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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42화 (142/193)

< 얼음 아래(3) >

신전을 향해 달려가던 테일러가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좀 추운데.”

“형제님, 아이스틸은 결국 얼음이고, 우리는 지금 얼음 속에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뭔가 으스스하다고 해야 하나? 기분 탓인가? 앨런, 지금 몇 도니?”

“영하 10도요.”

“그래? 체감상 20도는 되는 것 같은데···.”

답을 얻지 못한 테일러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앨런은 그 뒤를 따르며 건물 내부를 관찰했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형태는 다르나 지상에서 사용하는 가구나 가전 비슷한 기구가 가득했다.

앨런은 처음 보는 기기가 있으면 일단 거미 하나를 붙여놓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뒤를 슬쩍 돌아봤다.

도시를 둘러싼 결정에서 머리를 내민 귀부인은 가만히 있었다. 머리를 가끔 갸웃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얌전히 있어서 일단 시간은 벌었지만, 아직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엠엠코···.’

환상 덕분에 도시에 무사히 발을 디뎠지만, 이쯤 되면 스티븐 대령도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신전을 향해 돌진하겠지.’

참새 형태의 오토마톤으로 그들을 감시했는데, 적들도 눈치를 채고 바로 격추했다. 그래도 얼마나 앞서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10분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방어 시설만 없다면 몽땅 털고 달아나기 충분하지. 이제 다 왔다.”

굵직한 돌기둥 사이로 뛰어 들어간 테일러가 육중한 문을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신전의 규모를 보면 내부도 복잡하거나 화려하리라 예상했지만, 앨런이 마주한 장소는 텅 빈 방이었다. 물방울처럼 생긴 거대한 푸른 수정만이 중앙에 두둥실 떠 있었다.

“형제님, 뭔가가 있습니다.”

“네, 저도 보이네요.”

“저게 뭔지 아십니까?”

앨런은 시바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 중에서 가장 다양한 지식을 알고 있기에 종종 질문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답을 줄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추워졌어.”

“저, 저도요.”

테일러는 팔짱을 꼈고, 케이든은 턱을 덜덜 떨었다.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르시면 저처럼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케이든 형제님도 이참에 함께하시지요.”

“그럴까요?”

앨런은 영업하는 시바와 혹한 케이든을 지나쳐서 수정 가까이 다가갔다.

얼핏 보면 아이스틸로 착각할만한 생김새였으나, 뿜어내는 마력이나, 반사하는 빛의 각도가 완전히 달랐다.

“앨런.”

“네. 알고 있어요.”

혹시라도 너무 깊이 집중할까 봐 걱정하는 테일러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공간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체불명의 수정이라니.”

“잠깐만 살펴볼게요.”

앨런은 자신의 몸통만 한 수정에 다가가서 손으로 살짝 밀어봤다. 그러나 육중한 암벽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마력을 살짝 불어 넣어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아쉽지만 이만 벗어나요.”

“급한 상황만 아니라면 며칠 머물러도 되는데 어쩌겠냐.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다음은 없다.”

테일러가 열었던 문으로 스티븐이 들어왔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를 중심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부하들은 놔두고 먼저 왔군요. 예상대로라면 6분이나 남았는데.”

“6분? 세상일이 네 마음대로 돌아가는 줄 아나?”

앨런은 스티븐의 시선이 수정에 잠시 머물렀음을 깨달았다. 관심 없는 모습을 가장하면서도, 그의 신경은 수정에 집중되었다.

“수정이 뭔지 아시나요?”

“그 대답은 저승에서 들어라.”

스티븐의 몸이 흐려지더니 일직선으로 돌진해왔다. 반사신경을 강화하고, 신체를 가속하는 리플렉스 액셀은 전사나 군인에게 거의 필수 매직웨어였다.

