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팡이(3) >
여관을 등에 짊어진 아이스 골렘은 꾸준히 움직였다. 3층 건물을 올려놓은 녀석의 무게는 육중했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설원이 쿵쿵 울렸다.
골렘의 덩치와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미궁의 괴물들이 심심하면 들이닥쳤지만, 골렘은 단단했고 설령 부서지더라도 재료가 얼음이라 수복이 쉬웠다.
덕분에 겨우살이 여관을 발견하고 몸을 의탁한 탐험가들은 혹한의 대지에서도 지상의 집과 같은 안락함을 얻을 수 있었다.
잠에서 깬 앨런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샤워실에서는 물소리가 났고, 시바는 자신의 침대에 앉아서 수염을 조심스럽게 빗었다.
“형제님, 깨셨군요.”
“잠자리는 편안했나요?”
“어머님의 뜻을 거부하는 괴물만 가득한 곳에서 안온함을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테일러 형제님에게 얼핏 들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어쩌다 보니 회계는 테일러의 몫이었다. 시바는 수도승이라 재물에 관심이 적고, 앨런은 돈이 있으면 마법공학 지식이나 재료 등을 무한정 사려고 했으니까.
“좀 더 머물면 내려오며 얻은 이익을 전부 날리겠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마침 테일러가 샤워실에서 나오다가 그 말을 들었다.
“여긴 5성 호텔의 최상급 스위트룸 가격이야. 아니면 남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골렘의 핵에 어떤 별문자가 담겼는지 알 순 없지만, 소피아 씨가 마력회로나 구동부의 설계를 어떻게 하는지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죠.”
골렘 기동 자체가 그녀의 제자와 부하를 위한 수련의 일부였다. 여관업으로 버는 돈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부가가치였고.
“그럼 나중에 버는 돈 일부를 깎아서 시바랑 시온에게 준다.”
“네.”
“형제님, 저는 안 받아도 됩니다.”
“어허.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하고 받아야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 농담이고, 노동의 대가는 받아야지. 게다가 치료사 구하는 일이 쉬운 줄 알아?”
모신교의 사제들은 원리가 아직도 안개 속에 숨어있는 성법을 통해 간단히 치료한다지만, 마법사는 좀 달랐다.
치료마법사는 극한 직업 중 하나였다. 마법은 마법대로 배우고, 인체에 대해서도 해박해야 했다. 말하자면 마법과 의학을 동시에 수련하는 것이다.
인체 구조를 모르면 과용으로 인해 암이 생길 수도 있고, 멀쩡한 두개골에 뿔이 솟을 수도 있었다.
앨런도 테일러의 의견에 동의했다.
“미궁탐험가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의 하나는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죠. 그리고 시바 씨는 수익 대부분을 기부하잖아요.”
“알겠습니다.”
앨런의 말대로 계속 거북이를 타고 이동했다. 안전하고 따뜻하나 사람의 발보다는 느렸다.
진짜 거북이 수준으로 굼뜨다는 말은 아니었다. 탐험가들의 이동속도는 일반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력과 매직웨어로 강화한 신체는 험지도 평지처럼 다니고, 1시간 거리도 30분 이하로 단축했다.
물론 전투를 빠르게 끝내고 부상도 없다고 가정하면. 그러니 상대적인 속도를 말함이지, 외부에서 본다면 꽤 빨랐다.
32층에 도착한 앨런 일행은 바로 내렸다. 1층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으니, 계단 난간에 서 있는 소피아의 시선이 따라왔다.
시온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미행은 나빠.”
“흥. 브레이커의 움직임을 보면 32에서 34층 사이에 있겠지. 열쇠가 없어도 위치만 찾는다면 탐구할 거리는 많다.”
소피아는 콧방귀를 뀌며 시온의 말을 일축했다.
밖으로 나오자 일행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제 막 눈을 밟았을 뿐인데 시선들이 멀어지는 골렘을 쫓았다.
“춥네. 이래서 관성이 무서워. 편안하면 계속 편안해지고 싶잖아.”
테일러는 그런 생각을 날려버리겠다고 눈밭에 몸을 던졌고, 표범도 옆에서 따라 뒹굴었다.
