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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45화 (145/193)

< 지팡이(2) >

앨런은 튼튼한 복합섬유 천으로 지팡이를 감쌌다. 툭 튀어나온 부분을 마감하니 평범한 물건처럼 보였다.

“이리와.”

삐―

앨런의 부름에 상자가 무한궤도를 돌돌 굴리며 다가왔다. 데스아이에서 뜯어낸 부유 장치를 장착했지만, 어떤 상황을 마주할지 모르니 추가 이동 수단도 지닌 편이 좋았다.

녀석이 끌고 다니는 플로팅 캐리어에 지팡이를 넣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시온과 합류한 뒤 미궁의 문을 통과했다.

알파를 만났던 29층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니, 마력신호나 전파를 방해하는 덩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앨런은 빌딩처럼 솟아있는 나무 위로 거미를 올려보냈다. 덩굴의 방해를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게 설계해서 생생한 영상을 전송했다.

거미의 눈으로 지형을 살폈다. 사실 숲이 워낙 울창해서 지형보다는 특출나게 거대한 나무를 기준으로 위치를 파악했다.

“저쪽이네요.”

알파의 보금자리인 땅굴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그쪽으로 이동했는데, 시온의 말대로 정말 없어졌다.

미궁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성질이 있어서 누군가 땅굴에 흙을 채워놨다 해도 금방 사라진다. 그러니 미궁의 신비가 개입했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알파의 흔적도 사라져서 추적이 불가능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파괴자가 주입한 기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던 계획이 단번에 어그러졌다.

“내려가죠.”

앨런의 말대로 미련을 버린 일행은 30층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어둡고 빽빽한 숲이 불청객을 반겼다.

숲을 걸으며 사냥을 반복하자, 테일러가 따분한지 하품했다.

“그냥 곰을 찾으면 안 되나? 그 녀석은 문을 졸졸 따라다니잖아.”

30층의 파수꾼인 곰. 곰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파괴자가 연상되지만,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찾죠. 그게 가능하면 나침반에 마석을 먹일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저거 혹시?”

테일러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빛조차 겨우 들어오는 어두운 숲속에서 훨씬 새까만 무언가가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문이다. 이야, 운이 좋네.”

하지만 누군가 벌써 지나갔는지 곰은 없고 문만 덩그러니 있었다.

테일러는 방한 장비를 추가로 착용하며 툭 내뱉었다.

“혹시 여기 있는 곰도 꿀을 주면 그냥 넘어가 주려나?”

“그게 무슨 소리야?”

“곰이 원래 꿀만 보면 환장하잖아. 그래서 그냥 해본 말이지.”

시온의 물음에 테일러가 시치미를 뗐다. 시바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형제님, 탐험은 장난이 아닙니다. 진짜 곰도 아닌데 꿀이라뇨.”

“아니, 농담도 못 해?”

둘이 티격태격하니 시온도 관심을 접었다.

목소리를 높이던 테일러와 시바도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시온은 다른 소속이다 보니 발언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앨런은 둘을 보며 잘 대처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괴자가 꿀을 좋아한다는 정보는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유용하나, 함부로 퍼트리긴 곤란했다.

‘우릴 그냥 보내준 이유는 꿀 때문만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이 꿀을 가지고 접근을 시도했다가 죽으면 기분만 찝찝하고.’

앨런은 그의 손가락이 미간에 닿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왜 많고 많은 부위 중에 마력을 끌어올리면 빛나는 미간에 손가락을 대었을까.

복잡한 생각을 한쪽에 치우며 문을 통과했다. 발을 디디자마자 바이저에 영하 10도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파삭!

얼음에 가까운 눈이 발바닥에 짓눌리며 특유의 소리를 토해냈다.

설원이라 이름 붙은 계층은 명칭처럼 눈과 얼음이 가득했다. 여기에서는 오토마톤이 다시 등장하고, 동물 사이보그도 나타났다. 당연히 미로나 동굴에서 나오는 오토마톤보다 훨씬 강력했다.

“영하 10도네요.”

“그 정도면 따뜻한 편이야. 눈보라나 눈 폭풍이라도 마주치면 진짜 극한의 대지가 뭔지 알게 될 거다.”

테일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발이 굵어지며 시야가 훨씬 제한되었다.

“어휴. 벌써 따뜻한 곳에서 몸이나 지지고 싶냐.”

“원시림처럼 기지라도 있으면 좋은데 층 특성상 그러긴 힘들겠죠.”

원인은 크레바스였다. 생성 장소가 무작위고, 사라질 때도 자기 마음대로 자취를 감췄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탐험가라면 진동을 느끼고 자리를 피할 수 있지만, 기지처럼 고정된 건축물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돈이나 자원이 많아도 잠깐의 편의를 위해서 부서질 게 뻔한 건물을 짓는 단체나 개인은 없었다.