환골탈태로 신체 자체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 무용지물이 된다지만, 그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스티븐처럼 테일러도 똑같은 매직웨어를 사용했다. 둘의 모습이 불 꺼진 전구처럼 깜빡였고, 격돌의 순간에만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생각보다 쉬운데. 뭘 믿고 혼자 온 거야?”

“···.”

스티븐은 테일러의 이죽거림을 받아넘기며 앨런을 슬쩍 바라봤다.

본체가 아닌 분신이어도 시간만 들인다면 눈앞의 노인을 제압할 능력은 충분했다. 그러나 큰 변수가 있었다.

‘파워슈트만 믿고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파워슈트를 입은 용병이 가장 문제였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마력의 실이 자신의 몸을 묶고, 정체불명의 마법이 신체에 제동을 걸었다.

스티븐은 전법을 바꿨다. 공격을 최대한 피하며 시간만 끌기로. 그의 생각은 적중했고, 다급히 뛰어온 부하들이 그에게 합류했다.

“새끼. 요리조리 도망치기는.”

“대기업이 마련해준 매직웨어가 좋긴 하네요. 방화벽은 튼튼하고, 기본 성능도 월등해요.”

“설마 나한테 장착해주려고 살살 했니?”

“그건··· 아니에요.”

“망설임이 마음에 걸리는데.”

부하들과 합류한 스티븐은 앨런 일행을 가리켰다.

“수정은 신경 쓰지 말고 화력을 퍼부어.”

명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투원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일부는 무반동포를 겨누기도 했다. 무기와 연동된 인공 안구가 조준경 역할을 해줘서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발···.”

콰앙!

스티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폭음이 들렸다. 어차피 공격하려고 했으니 먼저 손을 써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폭발이 바로 옆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신발조각과 그을음만이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오토마톤이다! 거미를 주의해!”

앨런이 부리는 거미는 손바닥만큼 작고 잽쌌다. 이미 신전 주위에 포진했던 녀석들은 적들의 진형에 파고들어서 자폭 공격을 감행했다. 폭발에 반응한 화약이나 마탄이 터지며 연쇄적인 손해를 끼치기도 했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케이든이 희망에 차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앨런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의외성과 기습으로 적들의 허를 찌르긴 했지만, 혼란에 빠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하게 방어를 굳혔다. 사람의 수도 저쪽이 훨씬 많은 만큼 공격 수단도 다양했다.

스티븐을 막아내는 테일러의 몸에 점점 상처가 생겼고, 그를 보조하는 시바의 하얀빛도 점점 희미하게 변했다.

점점 밀리다 보니 적들도 신전에 완전히 진입했다. 신전의 문은 어떤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엄폐물 역할을 해줬지만, 진입을 허용한 이상 그런 이점을 기대할 순 없었다.

‘대기업 전투원들도 해킹이 되려나.’

앨런은 스티븐과 부하들을 바라봤다. 이건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 수 있는 시험이기도 하고, 살아남으려면 해결해야 할 난관이기도 했다.

앨런이 마력을 집중하자 미간이 빛으로 물들었다.

스티븐은 상처가 점점 늘어나는 상대를 바라봤다. 균형이 점점 무너지고 있으니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조만간 끝장을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분명 내 옆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했거늘.’

전투의 열기에 잠식되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며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날카로운 기세가 허벅지를 찔러왔다. 기세의 시발점은 부하의 검이었다.

“뭐냐?”

“몸이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이상 행동을 보이는 부하는 하나가 아니었다. 배신자가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할 리가 없었다. 스티븐이 앨런을 노려보는 순간.

쿠웅!

육중한 울림이 도시 전체를 흔들었다. 지진과 비슷한 파괴력이 신전을 흔들었음에도 돌조각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전투가 잠시 멈출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움직인다.”

엠엠코 측의 누군가가 입을 열자마자, 앨런도 밖에 배치한 정찰 거미를 통해 도시의 전경을 살폈다.

귀부인이 아래로 툭 떨어지더니 머리를 신전 쪽으로 돌렸다. 그녀가 빠져나온 구멍은 신기하게도 막혀있었다.

