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 아래(1) >
아이스틸에 박혀있는 덩어리는 콘크리트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 재료지만, 일단 지하, 그것도 아이스틸 내부에 있는 모습은 수상했다.
사실 콘크리트보다는 외부에 새겨진 무늬가 동굴 20층의 건축물을 떠올리게 했다.
‘똑같진 않아도 유사해.’
아직까진 앨런의 추측일뿐이고 확정되려면 증거가 더 필요했다. 사막과 초원에서 비가 내려도, 둘은 완전히 다른 지역인 것처럼.
앨런이 관찰에 집중하고 있으니, 테일러가 나서서 적절하게 끊어냈다.
“앨런!”
“네, 듣고 있어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
테일러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더니 재차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탈출이고,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말이다.
“길이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짜증 나더라도 기어가야지. 시바의 신체 구조가 이런 일에 적합해서 선두에 서기로 했다.”
“후···.”
시바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좁은 통로로 몸을 들이밀었다. 잘 가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테일러가 몸을 숙였다.
“그럼 다음은 내가 간다.”
테일러가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앨런이 말했다.
“너무 급하세요. 좁은 통로를 2시간 기어가도 출구가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아까는?”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떠올려보세요.”
테일러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앨런은 2시간을 기어야 한다고 했지, 그 끝에 탈출구가 있다는 말은 안 했다.
“아, 그랬지. 길이 있으면 좋은데 막혔다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군.”
“파괴자의 영역과 가까워지는 방향이기도 해서 꺼림칙 하기도 하고요. 대신,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뭔데?”
앨런이 상자를 가리켰다. 둥둥 떠 있던 녀석은 달수정을 품에 꼭 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야단치려는 거 아냐. 이 아이 덕분에 아이스틸 결정을 변화시킬 방법을 찾았어요. 불확실한 통로에 매달리지 말고 아이스틸을 통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죠.”
“공동에 또 가자고? 우리가 한 번 들쑤셔 놔서 경계가 삼엄해졌을 텐데.”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죠. 거미를 운용해서 엠엠코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면, 지하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하긴, 놈들도 짱박혀 있기보다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도를 그렸겠지. 들어보니 그게 확실하겠구나.”
어느 정도 계획의 윤곽이 잡히자, 테일러가 좁은 통로에 얼굴을 들이밀고 외쳤다.
“시바, 그냥 돌아와. 앨런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대.”
소리가 이리저리 반사되며, 꽤 멀리까지 포복 전진한 시바의 귀에도 들렸다. 그가 내뱉은 말도 비슷한 형태로 돌아왔다.
“아······.”
“너, 방금 욕했지?”
“아닙니다! 저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어머님께 맹세코?”
“···.”
역행을 시작했다. 이미 걸었던 길이기도 하고, 잔가지 같은 통로도 없어서 이동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그러다 보니 이동할 때 무너트린 지점을 자주 마주쳤다.
상자의 장난이 없었다면 바위를 하나하나 힘들게 치워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굴의 한쪽 벽은 바위가, 반대쪽에는 아이스틸 결정이 있었다. 반반 나뉜 형국이라 굳이 길을 막은 암석을 제거할 필요 없이 아이스틸을 뚫고 반대로 넘어가면 됐다.
앨런은 그렇게 막힌 지점을 몇 번 지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아이스틸이 녹은 물은 푸른색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피 같은데? 맞네.”
“전투원들이 입었던 방어복 조각도 흩어져있네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하기 쉬웠다. 암석 쪽에 비늘지렁이가 뚫어놓은 구멍이 있었다.
“무너트린 통로를 뚫으려다가 지렁이를 자극했나 봐요. 좁은 곳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먹혔네요.”
“네 말대로 돌아오길 잘했다.”
뜬금없는 테일러의 말에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바와 케이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식이 끊겼는데 지원병력을 안 보냈다는 건, 공동 쪽의 인원도 여유가 없다는 뜻이겠죠.”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야.”
공동에 가까워지자 앨런은 멈춰서서 거미들을 꺼냈다. 달수정 렌즈를 하나씩 들려줘서 아이스틸에 작은 구멍을 뚫고, 조심스레 전진했다.
