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 아래(2) >
앨런은 단단하고 뾰족한 물체를 만지작거렸다. 귀부인의 부러진 이빨 조각은 단검 길이였지만, 멀쩡했다면 일반적인 검과 비슷했으리라.
테일러는 아이스틸이 녹은 물을 뒤로 밀어내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기어코 챙겼구나.”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웬만한 합금은 이빨보다 약하겠어요.”
가가각!
여전히 얼음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파가 빠져나갈 공간이 없어서 반복적으로 메아리쳤다.
달수정 렌즈를 사용한 채광기는 햇빛이 얼음을 녹이는 현상처럼 아이스틸 원석을 떼어내기에 소리가 안 나거나 미세했다.
그러니 소음은 다른 존재가 원인이고, 주인공인 푸른 귀부인은 여전히 앨런 일행을 뒤쫓아왔다.
“집요하다, 집요해.”
“왜 쫓아올까요. 테일러 형제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도 몰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앨런이 진짜 영약으로 보이나?”
“귀부인의 덩치를 보면 사람은 간식보다 작습니다. 위장에 점 하나 찍는 정도겠죠.”
테일러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지나온 길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귀부인이 입을 벌리고 있기에 붉고 촉촉한 살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것보다는 내부를 꽉 채운 이빨들이 시선을 빼앗았지만.
아까보다 더 커진 느낌이었다. 덩치가 부풀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앨런? 뭔가 이상한데.”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
“가까워졌다고 느끼셨죠? 아저씨의 짐작이 맞아요. 귀부인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제 계산대로라면 1시간 안에 따라잡힐걸요.”
“오, 이런···.”
테일러는 위산에 점점 녹아가는 자신의 몸을 상상했다. 인조 피부 안쪽의 금속 골격도 부식되어 사라지겠지.
“덩치만큼 오래 살아서 아저씨 말대로 영물로 화했나 봐요. 아이스틸을 효과적으로 분쇄하려고 이빨에 두르는 마력의 형태를 계속 바꾸고 있어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듯하네요.”
“늦출 방법은?”
“아까 보셨잖아요. 마법은 가랑비보다 약하고, 폭탄은 마사지 역할도 못 해요.”
“···.”
“다른 수단은 엠엠코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가는 거죠. 중간에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귀부인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면 바로 죽이겠다고 달려들진 않겠지.”
시바는 케이든을 진정시키다가 대화를 듣고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형제님, 우리도 실력 있는 탐험가입니다. 머릿수나 힘의 총량은 저쪽이 앞설지라도 충분히 설득할 힘이 있습니다.”
“스티븐 대령은 대기업 무력부대 중 하나를 맡은 사람이야. 보통 그런 자리에는 적어도 심도 5 이상을 앉혀놔.”
“저쪽의 설득력이 더 높군요. 그런데 대령이라는 사람이 현장에 왔을까요?”
“그 난리가 벌어졌으니 확인하려고 왔겠지. 그게 관리자의 책무니까.”
결국, 앨런의 의견대로 경로를 바꿨다. 이제까지 뚫던 길을 엠엠코가 만든 통로와 연결했다.
아이스틸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지자 이동 속도가 크게 향상되었다.
자연히 귀부인과의 거리가 확 멀어졌지만, 진동이나 소음을 통해 여전히 쫓아온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빠르게 전진하던 앨런은 엠엠코의 전투원들과 마주쳤다. 공동의 모습에서 짐작했던 것처럼 귀부인의 히스테리에 당한 꼴이었다.
패잔병 사이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덩치 크고 머리가 짧은 젊은 남자였는데, 엠엠코의 소속 인원 모두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앨런이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스티븐 대령이죠?”
“대령은 노인이에요.”
앨런은 케이든의 속삭임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줬다.
“모습을 보아하니 생명공학의 힘을 빌렸겠죠. 겉은 사람 같아도 속은 인공 근육과 장기로 가득할걸요. 본체는 다른 곳에 있고, 저건 진짜가 조종하는 인형이겠네요.”
“잘 아는구나. 월영문에서 알려주더냐? 아니면 여우년이? 혹은 브레이커일 수도 있고.”
“셋 중의 하나일까요? 아니면 다른 단체일까요?”