앨런은 시온을 바라봤다.
“소피아 씨는 지팡이가 열쇠인 걸 아시네요.”
“그 할머니는 100살 넘었어.”
“그럼 태어났을 때 미궁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맞겠네요. 그 시간을 미궁에서 보냈으니 들은 이야기도 많겠군요.”
어쩌면 여관을 운영하는 목적 일부일 수도 있었다. 음식이나 술을 먹으며 마음이 풀어지고, 그러면 감춰둔 흥밋거리가 저절로 나올 테니까.
“식당 계단에 자주 나타나는 이유가 있었네요.”
“관음증 할머니야.”
“프랑수아 씨가 그랬나요?”
“아니.”
시온이 눈을 털고 있는 테일러를 가리켰다. 앨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온이 알고 있는 비속어나 나쁜 말의 원천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왜 나를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노인네가 눈밭에서 뒹군다고 주책이라 생각한 건 아니지?”
“그거랑 전혀 상관없어요.”
앨런 일행은 아이스 골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32층을 빙 돌아서 33층으로 향했다. 골렘은 워낙 눈에 띄는 존재였기에 피해 다니는 일은 쉬웠다.
33층에 발을 디디자 이번에도 강한 눈보라가 탐험가를 반겼다.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부는지, 눈이 지상과 거의 수평 상태로 내렸다.
테일러가 강한 바람을 극복하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열선 고글 아니었으면 시야 확보도 힘들 뻔했어.”
그의 정면은 눈으로 뒤덮였고, 등 쪽은 깨끗했다. 안구가 있는 부분만 유일하게 눈이 없었다. 고글에 닿은 눈은 바로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역풍이 부니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이 몹시 무거웠다. 마치 깊은 호수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앨런은 눈을 피하겠다고 등에 바짝 붙어있는 시온에게 물었다.
“이래선 지형 파악이 어렵겠는데요. 내리는 눈에도 마력이 담겨 있어서 마력 파장 탐지기가 제힘을 못 쓰네요.”
“괜찮아. 계속 전진해.”
“지금 그 말을 5번째 한 건 아세요?”
“이번에는 진짜야. 지금 우리가 어디를 걷는지 알겠어?”
“비탈은 있는데 높진 않으니 언덕이겠네요.”
앨런이 언덕 위로 완전히 올라가자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시야가 확 트이며 주변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덕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있었다. 사발 수십, 수백 개를 뒤집어 놓으면 이런 형태이리라.
눈보라가 사라지자 거의 매미처럼 붙어있던 시온이 옆에 나란히 서며 주변을 살폈다. 열심히 움직이던 고개가 한 곳에 고정되었다.
“나를 따라와.”
그녀는 이곳에 몇 번 왔을 테니 저 말을 따르는 게 상책이었다. 애초에 회장도 안내해주라고 시온을 붙였을 테니까.
언덕 몇 개를 넘자 시온이 멈췄다. 꼭대기에 조금 못 미친 장소라 밖에서는 관찰하기 어렵고, 이쪽은 조금만 몸을 내밀면 정찰하기 쉬웠다.
“여기에서 야영하면 돼.”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어요.”
“선배가 말하면 들어야지. 후배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
시바는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테일러의 옆으로 붙었다.
“형제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투 같습니다.”
“···.”
“형제님?”
“난 몰라. 프랑수아에게 배웠겠지.”
“이참에 고해성사라도 한 번···.”
“모른다니까. 너도 일이나 도와.”
테일러는 시바을 뿌리치며 야영 준비를 했다. 너무 열성적으로 작업에 매달려서 누군가가 말을 걸 기회도 없었다.
그래도 시바가 다른 질문을 던지니 대답해주긴 했다.
“형제님은 이곳을 몰랐습니까?”
“같은 부서에 있어도 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리고 나는 중간에 교관으로 빠져서 비밀 취급 등급이 떨어지기도 했어. 시온,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
“1일? 2일? 3일?”
“왜 점점 늘어나?”
“일단 기다려야 해.”
그녀의 말대로 24시간을 기다렸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테일러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도 시온은 뻔뻔하게 받아쳤다.
