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인(1) >
앨런의 눈앞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미로가 펼쳐졌다. 미로를 이루는 얼음벽 속에 지하인이 드문드문 있었다. 잠을 자고 있거나, 혹은 이미 숨이 멎었거나.
“지하인이 맞을까요?”
앨런은 얼음에 거의 이마를 맞대듯이 바짝 붙었고, 옆으로 다가온 시온도 똑같이 행동했다.
“두꺼운 각질이 없어. 샤워타월로 피부를 열심히 문질렀나?”
“지하인의 피부가 타월로 밀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나요?”
메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진 각질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깎아내기 힘들었다. 그러려면 날붙이로 베어내야 하니, 본말전도나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벽 속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다만 체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앨런은 20층의 궁전을 지키는 근위병의 모습을 떠올리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과 비교했다. 외모와 몸에는 공통분모가 있긴 했다.
“어떤 식으로든 연관은 있어 보입니다. 그걸 알아내는 게 우리의 역할이겠죠.”
“일단 깨볼까?”
“가능할까요?”
“나만 믿어.”
시온이 자신만만하게 검을 뽑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력이 뿜어지더니, 검날을 타고 회색빛 검기가 흘러내렸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회색이었다. 둘이 섞였다기보다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듯한 형상이었다.
회색의 불꽃이 불길하게 일렁거리자, 주변을 평화롭게 부유하던 마력도 화들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앨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테일러는 턱을 쓰다듬었다.
“오러에 자신의 색을 입힐 수 있게 되었군요. 훨씬 견고하고, 날카로워졌습니다.”
“그새 강해졌구나. 하여간 천재들은 눈만 떼면 저 앞에 나가 있고. 세상 참 불공평해.”
“···.”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기도 하지. 중요한 건 불공평에 불평하지 말고 이해하는 거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일 테니까. 아, 이건 시바, 너에게 하는 말이다. 앨런은 시온이랑 똑같은 부류니까.”
“형제님, 갑자기 제가 왜 나옵니까?”
그 사이, 시온이 앞으로 나섰다. 아니, 그 전에 검이 먼저 움직였다. 은빛 섬광이 어딘가에서 뿜어지는 빛을 난반사하고, 튕겨지는 빛을 따라 회색 불티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시온의 정면에 있는 얼음벽이 금방 회색으로 뒤덮였다. 불길이 얼음벽을 통째로 잡아먹으려고 몸을 일으킨 것만 같았다.
앨런의 눈은 화려함을 꿰뚫고 그 안의 실체를 확인했다. 시온의 노력에도 벽은 멀쩡했다.
“익!”
이를 앙다무는 소리가 들렸다. 시온이 아까보다 더 크게 더 많이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불꽃도 훨씬 기세를 끌어올렸다.
물론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튼튼하군요.”
시바의 말대로 벽은 멀쩡했다. 얼음 가루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작은 흠집조차 만들 수 없었다.
“아이스틸, 그중에서도 거대한 결정이 떠오르는군요.”
“비슷하긴 한데 달라요. 우선, 달수정으로 부술 수 없고, 이 얼음에는 마력이 없어요. 그게 재밌는 점이죠. 마력도 담기지 않은 얼음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단단할까요?”
그러니 시온도 자신만만하게 나섰으리라. 그녀가 앨런의 말을 듣더니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설마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미궁의 지형은 부술 수 없으니 이곳도 비슷하겠다는 짐작만 했죠. 아마 회장님이 와도 똑같을걸요.”
“음···.”
시온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지려고 하자, 테일러가 어깨를 살짝 밀쳤다.
“앞장서. 몇 번 와봤다며.”
“내가 아는 미로랑 완전히 달라.”
“그래도 가긴 해야지. 어떤 괴물이 기다릴지 모르지만, 설원 수준일 테니까.”
미궁에 나오는 괴물은 순차적으로 강해졌다. 아무리 특출나도 그 층의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미로 1층에 나타나는 오토마톤이 수문장의 강함을 지닐 순 있지만, 근위병은 무리였다.
테일러는 조금 걷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리 복잡해? 이거 통과하라고 만든 건가?”
그의 투덜거림처럼 미로는 굉장히 복잡했다. 길이 앞뒤, 좌우뿐만 아니라 상하로도 나뉘어 있었다. 심지어 8개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앨런은 미로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너무 매끈해서 망치와 정으로 다듬은 듯한 모양새가 아니라 아예 주물처럼 찍어낸 듯했다.
신기한 점은 더 있었다. 얼음은 내부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보일 정도로 투명하면서도 이상하게 반대쪽은 보이지 않았다.
시온은 언제든 뽑을 수 있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다녔다.
“저 안의 사람들 기분 나빠.”
“왜요? 가만히 있을 뿐이잖아요.”
“꼭 감시하는 거 같아. 너도 그렇게 느끼지?”
“음···.”
앨런의 감상은 좀 달랐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불쌍했다. 어떤 연유로 이런 장소에 갇혀있을까. 마침 지나가는 장소에는 어린애가 잠들어 있었다.