확답 없이 살살 긁는 말에도 스티븐은 차분히 말했다. 젊은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세월의 노련함이 묻어있었다.
“혼란을 주려는 목적이겠지. 하지만 네놈의 움직임은 이미 분석을 마쳤다.”
“재밌네요. 정보망에 접속하는 단말기는 위에 있겠죠?”
“시답잖은 대화는 그만. 내가 너희를 가만히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본체도 아니잖아요. 마주친 순간부터 가늠해봤는데, 심도 4 정도네요. 기껏해야 중간쯤?”
스티븐은 마력을 끌어올려서 앨런을 압박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깃털로 쇠공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믿는 구석은 있구나. 하지만 우리는 인원이 많지.”
그 말대로 스티븐의 주변에는 수십 명이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앨런은 강하게 받아쳤다.
“좁은 곳에서 숫자는 의미 없어요. 차례대로 나서야 하니 4대 4의 반복이겠죠.”
케이든이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리려는 기색을 보이니, 테일러가 주먹으로 등을 툭 쳤다. 통증 때문에 허리를 펴자 상대방의 눈에는 위협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티븐이 앞으로 나서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유형화되기 직전의 마력이 그의 몸을 감싸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내가 앞서면 된다. 부하들은 나를 중심으로 휴식과 참전을 반복할 것이다.”
“부하들은 소중히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앨런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고, 세상도 본인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쉽게 말해서 견해 차이가 명확했다. 받아들이는 누군가는 굉장히 억울하게 느껴도, 행동하는 이에게는 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
앨런은 움직이려는 스티븐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아, 잠깐만요.”
아이스틸 녹은 물이 발밑으로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큰 결정이 녹았다기엔 양이 적었으나, 마력 덕분에 그런 현상이 발생했음을 알기에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소음에도 앨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스티븐의 말에 죽고 사는 전투원들도 저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었다.
“잠깐 작업을 멈춰보세요.”
스티븐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려다가 저 멀리, 정확히 말하면 앨런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작업 중지! 모두 침묵!”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제야 스티븐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던 소음이 명확해졌다.
가가각!
무언가가 얼음을 자꾸 긁어내는 소리가 결정 안에 생긴 동굴을 타고 전달됐다. 심지어 약한 진동이 발을 타고 올라오기도 했다.
“저건 뭐지? 설마?”
“비늘지렁이죠. 그쪽이 푸른 귀부인이라고 이름 붙인.”
“왜? 도대체 왜 쫓아오는 거지?”
“이제야 대화할 자세가 되었네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묻는 말에 대답해라.”
앨런은 렌즈를 겹쳐놓은 채광기를 가리켰다. 여전히 강한 빛을 뿜어내며 아이스틸을 녹이고 있었다.
“저게 왜? 귀부인이 신경 쓸 만한 진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아이스틸이 녹으면서 발생하는 마력이 문제죠. 귀부인 입장에서는 음식이 담긴 쟁반 덮개를 코앞에서 열은 느낌일걸요.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는 달수정 렌즈만 노릴 거예요.”
스티븐은 앨런을 노려보더니 연구원에게 물었다.
“저 말이 맞나?”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유일한 도주 방법이 오히려 목을 죄는군.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스티븐은 강하게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서도 앨런 일행에게서 눈을 떼진 않았다.
일단 서로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여기에서 전투로 시간이 끌리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앨런의 말대로 렌즈라도 망가지면 이대로 죽은 목숨이었고.
테일러는 앨런이 부리는 거미의 카메라 앞에 손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귀부인이 쫓아오는 이유가 있었구나. 어떻게 알았어?]
[그냥 해본 말인데요.]
거미가 앞다리를 움직여서 테일러의 팔뚝에 글자를 적었다.
앨런이 외부확장장치를 파워슈트에 부착하면서 무선 통신이 가능해졌지만, 혹시라도 신호를 탈취할 수 있어서 고전적인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낌새를 눈치챈 스티븐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이지?”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본인이 직접 왔으면 그냥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인형을 조종하는 중이라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부하, 귀부인 그리고 적들의 실력.
앨런은 거미를 계속 조종했다.