앨런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눈보라가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고, 마력감지도 힘들어졌다. 숲의 덩굴처럼 눈송이 하나하나에 신비가 담겨 있었다.

[영하 20]

바이저의 온도 표시가 빠르게 바뀌었다. 기온도 굉장히 들쭉날쭉하니, 몸 상태를 최고로 유지하려면 섬세한 준비가 필요했다.

앨런이 [발열]을 동료의 장비에 그리고 있으니, 이쪽을 인지하고 달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사이보그 스라소니 떼였다.

“땀 빼라고 벌써 나타났네.”

개체마다 화염, 전기, 얼음 등의 속성을 휘감고 있었다. 독이나 산성 액체를 흘리는 개체도 존재했다.

“속성별로 준비했네요. 몸통 쪽의 장치가 원천으로 보여요.”

“화염은 신경 쓸 것 없다.”

“왜요?”

“가장 약하거든.”

테일러의 의미 모를 말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앨런은 처음에 미궁에 들어올 때부터 사용하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룬문자가 몸체를 휘감고 있었고, 끝부분에는 파란빛이 뭉쳐있었다.

스라소니의 숫자는 많았고, 그중에는 눈 속에서 잠행하다가 불쑥 튀어 오르는 녀석도 있었다.

앨런의 눈은 미세한 움직임도 감지했기에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

‘속도, 각력을 고려하면 머리가 이쯤에 오겠네.’

빠르게 계산을 끝내고,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끝부분이 허공을 가르다가 뛰어오르던 스라소니의 머리와 마주쳤다.

콰앙!

성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스라소니의 머리가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가죽 아래로 멀쩡한 금속 두개골이 보였지만, 화염이 내부까지 침투한 상태라 그대로 쓰러졌다.

시온까지 있으니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앨런의 폭발 지팡이를 목격한 테일러가 물었다.

“새로운 무기냐?”

“호신용으로 가볍게 만들었어요. 파워슈트가 선배의 동작을 흉내 내도 한계가 있잖아요. 검은 세밀한 조절이 필요하니, 저한테는 둔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들었지?”

시온의 어깨가 치솟았다.

“방금은 칭찬 아니야.”

“검은 섬세. 나는 잘 다뤄. 그러니 칭찬이나 똑같아.”

“넌 스트레스 받을 일 없어서 좋겠다.”

앨런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시바에게 다가갔다.

“권갑을 개조해 드릴까요? 타격의 순간마다 폭발이 발생하면 전투 시간이 크게 단축될 거예요,”

“저도 휩쓸리지 않을까요?”

“방향을 설정하면 되죠. 설사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시바 씨는 튼튼하니 괜찮을 거예요.”

“형제님···.”

시바가 보기 드물게 눈을 좁혔다. 그 와중에 수염 일부가 가늘게 떨리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뭔가 오고 있어.”

시온은 이미 그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쿵 소리가 들리더니 눈보라 사이로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눈보라 때문에 알아채는 게 늦었어.”

“이번 적은 매우 크네요.”

“적? 아냐.”

앨런이 시온의 말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육지 거북을 닮은 아이스 골렘이었는데, 등딱지 대신 얼음으로 만든 3층 건물을 짊어지고 있었다.

“와!”

앨런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탄성을 들은 테일러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앨런, 저건 적이 아니니 긴장 풀어라.”

“아저씨는 미리 알고 있었죠?”

“네가 놀란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서 잠자코 있었지. 입이 근질근질한데 참은 보람이 있어. 그래도 31층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구나.”

테일러가 랜턴의 불빛으로 일정한 패턴을 그리자 거북이가 멈췄다. 허공에 얼음이 얼어붙으며 건물로 향하는 계단이 만들어졌다.

테일러가 발을 디디며 말했다.

“여관이자 식당, 그냥 호텔이라고 생각해. 쉼 없이 달려왔으니 오늘은 여기에서 편히 쉬자.”

“좁네요.”

앨런은 1층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의자와 식탁을 보고 짧은 감상을 말했다. 가구나 건물 재료는 전부 얼음인데, 신기하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이미 앉아있던 탐험가들이 앨런의 말을 듣고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본 테일러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초짜 티 내니까 귀엽게 보이나 보다.”

“파워슈트의 외형은 귀여움과 거리가 먼데요.”

“여기까지 내려올 정도면 그런 건 상관없지.”

동그란 얼음 식탁에 앉으니 엘프 종업원이 다가왔다. 이동식 호텔의 직원은 전부 엘프, 심지어 전원이 마법사로 추측되었다.

