능이 좋아도 그건 가만히 있을 때 극대화되었다. 이동하면 데스아이에게 바로 들킬 확률이 높았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뭔데?”

“적을 적으로 제압하는 방법이죠. 원래는 회피하려고 연구한 수단인데 이런 쓸모도 생기는군요.”

앨런은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어느새 천장에 매달려있던 거미가 강렬한 파동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한가하게 주변을 산책하던 데스아이가 천장을 휙 쳐다보더니, 앨런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던졌다.

“어, 들켰는데?”

“우릴 상대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포문을 열던 데스아이는 아래에서 솟구치는 무언가의 방해를 받았다.

아까보다 커다란 비늘지렁이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기 시작했다. 큰 먹잇감의 기척을 찾아온 녀석들답게 원래 공동을 차지했던 개체들보다 적어도 2배는 컸다.

< 갱도(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