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39화 (139/193)

< 갱도(5) >

아이스틸 광산 호수 근처에 세워진 전술지휘소.

“흐음···.”

스티븐 대령은 병원 침대와 비슷한 데스아이 조종석에서 눈을 떴다. 상반신을 일으키자, 옆에서 대기 중인 부하가 말을 걸었다.

“정리는 끝나셨습니까?”

“아니. 당했다.”

“네?!”

“고작 데스아이 하나 망가진 거로 호들갑이냐. 야전 연구소는 아직 멀쩡하니 사람을 보내서 현장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지원해.”

“알겠습니다.”

스티븐은 멀어지는 부하에겐 눈길도 안 주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따뜻한 물로 목을 적시며 아까 적이 보여줬던 움직임을 떠올렸다.

‘어디 소속이지?’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휘소 구석으로 향한 스티븐은 얇은 천을 벗겨냈다. 그 안에는 새까만 육각 기둥이 있었다. 엠엠코의 정보망에 접속할 수 있는 단말기이며, 스티븐 대령 같은 지휘관에게만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

스티븐은 목 뒤의 기억수정을 뽑아서 단말기에 꽂았다. 표면을 따라 푸른빛이 그물처럼 퍼지더니, 공중에 동그란 구체를 만들었다.

“음.”

스티븐은 구체의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기억수정에 담긴 침입자의 몸놀림을 토대로 정보 검색을 시작했다.

엠엠코가 분석한 방대한 자료가 주르륵 나열되고, 침입자의 동작 유사도를 측정해서 동떨어진 건 버리고 나머지를 옆으로 빼냈다.

월영문(月影門)

북극여우발굴단

브레이커

최종적으로 3개의 단체를 선별했다. 브레이커의 유사도가 가장 높으나, 그게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혼란을 주려고 최대한 따라 하며 속였을 수도 있지. 그쪽과 우리의 분쟁을 바랐을 수도 있고.’

신비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증거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영상은 딥페이크로 수정하고, 사진도 프로그램을 통해 덧칠했다.

그러니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사로잡아서 어디 소속인지 알아내야 했다. 증거와 명분이 있다면 상대측에서도 찍소리 못하고 고분고분 행동할 테니까.

‘변수는 빠르게 제거한다.’

결정을 마친 스티븐은 다시 조종석에 앉았다. 그가 눈을 감자, 지휘소 구석에 있는 검은색 통에서 무언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호수로 막 잠수하려던 전투원들은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대령님도 가십니까?”

“그래야지. 내가 처리할 일이 생겼다.”

대령이라 불린 사람의 피부는 굉장히 팽팽하고 깨끗했다. 스티븐과 굉장히 닮은 자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그는 잠수 장비도 없이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

앨런 일행은 데스아이의 포격에 의해 무너진 통로로부터 한참을 이동했다. 이동하며 시간 벌이용으로 통로를 몇 번 무너트리기도 했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자 휴식시간을 가졌다.

“주···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표범에 매달려 있었으면서 뭘 죽어.”

“테일러 형제님은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뭐가 높은데?”

“요원들의 교관으로 재직했고, 그다음에는 앨런 형제님을 만났잖습니까. 저의 탐험가 경력은 짧지만, 언급한 분들이 평범에서 많이 벗어났음은 알고 있습니다.”

“···.”

테일러가 코를 씰룩거리는 사이, 시바가 케이든의 몸을 진단했다. 하얀빛이 육체에 스며들 때마다, 부들대던 부위가 크게 진정되었다.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피로가 동시에 사람을 괴롭히는 가운데, 앨런은 활기찬 움직임을 보였다.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세운 경험이 많은 테일러조차 앨런의 저런 활력이 어디에서 솟아오르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심지어 마력과다증으로 몸이 아픈데도.

“앨런.”

“네.”

앨런은 무언가를 뚝딱거리는 상태로 대답했다. 테일러는 등을 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좀 쉬렴.”

“지금 하는 작업이 저에게는 최고의 유흥이자 에너지 충전이에요.”

“사람은 소모품이야. 당장은 휴식을 위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겠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꼭 필요한 행위였음을 깨달을 거다.”

“5분만요.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테일러는 어쩔 수 없이 시바에게 눈짓했다. 드워프 수도승은 인상 좋은 미소를 띠며 손을 하얗게 물들였다.