그날 밤, 흔들림을 느낀 앨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동은 저 아래에서 퍼져 나왔다. 대지 전체가 고통에 신음하는 것 같았다.
“크레바스예요. 일어나세요!”
앨런이 ‘크레’까지 내뱉은 순간에 일행들이 벌떡벌떡 몸을 세웠다. 짐을 대충 챙기고 이곳에서 벗어날 준비를 했다.
“어서 피하죠.”
집어 삼켜지면 높은 확률로 죽었다. 10명이 빠지면 1명만 살아나올 수 있고, 그건 마셜 회장이나 수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언가를 숨겨뒀으면 모르겠지만.’
앨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려 하자, 시온이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다가 얼음 때문에 손이 미끄러지자 아예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다려.”
“설마 크레바스를 기다렸나요?”
“맞아.”
시온의 말은 들은 앨런이 그 자리에 멈췄다. 위험을 감지한 심장이 거칠게 뛰었지만, 회장의 발언과 그녀의 말을 믿었다. 어쩌면 맥동 자체는 저 아래에 숨겨진 신비에 대한 두근거림일 수도 있었다.
마침내 얼음의 대지가 입을 쩍 벌렸다. 지표 부분은 랜턴의 빛을 받아서 시리도록 하얗고 투명하게 빛났고, 저 아래는 암흑이 가득했다.
당연히 발판을 잃은 앨런과 일행이 아래로 추락했다. 테일러가 소리쳤다.
“시온! 이대로 떨어지면 되냐?”
“아···.”
시온은 그제야 말하는 것을 잊었다는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하여간 저 바보.”
테일러는 시바의 팔을 낚아채더니 상자의 몸통을 잡았다.
삐~
녀석이 집게발을 마구 허우적거리자 호통을 쳤다.
“앨런이 부유 장치 설치해 줬잖아.”
삐!
그제야 셋의 몸이 천천히 내려갔다. 드래곤 골렘을 통해 바람을 다루게 된 표범은 처음부터 활공했고, 모든 것을 설계한 앨런은 처음부터 깃털처럼 떨어졌다.
떨어지기 전에 빛의 은혜가 닿지 않은 암흑을 확인했건만, 정작 제일 밑바닥은 달랐다. 원천을 모르는 빛이 어딘가에서 뿜어지며 주변을 파랗게 물들였다.
앨런은 일자로 이어진 길을 걸으며 시온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왜 여기 위치를 알려 주셨나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게 미궁의 신비에 관련되었다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다른 탐험가는 무엇을 찾을지, 어떻게 조사할지 궁금해하셔.”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니, 탐험 방식도 제각각이겠죠. 그러다 보면 놓친 부분을 확인할 수도 있겠고요.”
회장은 저 너머에 무언가가 추가로 숨겨져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앨런에게 알렸고.
이건 일종의 거래였다. 위치는 알려줄 테니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달라는.
앨런에게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시온이 아니었다면 크레바스를 피해 다녔을 테고, 그랬다면 영영 못 찾을 수도 있었다.
“여기군요.”
앨런은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큰 문을 발견했다. 문에는 가느다란 홈이 햇살처럼 파여있었고, 홈의 시발점에는 구멍이 있었다.
“저기에 지팡이를 꽂으면 돼.”
“크기가 딱 알맞네요.”
앨런이 천을 풀어내자 시온이 눈을 반짝였다.
“원래 지팡이에 문자는 없었는데···.”
지팡이는 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들어맞았다. 은회색 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녹아내린 지팡이가 문에 새겨진 홈을 따라 이동했다.
오목한 부분을 가득 채우자.
구우웅!
묵직한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딱 봐도 미로네요. 그냥 들어가면 되나요?”
“어···.”
시온이 멈칫거렸다.
“왜 그러세요?”
“우리가 열 때랑 다르게 생겼어. 예전에 왔을 때는 출입구가 5개였는데 지금은 하나야. 그리고 표면도 매끄럽게 변했어.”
분명 묘비의 영향이리라. 앨런은 미로를 관찰하다가 얼음 속에 잠든 사람을 발견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전부 키가 큰 걸 보면 지하인 같네요. 저들도 원래 있었나요?”
“아니.”
< 지팡이(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