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팡이(1) >
앨런은 메이즈시티로 복귀하기 위해 공항에 들렀다. 자꾸 뒤를 바라보니 테일러가 점잖게 이름을 불렀다.
“앨런.”
“잊었어요.”
“잊기는 무슨···.”
파괴자의 의지는 명백했다. 살려 줬으니 또 들어오지 마라.
그래도 앨런의 마음속에는 아쉬움이 샘솟았다. 빙상 같은 아이스틸 결정 아래에 잠든 도시와 그 안에 존재하는 푸른 수정의 역할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 기간이 꽤 남아있어서 케이든과 말콤이 새로운 광산을 찾을 때까지 의뢰와 탐색을 반복했지만, 삼라만상이나 도서관에서도 도시와 수정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전해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이 있으면 끼워 맞춰서라도 해석해보겠는데 너무 깨끗해요.”
“신화랑 전설은 왜?”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원전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용을 봤는데 거대한 구렁이였다든가, 늑대가 달을 삼켰는데 사실은 구름을 불러와서 가렸다든가. 이런 식으로 상상력이 조금씩 더해지며 변형이 있긴 하지만요.”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존재하긴 했다. 테일러나 시바도 짐작하는.
“그는 아무래도···.”
“아이스틸 결정 속의 도시를 지키려고 그 자리에 있겠죠. 몇십 년 동안 계속.”
“훨씬 오래되었을 수도 있지. 제이크 얼굴이 어떤지 봤다며.”
“60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젊었죠.”
“그래, 심도 7 에게 나이는 큰 의미 없어. 얼마나 많은 힘을 지녔냐, 어떤 능력이나 신비를 부리냐가 중요하지. 수집가도 100살이 넘었고, 엘프인 재봉사는 말할 것도 없지.”
인간조차 경지에 이르면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원래부터 장수하는 엘프라면 도대체 어디까지 수명이 늘어날까.
앨런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 점점 작아지는 도시를 쳐다보다가 파괴자의 영역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개 혹은 구름이 상시 웅크리고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랐다.
‘파괴자···.’
마셜 회장처럼 생명체의 탈을 뒤집어쓴 자연재해 같았다. 보여준 능력도 하나 같이 기상천외했다. 꿀밤으로 기억을 지우고, 신호를 역추적해서 대규모 폭발을 일으키고.
앨런은 테일러에게 마력 신호로 말을 걸었다. 비행기 좌석은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조심스레 말해야 했다.
[말콤 씨와 케이든 씨는 괜찮겠죠?]
[사건이 벌어지고 한 달 정도 머물렀잖아. 아무 일 없었고, 엠엠코는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발 알려달라며 매달렸지.]
마침 앞 좌석의 목 받침 부분에 붙은 화면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알브레 사는 이번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엠엠코의 방만한 운영과 가혹한 노동력 착취 구조가 이번 참사의 원인이라고 지목했습니다. 또한, 아이스틸 광산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발은 무기 개발에 의한 것이라며, 솔도스 연방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실험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엠엠코의 발굴권을 박탈하고, 착실한 기업에게 그 기회가 주어져야···.]
“착실한 기업이 누군데?”
“알브레겠죠.”
“봤지? 쟤들은 밥그릇 지키기 바쁠걸. 벌써 자신들이랑 비슷한 덩치의 승냥이가 달려들잖아.”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엠엠코가 사건의 경위를 알았다면 암살자를 벌써 몇 차례 보냈을 테니까. 예로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죽은 자의 말은 증언으로 채택할 수 없었다.
앨런은 옆자리에서 들리는 코골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바는 꿈속 기도 전문가답게 어떤 상황에서도 빠른 취침이 가능했다.
가운데에 앉은 테일러가 좌석의 방음 버튼을 눌러줬다.
“알파는 뭐 하고 있을까?”
“글쎄요. 내려가면 알게 되겠죠.”
“설마 돌아가자마자 내려갈 생각이냐?”
“정비와 휴식 시간은 있어야죠.”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도 발표되었나 살펴보고, 누님에게 가서 피살이꽃 씨앗도 받고, 지인들에게 인사도 하고 해야지. 설마 하루 만에 끝내려고?”
“···.”
“아니지?”
*
메이즈시티에 진입한 앨런은 삼라만상에 접속해서 가장 먼저 알파에 대해 찾아봤다.