거미들이 바로 앞에서 움직여도 모를 만큼 결정은 불투명했다. 앨런은 그 점을 이용해서 공동 내부를 정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
앨런은 거미의 카메라로 공동을 살피자마자 미간을 살짝 좁혔다. 돌파할 때만 해도 사람들로 바글거렸는데, 지금은 완전 반대의 상황이었다.
“엠엠코 직원들이 전부 사라졌어요.”
“뭐? 자세히 설명해봐라.”
“직접 보는 게 빠르겠죠.”
혹시 모르니 아이스틸 결정에 통로를 만들며 공동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작은 구멍을 뚫어서 내부를 관찰했다.
거미로 정찰했을 때와 똑같았다. 사람은 아예 모습을 감췄고, 그들이 놓고 간 장비만 사방에 흩어져있었다.
앨런은 큰 구멍을 만들어서 과감하게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내부는 조용했다.
“혹시 모르니 케이든 씨는 안에서 기다리세요. 시바 씨가 함께 계시고요.”
“난장판인데 조용해. 도대체 뭐지?”
테일러의 말대로 공동 내부의 채광 및 탐지 설비는 모두 망가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밀대로 뭉개버린 모양새 같기도 했다.
“식량이나 식수는 멀쩡해요. 황급히 떠났나 봐요.”
“그러게. 거대한 무언가가 난동을 부렸···. 갱도에서 포식한 녀석이 돌아왔나?”
“무작정 철수하진 않은 것 같아요. 저기 보세요.”
앨런은 결정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가리켰다. 채광기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이놈들도 결정을 녹일 방법을 찾았구나.”
“전 다른 쪽을 살펴볼게요.”
테일러가 구멍 근처를 조사하는 사이, 앨런은 마도구나 통신기를 찾았다. 마력이 세밀하게 흐르는 도구가 있으면, 찾는 물건일 확률이 높았다.
앨런은 전원이 켜져 있는 개인 정보 단말기를 금방 찾아냈다. 어두운 곳에서 반짝이고 있으니 어렵진 않았다. 연구원의 단말기인지, 화면에는 관찰 형식의 일지가 적혀있었다.
[공동은 푸른 귀부인의 영역이자, 보금자리며, 새끼를 위한 둥지이기도 하다. 귀부인이 그렇게 커진 이유는 결정이 뿜어내는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 그녀가 돌아온다. 어째서지? 계산은 완벽했을 텐데.]
“귀부인?”
맥락을 살피니 귀부인이라는 존재는 갱도에서 봤던 초거대 비늘지렁이가 분명했다.
“아저씨.”
“왜? 일단 이것 좀 봐라. 놈들이 이것저것 흘리며 결정 안으로 들어갔어.”
“도망친 이유가 있었어요. 귀부인이라는···.”
뚝!
위에서 액체가 떨어지더니 바이저 표면을 타고 흘렀다.
“물?”
물이라기엔 점도가 높았다.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니 끈적한 실이 길게 늘어졌다.
앨런은 액체가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천장을 보자마자 바로 소리쳤다.
“결정 안으로 뛰세요!”
갱도에서 봤던, 귀부인이라 명명된 개체가 천장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고든 상태에서 아래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거대하다는 표현은 저 개체를 위해 존재했다.
앨런은 소름이 돋았다. 뛰는 중에도 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저 덩치로 어떻게 기척 하나 없을 수 있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쿠르릉!
지하에 난데없이 벼락이 치고, 공동 전체에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시온의 움직임을 복사한 파워슈트는 난리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며 내달렸다.
앨런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결된 거미가 보낸 영상이 바이저 한쪽을 차지했다. 아래로 떨어진 귀부인이 입을 쩍 벌리고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막아야지? 그냥 뛰자.’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1초조차 벌기 힘들었다. 귀부인을 0.1초라도 지체시키면 대단한 업적이리라.
대신 룬캔버스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강화했다. [가속]과 [탄성]을 기초로 삼아서 신속 마법 비슷한 효과를 얻었다.
