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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38화 (138/193)

< 갱도(4) >

앨런이 도화선을 당겨서 또 이어진 전투는 아까보다 훨씬 힘겨웠다.

비늘지렁이의 길이가 적어도 2배 늘어났으니, 부피는 몇 곱절로 증가했다. 덩치는 힘이며, 힘을 유지하려면 육체가 단단해야 했다.

처음 같은 방식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었다. 방아쇠를 더 오래 당겨야 했고, 마법도 더 많이 퍼부어야 했다.

게다가 비늘지렁이의 특성 때문에 전투는 난전으로 변했다. 천장에서 떨어지고, 바닥에서 불쑥 솟아오르니 접근전 빈도도 많이 늘어났다.

키에엑!

화염구에 직격당한 녀석의 머리가 불타오르고, 괴성을 지르며 몸을 꿈틀거렸다.

10m보다 긴 녀석이 몸부림치니 그 범위가 굉장히 넓었고, 다른 개체를 상대하던 전투원 하나가 몸통에 휩쓸렸다.

푸른 마력 방어막이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그 후로는 전투복과 육체로 버텨야 하는데, 질량이나 공격의 묵직함은 비늘지렁이가 몇 배는 앞섰다.

원래 상대하던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고 넘어진 전투원을 삼켰다.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붉게 칠해진 방어판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케이든은 잔인한 장면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앨런이 등을 밀자 넘어지지 않으려고 눈꺼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집중하세요. 우리는 저길 돌파해야 합니다.”

“지금요?”

“어느 한쪽이 이기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만,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엠엠코의 지원군이 더 올 수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비늘지렁이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앨런이 어깨를 강하게 두드리자, 거의 넋이 나갔던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케이든은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도중에도 걱정거리 하나를 내뱉었다.

“저 얼굴은···.”

“지금 마스크 쓰고 있잖아요.”

“아, 맞네요.”

마스크의 면적은 꽤 넓어서 눈 아래부터 턱까지 전부 가려졌다. 앨런은 그래도 불안해하는 케이든에게 룬문자 몇 개를 새긴 철판을 건넸다.

“인식과 관측을 방해하는 룬문자입니다. 영상이 찍히더라도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앨런, 준비는 끝났냐?”

“가시죠.”

앨런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일러가 선두에 섰다. 그의 몸 위로 시바가 하얀 방어막을 덮었다. 상자가 그 뒤에 섰고, 앨런은 케이든을 표범 위에 강제로 앉혔다.

“강하게 붙잡으세요.”

케이든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 순간, 표범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앨런은 뒤를 따르기 전에 전장을 한눈에 담았다. 미리 퍼트려둔 마력에 정신을 집중하니, 촘촘한 그물처럼 변해서 전투원들을 둘러쌌다.

지금 하는 행위는 전투원을 도우려거나,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변수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마력을 깊이 운용하자 얼굴에 3개의 원이 나타나고, 미간이 밝게 빛났다. 광량이 최고점에 다다라서 바이저마저 감당 못 할 정도가 된 순간.

증폭된 정신이 그물처럼 퍼진 마력을 휘어잡고, 말단마다 깃들어서 교묘하게 움직였다.

지금 앨런이 노리는 건 전투원이나 연구원들이 사용하는 관측기기. 영상이나 사진을 찍는 것만 방해하면, 이쪽의 정체를 파악하는 시간이 크게 늘어날 터였다.

파직!

전투원의 옷에 달린 액션캠이나 연구원의 숄더캠의 렌즈에 금이 생겼다. 내부에 벌써 침투한 마력은 기억수정을 깨트리기도 했다.

전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시전자가 앨런이어서 가능한 방법이기도 했다.

웬만한 실력의 마법사도 한동안 집중해야 가능한 다중 해킹을 단숨에 끝내고,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거리가 크게 멀어지지도 않았다.

“오, 저건···.”

거대한 아이스틸 결정의 앞, 그러니까 연구원이 주로 포진된 지역을 달리다 보니 눈에 띄는 물체가 있었다. 난리 속에 부서진 채광기가 흘린 달수정이었다.

이름 그대로 달에서 채취하는 수정이라 구하기 힘들고, 채광기 가격의 70%를 차지할 만큼 비싸기도 했다.