식사는 굉장히 빠르게 나왔다. 레토르트식품을 데워서 내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물론 비싸긴 했다. 지상과 비교하면 10~20배의 가격을 받았으니까.

“여기는 미궁, 게다가 31층이니 당연하지. 숙박비도 만만찮아서 곯아떨어지고 싶은 탐험가 아니면 노숙해.”

음식의 온기와 향기를 즐기고 있으니, 먼저 앉아있던 탐험가들은 위로 올라가고, 남은 사람은 앨런 일행과 종업원뿐이었다.

“위에는 당연히 숙소겠네요. 어?”

앨런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위로 올리다가, 계단의 난간에 기대고 있는 백발의 엘프 노인을 발견했다.

“소피아 씨야. 골렘의 주인이자 겨우살이 여관의 주인이지. 보다시피 여기 직원들은 엘프만 있어.”

“어른을 눈앞에 두고 속닥거리긴.”

앨런은 그녀의 주변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느꼈다. 골렘과 건물 구석구석에는 그녀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신기한 구경을 했습니다.”

“값이라도 치를 테냐?”

“그럼 골렘의 제작 원리도 알려주시나요?”

“저 지팡이를 준다면.”

소피아는 플로팅 캐리어에 담긴 지팡이를 가리켰다. 전리품 속에 파묻혀 있는데도 정확하게.

그 행태를 본 시온이 나섰다.

“안 돼. 저건 앨런 거야.”

“보아하니 브레이커의 행사가 아닌 듯하니 넌 빠지거라. 난 주인과 이야기하는 중이니.”

“안타깝지만 거래는 없는 거로 하죠.”

앨런의 의사도 당연히 거절이었다.

“내가 실수를 했어. 나이가 드니 조급함이 앞서서···.”

소피아는 자신의 접근법 때문에 앨런이 가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어떤 대가를 줘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얼음 골렘?

어렵긴 해도 지상에서 설계도를 얻을 수 있었다.

지팡이?

묘지의 비석이 흡수되었으니 이제는 못 얻었다. 게다가 미궁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비싸지만 얻을 수 있고, 가격 책정은 힘들지만 얻을 수 없다. 당연히 비교 불가였다.

소피아는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강력한 마법사 같은데 여기에서 여관을 운영하네요.”

“소피아 씨와 그녀의 제자 및 부하들은 얼음 마법 전문이거든.”

“아, 좋은 수련 장소군요. 마석이나 소재 채취도 쉽고요. 스라소니가 뿜어내던 속성의 원천은 좋은 시료였죠.”

식사와 숙박 대금으로 스라소니에게서 얻은 마석을 전달했다. 하루의 벌이가 몽땅 사라졌지만, 편안한 숙박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테일러는 얼음 침대 위에 깔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며 말했다.

“다음 층을 향해 이동할 거다.”

“생각보다 편하네요.”

“비싼 것만 빼면. 사실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어.”

“흠···.”

앨런은 구석에서 잠, 그러니까 절약 모드에 들어간 상자를 쳐다봤다.

“왜?”

“크게 키우면 들어갈 수 있겠죠. 미궁을 내려가다가 전투가 발생하면 저 아이가 알아서 처리하고, 전 책을 읽거나 지식을 연마하고. 참 좋은 생각이에요.”

삐!

자기 이야기인 줄 알았는지 깨어난 상자가 높은 소리로 반응했다.

“쟤 화낸다.”

“단순한 피드백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키우면 문은 어떻게 통과할 건데. 아이스 골렘은 재료가 얼음이니 다시 만들면 된다지만.”

“하나하나 분리해서 통과하고, 다시 조립하기도 힘드니 차원 배낭이 있어야겠네요.”

“브레이커가 쓰는 1천억짜리? 여러 개 필요할걸.”

“돈이 문제군요.”

“위험한 생각 하지 마라.”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더 불안해.”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을 나섰다. 가능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내부가 어떤지, 어떤 마법이 적용되었는지 살필 생각이었다.

‘32층에 도착하면 내려야지. 33층에서 내리는 건 지팡이를 사용하는 장소가 거기에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골렘의 내부를 살폈다.

‘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구나. 단순한 동작만 처리하게 설계해서 마력 소모와 오류를 줄였어. 이러면 상자에도 영혼석을 여러 개 박아넣어야 하나?’

굳이 사람으로 따지면 가슴, 팔, 허벅지 등 각 부분에 뇌를 삽입하는 행위와 비슷했다.

계단 위에서 카메라 아이만 쏙 내민 상자가 1층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주인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 지팡이(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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