‘왜?’

물론 그 이유에 대해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고층 빌딩 크기의 덩치가 대로를 따라 꿈틀꿈틀 기어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니, 벌써 코앞까지 도착한 후였다.

귀부인이 입을 쫙 벌렸다.

“도망쳐!”

누군가가 소리쳤으나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이상해!”

“누가 나를 붙잡고 있어!”

앨런 일행도 적들의 말을 통감했다. 신체 곳곳에서 사람의 손에 붙들린 느낌이 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이 주변에 가득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신전 밖으로 끌려나갔다. 앨런은 머리 위로 드리우는 입을 쳐다봤다.

결정을 분쇄하는 속도도 거의 비슷해졌으니, 어차피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긴 했다. 지금의 결과 또한 예상한 미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씹지 않았다. 그냥 꿀꺽 삼키더니 위장으로 추측되는 장소로 이동시킬 뿐이었다.

“너무 배고파서 그냥 삼켰을까요?”

“지금 그게 중요하니? 지렁이 똥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어머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대지와 식물에 힘을 보탠다고 생각하시지요.”

3명의 대화를 들은 케이든이나 엠엠코 직원들은 할 말을 잊었다. 저게 지금 상황에서 나올법한 말이던가.

반쯤 누워있던 앨런은 자신과 엉켜있던 사람의 어깨를 흔들었다. 스티븐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히는 순간에 본체와 연결이 끊겼군요. 아니면 스스로 끊었거나.”

“어차피 죽을 거면 그놈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지만 쏙 빠져나가네.”

귀부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마법을 부리거나 마나소드로 내장을 공격했지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앨런은 문득 위를 쳐다봤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으로 판단하면, 귀부인은 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올라가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

“움직임이 멈췄어요. 지상 같은데요.”

“어째서···. 어어?”

갑자기 사람들의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여태껏 닫혀 있던 위장이 열리고, 이빨 가득한 입을 통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날카로운 이빨에 긁혀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어느새 연결을 회복한 스티븐도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밖은 밤이었다. 밝은 달, 그 아래에 몸을 세운 귀부인은 비현실적인 존재로 보였다.

끄르르르!

귀부인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어딘가를 쳐다봤다. 앨런은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앉아서 등을 보이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까만 머리에 붉은 눈의 남자가 이쪽을 쳐다봤다. 짐승, 그중에서도 곰을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파괴자···.”

엠엠코 직원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솔도스가 전략 마법으로 파괴자를 쓰러트리려고 폭격했던 흔적이기도 했다.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였다. 모두가 굳어있는 도중에도 앨런만 움직였다.

상자를 부르더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금씩 캐낸 아이스틸로 만든 작은 용기였다. 자체적으로 냉기를 품고 있어서 무언가를 보관하기 좋았다.

앨런은 거미를 사용해서 용기를 파괴자에게 전달했고, 그는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신을 차린 테일러가 속삭였다.

“저거 뭐냐?”

“꿀이요.”

“저번에 했던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음식을 나누는 건 우호의 표현이잖아요. 일단 공격은 안 하니까 성공 아닐까요?”

꿀이 담긴 용기를 바라보던 파괴자가 앨런을 주시했다. 그 눈빛에 적의가 담겼는지, 그냥 무심한 건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앨런은 일단 행동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이건 어때요?”

다른 용기도 전달했다. 거미가 그의 발치에 용기를 놓고 앞다리로 뚜껑을 열었다.

“저건 뭔데?”

“꿀에 절인 투구꽃이요.”

바람마저 피하는 고요한 장소라 그런지, 앨런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미친놈···. 그런 단순하고 멍청한 방법으로 설득···. 음?”

스티븐의 말과 다르게 파괴자는 용기를 집어 들고 꿀 냄새를 맡았다. 얼굴 부분이 곰으로 변하더니 긴 혀로 용기 속을 핥기도 했다.

< 얼음 아래(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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