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 아래(4) >
파괴자의 등장에 모두가 얼어붙은 사이, 앨런은 그의 존재를 면밀히 관찰했다.
일단 남성 오크의 평균 신장보다 10cm는 더 커 보였다. 인간의 형태일 때 보여줬던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는 알파와 비슷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니겠지. 그럼 혈연관계거나 최소한 동족이라는 뜻이야.’
원시림은 머나먼 고대의 생물이 활개를 치는 장소이기에 어느 정도 연대 추정이 가능하긴 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혈연보다는 동족에 가까우리라.
파괴자의 얼굴이 곰으로 변하며 혀도 더 커졌기에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꿀을 말끔히 핥아먹고는 아이스틸로 만든 용기까지 입에 집어넣었다.
카드득!
강철만큼, 혹은 내포한 마력에 따라 더 단단해지는 아이스틸이 쉽게 박살 났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흘러나온 파편이 달빛에 잠깐 반짝이고 사라졌다.
테일러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래도 되나?”
“자세히 따지면 아이스틸은 얼음이잖아요.”
“아···, 그랬지.”
앨런은 파괴자를 조용히 관찰했다. 얼굴이 곰으로 변해서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왠지 만족했다는 느낌은 들었다.
파괴자가 가만히 있으니 연구원 하나도 앞으로 나섰다. 앨런의 행동에서 영감이라도 얻었는지, 하얀 가운 속에서 초코바를 꺼내 들었다.
연구원은 과거의 일이 의사소통 실수에서 발생한 참사라 추측했고, 앨런의 행동에서 가능성을 엿봤다.
갑자기 나타나서 전부 때려 부수는 존재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의 전환은 그토록 힘들었다.
“제, 제 것도. 천연 재료로 만든 고급 초코바입니다.”
“···.”
파괴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연구원은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손은 앞으로 내밀었다.
툭!
초코바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음을 만들었다. 너무나 긴장한 연구원이 실수한 것인가? 그게 아니었다.
연구원은 발과 손만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물질은 엠엠코 전투원들에게 쫙 뿌려졌다. 붉고 냄새나는 덩어리를 뒤집어쓰자 몸이 더욱 굳었다.
끼익!
피 냄새에 자극을 받았는지, 장어 크기의 비늘지렁이들이 지표를 뚫고 나타나서 손과 발을 물고 땅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사람들의 호흡이 거의 멈췄다 해도 좋을 정도로 느려졌다. 정적 속에서 앨런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꿀이 정답인가? 아니면 파괴자 나름의 기준이 있나?’
사례가 너무 적어서 판단하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이 시도해줬으면 좋겠지만, 움직이려는 생각조차 없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적 쪽에 적임자가 있었다.
“스티븐 씨?”
“···.”
“스티븐 대령?”
“···.”
스티븐을 쳐다보니 자신을 부르지 말라는 뜻을 담아서 눈을 부라렸다. 물론 앨런은 그런 행동에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른 음식을 직접 전달해봐요.”
“···.”
아예 무시하기로 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이대로면 부하들이 죽을 텐데요. 자신의 본체는 다른 곳에 있으니 상관없다 이건가요? 기왕 분신을 부리니 솔선수범해야죠.”
앨런은 스티븐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발견했다. 생명공학으로 빚어낸 진짜 땀인지, 아니면 냉각수인지 조사해보고 싶긴 하나, 지금은 우선순위가 존재했다.
파괴자를 힐끔 쳐다보려다가 다시 스티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오른 탓이었다.
“땀을 흘리네요. 설마 연결을 끊을 수 없게 되었나요?”
스티븐의 턱 근육이 살짝 도드라졌다.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아까 귀부인의 배 속에 있을 때 달아나지 그랬어요?”
내장 속에서 잠시 차단되었던 연결을 겨우 복구했지만,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앨런은 파괴자를 슬쩍 쳐다봤다. 스티븐의 정신을 붙잡아 둘 존재는 그밖에 없으니까.
파괴자가 앨런을 보더니 혀로 입가를 날름거렸다.