쾅!
앨런이 결정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녀석의 뜨거운 입김이 안쪽을 휘저었다.
가가가각!
이빨로 아이스틸을 갈기도 했다. 채광기로도 꿈쩍하지 않던 결정이 가루가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앨런은 더 뒤로 물러났다. 암석처럼 완전히 뚫고 다니지는 못하는지, 표면을 잔뜩 긁어내다가 공동 중앙에 똬리를 틀었다.
“후···.”
“형제님. 배부르면 안 움직인다고 했잖습니까.”
“지식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엠엠코의 비늘지렁이 사냥이 자극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결정이 녹으면서 흘려낸 마력에 홀렸을 수도 있고요.”
테일러가 귀부인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아이스틸 표면에 알이 붙어있었지?”
“네.”
“새끼였나?”
“모성애는 없다고 알려졌어요.”
“덩치가 커져서 지성을 깨우쳤을 수도 있지. 몬스터가 아니라 영물이나 마물이라고 생각해라.”
귀부인은 공동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곳은 그녀의 집이고, 침입자는 앨런 일행이긴 했다.
“다시 돌아갈까요?”
좁은 길이 존재하는 통로로 가려고 하니, 엎드려 있던 귀부인이 머리를 슬그머니 움직였다. 케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벌벌 떨었다.
“이쪽을 보고 있어요!”
눈이 진화의 과정에서 사라졌음에도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귀부인의 머리는 정확히 앨런 일행을 따라왔다.
“귀부인이 너무 집요하네요.”
“저걸 귀부인이라고 부른 거냐?”
“연구원의 단말기에 그렇게 적혀있었어요.”
거대하고 길쭉한 몸통을 뇌리에서 지우면, 짙은 푸른색 비늘만 남긴 했다. 전신을 빼곡하게 수놓은 비늘은 파란 드레스를 연상케 했다.
“상식을 초월한 개체에는 그런 이름이 붙기도 하지. 귀부인이라는 이름에는 동의하기 싫지만. 차라리 마녀 할멈이 낫겠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귀부인이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단순한 동작에도 공동이 덜덜 떨며, 눈물 대신 바위를 흘렸다.
“여길 어떻게 벗어나냐?”
“엠엠코 조직원이 지나갔으리라 짐작되는 통로가 있긴 해요.”
“그건 나도 봤지. 놈들도 저걸 보자마자 좆빠지게 달아났을걸.”
앨런은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아이스틸 결정을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소득이 하나도 없었다. 밖의 아이스틸과 달리 결정은 색이 너무 짙고 불투명하기도 했다.
“후욱···.”
일반인인 케이든은 힘겨워했다. 정신적 압박과 육체적 피로가 동시에 덮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정 내부는 마력이 너무 짙어서, 일반인들에겐 독이었다. 기압이 높아지면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것과 유사한 원리였다.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야겠네요.”
파괴자의 영역에 가까워지겠지만, 귀부인의 감지 범위를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머리는 앨런의 위치를 따라오고 있었다.
“왜 자꾸 너만 볼까?”
“글쎄요.”
“체질 때문에 영약으로 보이나?”
“오, 그게 정답 같아요.”
사람은 내단이나 특별한 신체 기관을 섭취하기 위해 몬스터나 영물의 배를 가른다. 그 반대도 당연히 성립하지 않겠는가.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신기하잖아요. 본능인지, 지성에 의한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마음 같아선 가둬두고 관찰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할까요?”
“파괴자 정도면 가능하려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누가 더 괴물일까?”
“뚜렷한 데이터가 없어서 모르겠네요. 심도 7의 전투 장면을 보긴 했는데, 회장님도 수집가도 진심이 아니어서 판단을 내리긴 힘들어요.”
앨런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럴수록 콘크리트 조각도 많아졌다.
가만히 있던 귀부인도 결정에 입을 대고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꾸준히 들렸다.
“지금 따라오는 거 맞지?”
“속도는 우리가 압도적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빨 하나 떨어졌네요. 거미가 주워올 수 있으려나···.”
< 얼음 아래(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