앨런의 허리가 자연스럽게 접히더니 손도 무의식적으로 움직여서 달수정을 잡아챘다.

삐!

저 앞에 달려가는 상자도 주인을 따라 달수정을 슬쩍 챙기고 있었다. 앨런이 달수정을 원반처럼 던지자, 미리 신호를 받은 상자가 집게발로 잡아채서 품 안에 보관했다.

테일러가 선두에 서서 길을 뚫고 시바가 방어막을 계속 채워주는 사이, 앨런은 전투원들의 마도구나 매직웨어에 조금씩 간섭했다.

해킹해서 서로 공격하게 만드는 게 최고지만,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고 캠보다는 방화벽이 두꺼워서 시간 소모가 컸다.

그러니 지금은 제어권을 온전히 강탈하기보다는 부품에 미세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쪽이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만! 멈춰라!”

의수를 포신으로 변형한 전투원이 쏜 포격은 각도가 좀 틀어져서 동료를 맞췄고.

“해킹이다! 우리도 간섭해! 아니, 왜 나를!”

해킹하려는 마력을 강제로 뒤틀어서 다른 전투원의 머리에 꽂아버렸다. 아군의 공격에는 내성이 약한지, 인공 안구가 바로 터져버렸다.

앨런은 얼굴을 감싸 쥔 전투원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미 다른 사람은 공터를 빠져나간 뒤여서 자신만 도착하면 됐다.

“어서 와라.”

앨런이 통로로 진입하자 기다리던 테일러가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윽! 또 달립니까?”

“넌 편하게 가잖아. 붙잡고만 있어.”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케이든이 앓는 소리를 냈다. 창백한 얼굴이 그의 진심을 대변했지만, 달아나려면 사소한 것쯤은 무시해야 했다.

“그 상태로 말하면 혀 잘린다.”

테일러의 경고가 표범 위에 짐짝처럼 매달린 케이든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한동안 달린 일행은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벽에 기대서 숨을 골랐다.

“형제님, 마스크가 정말 좋군요. 신선한 산소가 계속 공급되니 운동능력이 최대로 유지됩니다.”

“누님이 대단하긴 하지.”

“이럴 때는 앨런 형제님의 준비성을 칭찬해야죠.”

“쟤는 칭찬보다 기억수정이나 책을 더 좋아···.”

“잠시만요.”

지나온 길을 살피던 앨런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테일러가 같은 방향을 보며 물었다.

“왜?”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앨런이 마력 파장 탐지기의 출력을 올렸다. 안테나가 강한 파장을 뿜어내고, 동굴 내부를 폴리곤 형태로 바이저에 표현해줬다. 그리고 이질적인 존재를 포착했다.

“데스아이입니다. 엠엠코가 승리했군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였다. 비늘지렁이를 몰아내고 무언가를 연구했으니,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할만했으리라.

“다시 뛸까?”

“아뇨. 안전히 피하려면 꼬리를 잘라내야죠.”

앨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너머가 밝게 빛났다. 빛의 정체는 데스아이의 포격. 긴 꼬리를 그리며 혜성처럼 날아들었다.

“유도기능도 있군요.”

“충격에 대비!”

테일러가 말하지 않아도 앨런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룬캔버스로 방어막을 생성해서 전면부에 둘렀다.

그리고 충돌. 방어막을 비스듬하게 타격한 마력 광선이 휘어지더니 천장에 틀어박혔다.

콰르릉!

지반이 불안정했는지 대번에 무너져내렸다. 테일러가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앨런과 일행 사이에 벽이 생겼다.

앨런이 동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은회색 구체가 두둥실 날아왔다. 표면이 약간 찌그러져 있었지만, 운용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앨런은 어떻게 상대해야 부품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테일러가 들었다면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은 암석이 가로막고 있으니 괜찮았다.

그런 고민이 누군가에게는 결사 항전의 각오를 다지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남고 동료를 보내겠다는 거냐?]

묵직하고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외형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뇨. 각도 계산을 실수했네요.”

[···.]

“그런데 누구신지?”

[···.]

“알려줄 생각이 없군요. 혹시 그냥 보내줄 수 있나요?”

[그런 말은 사고를 치기 전에 했어야지.]

더 이상의 대화는 사치라는 듯 데스아이의 포문이 바로 열렸다.