“언제나 우리를 연민하시는 어머니, 이 자리에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오랜만에 경전을 제대로 외우며 성법을 완성했다. 그렇게 빛을 쏘아내자.

“잉?”

앨런에게 흡수되기는커녕 등에 닿자마자 튕겨 나오고, 시바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형제님?”

“집중하고 있어서 조절을 안 했습니다. 다시 해보세요.”

앨런은 마력과다증이다. 너무 많은 마력이 몸을 해치지만, 반대급부도 있었다. 마력이 많으면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고, 그건 성법도 마찬가지였다.

앨런이 마력을 조절하자 틈이 생기고, 치유의 성법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작업을 마친 앨런이 동굴 벽에 등을 기대자, 테일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는 변장을 했다지만, 표범이나 상자는 어떻게 할 거냐?”

“이미 조치는 취해놨어요.”

앨런이 상자를 바라보자, 아이스틸 결정을 긁고 있던 녀석이 반응했다.

삐—

몸을 지탱하던 다리가 모두 떨어지더니, 몸통이 위로 떠올랐다. 그 상태로 테일러의 근처를 천천히 부유했다. 외장갑의 위치도 슬그머니 조정했다.

“데스아이의 부유장치와 마력융합로를 추가했어요. 카메라 아이 위치를 수정하고, 외장갑도 교체하니 모습이 많이 달라졌죠?”

예전 상자의 몸통이 원통 비슷했다면, 지금은 구체와 닮았다. 다리도 없어져서 그것만으로도 외형이 크게 차이 났다.

“상자는 됐고 표범은?”

앨런이 손가락을 튕기자, 표범의 은회색 몸체가 새까맣게 변했다. 당연히 룬문자도 전부 가려졌다.

“흑표범이 됐구나.”

“그래도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영혼석과 핵심부품만 챙기면 됩니다. 다른 부품도 아깝지만, 단서를 주면 안 되니까요.”

표범과 상자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변형은 나중에 해도 상관없었다.

“저···.”

케이든이 소리를 내자 앨런이 고개를 돌렸다.

“네. 말하세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질문을 안 했는데, 표범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카사라에 오기 전부터 있었죠.”

“왜 못 본 것 같지···.”

“인식저해를 적용해서 그럽니다. 아마 말콤 씨도 모를 겁니다.”

테일러는 여전히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케이든 말을 들어보니 표범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상자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지? 대기업 놈들은 약간의 단서만 있어도 꼬투리를 잡으려 할 텐데.”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무리니 다른 기업의 그늘 밑에 숨어야죠. 마셜 회장님의 제안도 있었으니 브레이커에 문의하면 바로 받아주겠죠.”

“그냥 엠엠코를 뒤집는 게 속 편하겠다.”

“게릴라로 전직하는 건가요? 대기업이 사용하는 장비에 어떤 마법공학 기술이 적용됐는지 확인할 수 있겠군요.”

“진심이야?”

“농담···이죠.”

앨런은 말을 마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다리에 힘을 되찾은 케이든은 혼자 힘으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막 태어난 초식동물처럼 후들대더니, 이제는 제법 힘차게 걸어 다녔다.

동굴은 처음에 발을 디뎠을 때와 유사한 양상을 유지했다. 한쪽 벽은 아이스틸 결정이, 다른 쪽은 암석이 차지했다.

앨런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곳도 비늘지렁이가 다녀갔는지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었다.

“꽤 커다란 녀석 같네요.”

“갱도에서 봤던 개체보다 클까?”

“동굴 크기를 보세요.”

“녀석의 몸통보다는 좁구나. 그럼 됐다.”

“그보다는 이곳의 흔적을 보세요. 결정 주위에 쓸린 자국이 많죠? 비늘지렁이들이 결정에 몸을 비비며 지나갔다는 뜻이에요.”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채광기로도 안 부서지는 결정인데, 녀석들에겐 좀 다르게 느껴지나 봐요. 접촉만으로도 마력을 흡수할 수 있나?”

앨런이 파워슈트 장갑을 벗고 맨손을 결정 표면에 붙였다. 뼈가 시릴 만큼의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사람과 몬스터의 차이인가?”

“앨런···.”

“네, 가요.”