“꿀은 이제 없어요. 살려주시면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미친놈···.”
엠엠코 직원 중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비속어를 내뱉었고, 그게 유언이 되었다.
파괴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사람의 형체를 잃고 다짐육으로 변했다. 엠엠코 직원들은 끔찍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도 작은 비늘지렁이들이 나타나더니 뒤처리를 했다. 대담한 녀석들은 전투원들의 몸 위를 기어 다니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징그럽다고 몸을 비틀던 연구원 하나도 세상에서 사라졌다.
앨런은 파괴자와 겁먹은 양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처음부터 살려줄 생각이 없었구나.’
파괴자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부대를 순회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파괴했다. 그게 마을이든, 도시든 상관하지 않고.
다만, 그가 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는 다른 부분에 흥미를 느껴서일 확률이 높았다. 파괴자의 눈은 아까부터 앨런, 테일러, 시바 사이를 왕복했다.
파괴자는 관찰을 끝내더니, 귀부인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집채만 한 머리가 아래로 쑥 내려왔다.
콰앙!
손으로 후려치자 빌딩이 데굴데굴 굴렀다. 엠엠코 직원 일부는 납작한 육포로 변했다.
귀부인의 내구력도 만만치 않기에 얼른 회복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공격을 받고도 얌전했고, 오히려 머리를 조아렸다. 실수해서 혼나는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파괴자가 휘파람을 불며 엠엠코 인원을 가리켰다. 가만히 있던 귀부인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들을 집어삼켰다.
빠드득!
이곳에 운반해올 때와 달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 퍼졌다.
‘의기소침한 애완동물에게 간식 주는 건가?’
아무리 봐도 둘의 관계는 주인과 애완동물에 가까웠다.
앨런은 홀로 남은 스티븐을 살폈다.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연결이···. 빌어먹을···.”
앞의 말은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이요, 뒤의 말은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파괴자에 대한 욕설이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접근한 곰의 머리가 그를 내려다봤다.
파괴자가 손을 쫙 펼쳐서 스티븐의 머리를 붙잡은 뒤 들어 올렸다. 눈동자가 위로 한없이 뒤집혀서 흰자위만 보였다. 그 상태로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자 파괴자도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앨런의 뒤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쪽을 정리했으니, 이제는 자신들의 차례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파괴자가 몸을 천천히 돌리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엠엠코의 사람들을 대할 때와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테일러가 조용히 물었다.
“특별한 꿀이야? 얼마나 맛있길래 저래?”
“아뇨. 마트에서 파는 꿀인데요.”
“형제님, 시의적절한 질문은 아닌 듯합니다.”
세 사람이 가볍게 떠들었다.
앨런에게 전염되었는지, 아니면 끼리끼리 모였는지,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케이든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정신을 잃었다. 안 그래도 소진된 정신력이 파괴자를 눈앞에 두자 완전히 고갈된 탓이었다.
상자가 환자를 챙기는 사이, 앨런이 슬쩍 몸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가봐도 될까요?”
이번에도 파괴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분명 저곳에 있었는데,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코앞에 나타났다.
그는 검지를 세우더니 전진시켰다.
‘저 손가락에 벌써 몇 명이 죽었더라?’
파괴자의 손가락이 파워슈트 바이저에 닿자 총알도 쉽게 막아내는 소재가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의 목적지는 앨런의 미간. 파괴자는 그곳을 몇 번 꾹꾹 누르더니 앨런의 몸을 뒤로 밀었다.
그는 앨런 너머로 일행들을 쳐다봤다. 테일러를 보더니 심기가 불편한 듯 이를 드러내다가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시바를 볼 때는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남은 차례는 케이든 뿐이었다.
“그 사람은···.”
앨런이 막아보려고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밀려나서 엉덩방아를 찧는 사이, 파괴자가 케이든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혹만 생기고 말았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파괴자가 몸을 돌리자, 석상처럼 가만히 있던 귀부인이 입을 벌렸다. 아까와 달리 이빨이 옆으로 누워있었다. 먹으려는 게 아니라 운반을 하려는 모양새였다.