‘곰가죽, 소녀, 붉은 눈, 투구꽃, 땅굴, 미궁···.’
온갖 키워드를 조합해도 영화나 웃긴 동영상만 나올 뿐, 알파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있다 해도 꼭꼭 숨겨뒀겠지.’
애초에 원시림은 다가가기 힘든 장소고, 탐험가들은 미궁의 비밀일지도 모르는 정보를 풀어놓을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앨런은 집으로 쓰는 창고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내부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따로 방을 구한 비토가 가끔 방문해서 관리를 해주니 인기척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두 사람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테일러가 미간을 좁혔다.
“비토 이 새끼. 우리 없다고 애인이라도 불렀나? 이 녀석!”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던 테일러가 팔짱을 끼며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시온, 넌 또 왜 왔냐?”
“오면 안 돼? 우린 같은 파티잖아.”
“매칭 시스템 끝난 지가 언젠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 훠이, 훠이.”
시온은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테일러는 어정쩡하고 불편한 자세로 서 있는 비토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우리가 아니면 못 들어오게 막아야지.”
“제가요? 어떻게요?”
“하긴···.”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이 작정하면 평범한 마법공학자인 비토로서는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테일러가 시온을 상대하자, 비토가 앨런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얼굴은 예쁜데 이상하게 볼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하네.]
[직감이 좋아졌군요. 선배는 심도 4 후반쯤 될걸요. 어쩌면 5일 수도 있고요.]
[미친. 괴물이었잖아.]
비토는 보안 통신을 하는 중에도 혹시나 엿들을까 두려운지 자꾸 눈치를 봤다. 앨런은 그 낌새를 바로 알아차렸다.
[보안 성능을 개선해서 쉽게 뚫리지 않을 거예요.]
[나의 쉽다랑 너의 쉽다는 다르긴 하지. 근데 호위하러 간 거 아니었어? 도대체 뭘 했기에 보안을 개선해?]
[그럴 일이 좀 있었죠.]
[말해줄 필요 없어. 모르는 게 약이겠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
벽에 몸을 기댄 비토가 통신을 이어갔다.
[근데 저 누님은···.]
[누님 아니에요. 저랑 동갑일걸요.]
[나보다 세면 누님이지.]
[그럼 제가 형···.]
[그만! 농담이 늘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 사람은 왜 눈을 감고 다녀? 아, 지금은 떴네.]
[수련 때문이래요.]
[특이한 사람 정말 많다니까. 그럼 주인이 돌아왔으니 난 가볼게.]
[몸조심하세요.]
[네가 그런 말 하니 좀 무섭잖아.]
앨런은 떠나가는 비토를 보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상에 더러운 게 많아서 눈을 감고 다닌다고 했지.’
그대로 말하면 비토가 자신감을 잃을까 봐 그냥 침묵을 지켰다.
사실 시온이 말은 저렇게 했지만 뚜렷한 기준이 없었다. 눈을 뜨고 있다가도 어느새 감고 있을 때가 있었다. 친숙한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춘기에 인격 형성이···.’
어릴 때부터 미궁에 다녔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렇다 보니 사춘기 때 걸린 병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리라.
“너,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요.”
“이 음색은 거짓말을 하는 음색인데.”
앨런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아님 말고.”
“무슨 일로 왔어요?”
“오면 안 돼?”
“이것아. 당연히 안 되지. 프랑수아가 아무 집이나 불쑥불쑥 들어가라고 가르치던?”
시온은 테일러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앨런만 응시했다. 앨런은 어린애, 그러니까 알파 같은 순수한 눈망울을 보다가 말했다.
“연락은 하고 오세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도 있으니까요.”
“다음부터는 그럴게.”
“거짓말이야. 분명 이번처럼 불쑥 나타날걸.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사람 하나 못 알아보겠냐. 복귀를 확인하고 방문했을 수도 있어.”
“아저씨도 철수라는 친구분께 그렇게 하셨죠?”
“어···, 음···.”
“맞아. 내가 그걸 보고 배웠어.”
“무슨 소리야? 넌 미궁 아니면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음해와 거짓의 파도가 가라앉고, 시온이 목을 가다듬으며 앨런의 질문에 대해 답했다.
“무슨 일로 왔냐면. 미궁의 꼬마 여자애···.”
“알파요.”
“네가 어디 간 사이에 꼬마를 찾으러 내려가 봤는데 없어졌어.”