[마력에 홀렸다기엔 이상한 점이 많아요. 결정을 긁어낼 능력이 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섭취하면 됐거든요.]
[그럼 도대체 왜?]
[엠엠코가 어떤 선을 넘었을 수도 있죠. 귀부인이 마침 움직이려고 했는데, 우리가 재수 없게 눈에 띄었고요.]
앨런은 조종을 마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결정 안에 잠든 콘크리트 덩어리의 양이 확실히 많아졌다. 크기도 점점 커져서 더 깊이 들어가면.
‘멀쩡한 건물이 나올 수도 있겠어.’
그때쯤이면 파괴자도 걱정해야겠지만, 우선은 귀부인에게서 도망치는 일이 먼저였다.
‘파괴자가 우리를 인식한다면 귀부인의 덕을 봐야겠지.’
이이제이는 언제나 유용한 방법이었고, 자신이 파괴자라도 조그마한 사람들보다는 귀부인을 먼저 견제할 것이다.
일단 추측투성이긴 해도, 미래를 상상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준비하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전략조차 무용지물로 만드는 파괴자나 귀부인의 힘이겠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한동안 불편한 동행이 계속됐다. 스티븐은 노련한 전사답게 앨런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작을 부릴 생각은 딱히 없는데.’
저쪽에도 마법공학자와 마법사 자원은 충분했다. 실력은 떨어지더라도 숫자가 많으니 무시하긴 어려웠다.
대신에 거미를 계속 파견해서 귀부인을 관찰했다. 상자는 드론 캐리어처럼 활동하며 거미를 충전하거나 잔고장을 고쳤다.
덕분에 귀부인이 선호하는 진동이나 마력 파장을 추측할 순 있었다.
‘이질적인 마력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엠엠코 인원이 몰려있는 앞쪽에서 환호가 들려왔다.
“대장님···.”
“조용.”
스티븐은 앨런을 한 번 노려봤다. 저곳을 보여주기 싫다는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지만, 귀부인이 쫓아오고 있어서 딱히 방법이 없었다.
“뭔가 있나 보네요.”
“···.”
“그럼 우리도 이만 헤어지죠.”
이를 바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엠엠코의 직원들이 모두 통로에서 빠져나가자, 앨런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지하도시?”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결정 내부에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낮은 건물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테일러는 도시 사이로 사라지는 적들을 보다가 중앙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생김새가 신전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인기척은 아예 없네요.”
앨런은 내부를 죽 훑어봤다. 지하도시는 생각보다 작았다. 마치 일부분을 뚝 잘라내고 이곳만 옮겨온 모양처럼.
적들의 동태를 살피던 시바가 앨런을 불렀다.
“형제님.”
“저도 보여요.”
도시로 먼저 진입한 엠엠코의 전투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마구잡이가 아니라, 앨런 일행이 아래로 내려가면 포위할 수 있는 진형으로.
“좁은 통로에서는 제대로 포위하기 어려우니 전투 의사가 없는 척하면서 자리를 잡고 있군요. 건물이 참호 역할을 해서 마탄을 퍼부어도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 것 같고요.”
하지만 스티븐이 간과한 점이 있으니.
“우리도 달수정 렌즈가 있죠. 자신들이 만든 길만 따라온 줄 아나 봐요.”
앨런은 새로운 길을 뚫었고 대기하던 적들은 구멍만 한없이 쳐다봤다.
“대령님.”
“기다려라. 귀부인이 쫓아오고 있으니 분명 내려올 거다. 그때, 화력을 집중해서 단숨에 끝장낸다.”
아이스틸 결정은 불투명해서 앨런 일행이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없었다. 드론으로 정찰을 시도해도 환상 마법이 가미된 홀로그램 때문에 속아버렸다.
그 사이, 도시로 진입한 앨런 일행은 중심으로 향했다.
“엠엠코는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 같죠?”
“그러니까 길을 만들려고 했겠지. 신전에 공간문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존재해도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르잖아요.”
“잡아먹히는 것보단 낫겠지.”
쿠웅!
테일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결정 벽면에 큰 구멍이 뚫리며 아이스틸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를 내민 귀부인이 도시를 굽어봤다.
< 얼음 아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