대치 중인 병기는 지름 2m의 구체였다. 꽤 크지만 포탄을 일일이 싣고 다닐 수 없으니, 당연히 포격에는 마력을 사용했다. 그 원천은 마력로 혹은 마력융합로다.

‘융합로겠지.’

앨런은 휘어지는 빛줄기를 피하며 생각했다. 앨런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어도 시온의 움직임을 복사한 파워슈트는 공격에 대응해서 최선의 회피기동을 선보였다.

가끔은 너무 유연하게 움직여서 앨런의 몸이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목소리는 사내인데, 움직임이 계집 같구나.]

“오, 그게 보이시나요?”

[···.]

데스아이를 조종하는 남자는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앨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 개선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니 굉장히 즐거웠다.

‘이 상황에는 어떤 룬문자가 좋을까?’

고민은 짧았다. 앨런은 데스아이를 본 순간부터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끊임없이 생각했고, 그중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룬캔버스가 꿈틀거리며 룬문자를 그려냈다.

[굴절], [반사]

광선으로 이루어진 포격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있을까. 룬문자의 파동이 파워슈트를 감싸자마자 돌진했다.

앨런의 계산대로 광선이 외장갑에 닿자마자 이리저리 휘었다. 반사는 별 효과가 없는데 굴절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빛을 지면에 처박았다.

빠르게 접근한 앨런은 팔을 데스아이의 몸통에 바짝 붙였다.

[해킹? 소용없다.]

“해킹한다고 안 했는데.”

데스아이는 원래 군용 병기라 어떤 위험한 방화벽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탐험은 좋아하지만, 모험은 주의해서 해야 했다.

앨런은 남자의 말을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였다. 다른 수단도 많은데 굳이 적이 내뱉은 방법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기계를 망가트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핵심 부품을 뜯어내는 거지.”

사람은 목을 자르면 죽는다는 것과 동급의 발언이었지만, 앨런은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했다. 수리와 분해는 자신있었다.

손바닥으로 망가진 표면 장갑을 타격하자 비틀림이 더 커졌다. 그대로 붙잡아서 찢어내고, 안에 숨은 포구를 뽑아냈다.

멀쩡한 포구가 계속 광선을 쏘아내도 [굴절] 때문에 근거리에서도 빗나갔다. 물론 몇몇은 공격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파워슈트의 내구력은 아직도 멀쩡했다.

앨런은 자신이 만든 구멍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이런저런 장비를 많이 장착하면 내부의 방비가 약해진다. 데스아이의 방어막도 이 거리에서는 무용지물이라 손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앨런의 손이 데스아이의 심장에 닿았다.

“찾았다.”

[기억해두겠다···. 치지직!]

남자의 음성이 바로 끊겼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외형은 바꿀 수 있어도 마력은 쉽게 속이기 힘들었다. 앨런은 남자의 마력을 뇌리에 새겼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세월. 아마도 무력부대를 이끄는 스티븐 대령이겠지.’

원격조종보다 직접 만나면 훨씬 위험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은 먼저 해결할 일이 있었다. 앨런이 팔을 빼내자, 억지로 뜯어낸 소형 마력융합로가 주르륵 딸려왔다. 혈관처럼 달린 마력케이블에서 액화마력이 줄줄 새어 나왔다.

“아깝게.”

“너, 방금은 오로스 교수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무너진 암석 일부가 치워져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테일러가 거기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무사하시네요. 다행이에요.”

“우리보단 네가 걱정이었지.”

“데스아이도 기계잖아요. 그런데 오로스 교수님을 아세요?”

“특이한 오크잖아. 당연히 이 바닥에서 유명한 탐험가지. 그 사람 따라서 물리 해커로 전직했니?”

“그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교수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 뇌를 보호하려고 근육으로 적을 배제한다고.”

“···일단 움직이죠.”

뚫린 구멍을 통과하자 반반 나뉜 길이 보였다. 왼쪽은 거대한 아이스틸 결정으로, 오른쪽은 평범한 동굴의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지형처럼.

그리고 지상과 달리 불투명한 아이스틸 내부에 무언가가 언뜻 보이는 듯했다.

‘사람의 형체인가 아니면 착시인가. 그러고 보니 채광기로도 안 부서졌지.’

앨런은 한참을 보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일행의 뒤를 따랐다.

< 갱도(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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