벌써 저만치 앞서간 테일러의 재촉에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앨런은 계속 결정을 살피며 동굴을 걸었다. 아이스틸 결정은 굉장히 거대했다. m가 아니라 km 단위로 계산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아이스틸 결정이 포진한 모양새나 위치를 보면.

‘중심에 파괴자가 있을 것 같은데···.’

앨런은 파괴자가 괜히 이곳을 영역으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대에 어떤 가치를 두고 있기에 눌러앉은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많았고, 비밀을 밝히려던 용기 있는 자들은 전부 시체로 변했다.

‘그러니 언제나 주의하자.’

앨런의 발걸음이 잠시 늦춰졌다. 광산과 공동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경로를 합쳤다. 앞에 펼쳐진 통로까지 더하니, 현재의 위치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파괴자의 영역은 아니야.’

동굴은 그의 영역을 빙 돌아가는 형태로 뚫려있었다. 가장 좋은 미래는 이대로 움직이다가, 위로 향하는 출구를 찾는 것이었다.

*

전투의 열기마저 아이스틸 결정이 앗아간 공동. 엠엠코의 직원들은 전사자를 한곳에 모아놨다.

“여긴 서늘해서 부패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터진 부분만 잘 꿰매면 그럭저럭 볼만 하겠지.”

“말조심해.”

“알았어. 저기 지원병력이 들어온다. 선두는 누구지?”

“멍청아. 대령님이잖아.”

공동으로 들어온 스티븐은 전사자 쪽에는 눈길도 안 주고, 바로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진행 상황은?”

“처음에는 채광기로도 채굴이 안 돼서 당황했지만···.”

“그래서?”

대령의 물음에 책임자가 한쪽을 가리켰다. 약간 다른 형태의 채광기가 아이스틸 결정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렌즈를 2개 겹치니 바로 해결됐습니다. 아이스틸이 물처럼 녹아내리지만, 그보다는 아래를 향해 길을 뚫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요. 이렇게 간단한 일을 여태까지 몰랐다니.”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은 날려버리고 작업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스티븐은 잠시 고민했다. 채광기가 뚫은 길을 통해 원래의 목적지로 가야 할지, 아니면 침입자를 쫓아야 할지.

고민하던 그에게 부하가 다가왔다.

“대령님.”

“보고해라.”

“정찰 결과, 침입자들은 동굴을 무너트리며 도주했습니다. 암석을 치우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그럼 됐다. 최소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복귀하라고 해.”

부하의 보고가 고민을 끝내줬다. 스티븐은 팔짱을 끼고 비늘지렁이의 시체를 깔고 앉았다. 그의 시선은 채광기가 만든 내리막길에 고정되었다.

*

앨런 일행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통로는 더 이어져 있지만, 기어서 지나가야 할 높이라 막혔다고 판단해도 무방했다.

“엎드려야 하나? 한참 가다가 길이라도 막히면 곤란한데.”

“형제님, 저는 폐소공포증이 있습니다.”

“드워프가 무슨 폐소공포증이야. 그럼 동굴은 어떻게 다녀? 그냥 기어 다니기 싫다고 말해.”

“맞습니다.”

두 사람은 심심해서 나오는 대로 막 내뱉고 있었다. 한쪽에는 벽에 기댄 앨런이 정찰 거미를 조종하고 있었다.

앨런이 눈을 뜨자 테일러가 물었다.

“어때?”

“길이 있긴 합니다. 다만···.”

“다만?”

“2시간은 기어가야 합니다.”

“이런 ㅆ···.”

테일러가 욕설을 삼켰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2시간을 기어갈 생각을 하니 울화가 차올랐다. 몸의 힘듦과 정신적 압박이 어마어마할 테니까.

앨런은 표범과 상자를 쳐다봤다. 표범은 납죽 엎드려서 움직이면 되니 그대로 둬도 되지만, 상자는 그럴 수 없었다.

‘아쉽지만 분리해야지.’

앨런은 벌떡 일어나서 상자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제 미래도 모르고 아이스틸 결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녀석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아이스틸 결정이 녹아내렸다.

“어?”

저도 모르게 의문을 뱉으며 지금 무슨 상황인지 살폈다. 상자를 자세히 관찰하니, 녀석은 달수정 렌즈 2개를 겹쳐서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스틸이 녹은 자리에서 앨런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부서진 암석처럼 보였는데, 왠지 동굴 20층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콘크리트와 매우 유사했다.

< 갱도(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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