“알파는 층을 이동할 수 있고, 원시림은 워낙 넓잖아요. 그러니 발견 못 할 수도 있죠.”
“땅굴도 사라졌는걸.”
“어쩌면 알파는 일정한 주기마다 반복되는 특이현상이겠네요.”
아예 땅이라도 갈아엎을 수 있다면 뭐가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겠지만, 미궁은 그런 식으로 훼손할 수 없었다.
티타노보아에게 먹혀도 다시 나타났던 알파. 앨런은 그 아이가 미궁에 속박당한 영혼인지, 아니면 미궁이 만들어낸 가짜 생명체인지 고민했다.
그 답을 알고자 아래로 향하고 있지만, 심층으로 내려갈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렉터, 아니, 수집가에게 거짓말로 제자 한다고 하고 미궁에 관해 물어볼 걸 그랬나.’
물론 망상에 불과했다. 앨런은 그런 존재를 속였다간 어떤 일이 발생할지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미움 샀다가 죽으면 큰일이지. 아직도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앨런은 생각을 마치고 시온을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둥둥 떠다니는 상자를 쫓고 있었다.
“그거 알려주러 왔어요?”
“아니, 다음 탐험은 언제 하나 물어보려고.”
“혹시 브레이커에서 퇴사했어요?”
“벌써 퇴직금 받을 생각은 없어.”
아무리 시온이 검밖에 모르는 바보라도 눈치는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자신과 따로 내려가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묘지에서 얻은 지팡이를 어디에서 쓰는지 모르잖아. 내가 알려줄 수 있어.”
“33층이요.”
앨런의 즉답에 시온의 눈이 똥그랗게 변했다.
“어떻게··· 알았어?”
“마셜 회장님이 알려주셨죠.”
“난 그런 줄 몰랐어.”
“모르긴. 프랑수아가 얘기 해줬는데 건성으로 흘려들었겠지.”
시온이 테일러를 흘겨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은 날 때부터 지닌 그대로였다.
보통 뇌 확장 장치와 인공 안구가 하나로 묶여서 통신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안 그러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욕구는 다양했고, 눈에 손을 대기 싫어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아니면 수련처럼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원래는 인공 안구가 안테나 역할을 하는데, 선배의 확장 장치에는 성능 좋은 신호 증폭기가 있네.’
앨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테일러는 다시 눈을 뜬 시온에게 물었다.
“프랑수아가 뭐래?”
“···.”
“거래하려면 상대가 가진 패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지. 너처럼 아무렇게나 지르면 큰일 나.”
시온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고, 테일러가 낄낄댔다. 앨런은 그 장면을 구경하며 다음 계획을 세웠다.
‘파괴자가 주입한 기운.’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정석 느낌이 들긴 했으니 그걸 중심으로 조사할 생각이었다.
‘알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알파의 실종과 땅굴의 소멸에 어떤 단서라도 있는지 찾을 것이다.
어느 정도 계획을 정리하고 시무룩한 시온을 쳐다봤다.
“일주일 뒤에 오세요.”
“앨런···.”
“고마워.”
“고맙긴요. 대신 동작 감지 센서 부착해도 될까요?”
아직도 시온의 동작을 전부 밝히지 못했다. 그녀도 계속 발전할 테니 그 끝이 언제 다가올지도 몰랐다.
“얼마든지.”
살짝 웃은 시온은 잠시 후 돌아갔다. 테일러는 창문으로 그녀가 차를 타고 사라진 모습을 본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게 목적이었냐?”
“겸사겸사죠. 그리고 선배도 좋아서 여기 온 건 아니겠죠.”
“제이크가 시켰겠지.”
브레이커의 회장이 아무리 호인이라 소문났어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도 탐험가이니 미지를 밝히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선배를 거부하면 다른 사람을 몰래 붙일걸요.”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우리가 거길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려는 생각일걸. 생각해보니 함께 갈 거면 시온이 제일 낫네.”
“어떤 점에서요?”
“나쁘게 말하면 바보고, 좋게 말하면 순수하잖아. 어쩌면 제이크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것까지 계산하고 시온을 보냈겠지.”
“정답 같네요. 그럼 이만 쉬세요.”
“너도.”
“이따가요.”
앨런은 묘지에서 얻은 지팡이를 꺼냈다. 불빛을 받은 지팡이 표면, 특히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진 부분이 반짝거렸다.
< 지팡이(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