앨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사라에 온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던가. 원시림에서 봤던 알파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앨런이 소리치자 자리를 떠나던 파괴자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 틈을 타서 알파의 모습을 땅바닥에 그렸다.
곰 가죽을 뒤집어쓴 작은 여자아이를 표현하고, 아이스틸을 가리키며 알파를 동그라미로 감싸기도 했다.
파괴자는 한동안 그림을 바라봤다. 곰의 얼굴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지. 파괴자 정도 되는 사람이 표정 변화로 속내를 표출하진 않겠지. 사람의 얼굴이었어도 똑같았을 거야.’
감상을 끝낸 파괴자가 처음으로 무슨 말을 했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음성은 허공에서 흩어지고, 그의 입 모양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앨런은 서둘러서 거미를 꺼냈지만, 영상도 마찬가지로 아예 찍히지 않았다.
‘잠깐···.’
결정에 들어온 순간부터 녹음했던 영상도 전부 사라졌다. 아니면 처음부터 저장되지 않았거나.
‘의사소통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는 미궁밖에 없었다. 지하인들이 사용하는 문자는 신비에 가려져서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앨런은 편린을 이해하는 자였고, 파괴자의 말에서 몇 개의 단어를 건져냈다.
[아래로, 선택, 조심.]
앨런은 그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미가 연결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파괴자가 앨런의 미간을 또 찔렀다. 아까와 달리 정체불명의 기운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건 마력인가? 분명 비슷한 느낌을 어디에서 받았는데. 아, 마정석.’
앨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거대한 그림자가 달빛을 가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높였다.
“마지막 질문 좀 할게요. 밑에 있던 도시랑 푸른 수정은 무엇···.”
마지막 말은 귀부인이 삼켜버렸다.
앨런 일행은 꿈틀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파괴자의 영역 밖으로 나왔다. 귀부인은 앨런을 어느 계곡에 뱉어내더니 다시 사라졌다.
앨런, 테일러, 시바는 서로를 쳐다봤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때 케이든이 깨어났다.
“여, 여긴?”
“형제님, 일어나셨군요.”
“어떻게 된 일이죠? 비늘지렁이가 만든 갱도에서 채굴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앨런이 나서며 시바의 말을 끊었다.
“갱도가 무너졌어요. 하필 암석이 머리 위로 떨어졌죠.”
“네? 상처는···. 아, 시바 씨가 계셨군요.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암석이 떨어졌는데 혹 하나면 남는 장사죠.”
케이든은 이마에 생긴 혹을 문질렀다. 그는 파괴자를 만난 경험을 모두 잊은 듯했다. 깔끔한 기억 삭제, 아니, 파괴자니 파괴라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앨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스티븐이라는 걱정거리가 남아 있었다.
케이든의 삼촌, 말콤에게 돌아가서 상황을 대충 설명하고 카사라를 떠날 생각이었지만.
“아이고 케이든. 난 네가 죽는 줄 알았단다. 스티븐 대령? 그 사람은 죽었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엠엠코가 소유한 광산에서 대폭발이 발생해서 스티븐 대령을 포함한 엠엠코 직원 전부와 장비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버섯구름이 어찌나 크던지. 마력분열탄이 터진 줄 알았다니까.”
“삼촌, 다른 아저씨들은요?”
“엠엠코가 전부 쫓아내서 무사했지. 그치들은 전부 죽었지만.”
얼싸안은 삼촌과 조카를 사무실에 두고, 앨런은 밖으로 나왔다. 테일러와 시바가 그 뒤를 따랐다.
“뒤처리도 깔끔하네.”
“참으로 무서운···. 형제님이라고 불러도 될까 모르겠군요.”
“본신과 분신의 연결 신호를 역으로 추적해서 폭발을 일으켰군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파ㄱ···. 아니,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앨런, 어디 가니?”
“마트요. 꿀 좀 사 올게요.”
그러나 앨런이 다시 파괴자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땅속에서 머리를 내민 귀부인이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꿀은 챙겨갔다.
< 얼음 아래(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