물론 지하인의 키를 생각했을 때 어린애란 말이지, 신장을 재보면 170cm가 넘었다.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는 미로 속을 터벅터벅 걷다 보니 익숙한 지형이 눈에 띄었다. 지팡이를 끼워 넣었던 문이 있는 입구였다.
테일러가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돌고 돌아서 다시 여기야?”
“허···.”
시바도 진이 빠진듯한 목소리를 냈지만, 고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미로에 들어가고, 다시 입구로 나오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다시 밤이 되었다.
이제는 검에서 손을 뗀 시온은 어깨에서도 힘을 뺐다.
“앨런, 몇 시야?”
“지상 시간으로 저녁 8시요.”
다시 입구 근처로 돌아온 김에 야영하기로 했다. 각자 챙기고 다니는 가방에서 천과 잘 휘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원형 물체를 꺼냈다.
바닥에 휙 던지자 금속이 모양을 잡고, 천이 펴지며 텐트로 변했다. 천은 고무도마뱀의 가죽을 재료로 썼기에 극한까지 압축했다가 넓게 펼 수 있었다.
앨런은 시바의 텐트에 [발열]을 새기고 밑에 마석을 달아주다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만한 텐트를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고무도마뱀이 죽었을지···.”
“아, 이거 배양 가죽이에요. 세포만 빌려와서 인위적으로 키운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 기업이 생명윤리도 신경 쓰는군요. 어떤 기업인지 모르지만 복 받을···.”
“아뇨. 기르는 것보다 배양하는 쪽이 비용 절감 효과가 더 좋아서 노선을 변경한 것뿐이죠. 예전에는 밀렵꾼과 연계한다고 탈이 많았던 기업이에요.”
앨런은 시바의 희망찬 목소리를 덤덤한 어조로 박살 냈다.
시바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첫 불침번이었다. 혼자긴 해도, 자극에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는 상자, 무뚝뚝해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표범이 있으니 심심하진 않을 터였다.
앨런이 자리에 눕고 시간이 좀 흐르자, 옆 텐트에서 테일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런, 자니?”
“···.”
“좋아. 오늘은 제대로 자는···. 그럴 리 없지. 머릿속에 외워둔 지식 복기하지 말고 얼른 자라.”
“···어떻게 아셨어요?”
“호흡이 달라. 육체수련자라면 사소한 부분마저 따라 해서 속일 수 있지만, 넌 마법사에 가까워서 힘들어. 잠 안 자면 몸이 피곤해. 어서 자.”
“네···.”
오늘의 복습을 끝내지도 못했지만, 테일러가 저렇게 눈을 뜨고 감시하고 있으니 얌전히 잘 수밖에.
다음날도 똑같이 전진했다. 다만 전날과 다른 게 있다면.
삐—
상자가 집게발로 무언가를 바닥에 놓고 있었다. 미니어처 접시 안테나였다.
상자 안의 소형 마력용광로는 금속을 녹여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아직은 덩치의 제약 때문에 섬세함과 거리가 멀지만, 미궁에서는 충분히 쓸만했다.
안테나의 정체는 소형 마력 파장 탐지기였다. 박쥐의 초음파처럼 사방으로 마력파를 발사했고, 앨런은 반사되고 돌아오는 파장을 기록해서 지도를 만들 생각이었다.
“어제부터 이러지 그랬니?”
“언제든 준비가 필요하죠. 반사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다시 회수하려고 일부러 튼튼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마석 하나, 금속 조각 하나도 아쉬웠다. 아니면 어릴 때부터 쓰레기장을 뒤져온 알뜰함이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일행은 어김없이 입구로 되돌아왔다. 진이 빠져도 이상하진 않지만, 누구도 불평을 늘어놓진 않았다. 미지를 탐험하려면 언제나 인내가 필요했고, 여기까지 내려온 이들에겐 매우 익숙했다.
시온은 아니었는지, 앨런의 팔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분명 파워슈트를 입고 있는데도, 가느다란 팔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미로 지형 파악은 끝났어?”
“하긴 했는데···.”
모두가 앨런의 말에 집중했다. 시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입구는 존재하는데 출구가 안 보여요.”
“그럼 정육점처럼 그냥 사람을 보관하는 장소야?”
“시온, 정육점이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배웠는지.”
테일러가 고개를 내젓고, 옆에 있는 시바는 그 사람이 바로 형제님이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목적이 보관이었다면 굳이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죠.”
앨런은 파괴자와 만난 뒤로 눈과 머리가 맑아졌음을 느꼈다. 그가 부여한 정체불명의 기운이 앨런이 마력을 제어하는 부분에 도움을 줬다. 적어도 머리만은.
“위층과 아래층으로 나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패턴이 반복돼요.”
“난 모르겠는데···. 네 말을 들으니 익숙한 것 같아.”
“선배가 왔을 때는 보상으로 마정석이 있다고 했죠?”
“응.”
“위치가 어디쯤이죠?”
“구조가 완전히 다르잖아.”
“형태는 신경 쓰지 말고 공간적인 좌표만 따지면요. 아마 미로 전체의 넓이는 똑같을 겁니다.”
앨런의 왼쪽 눈이 빛나더니, 머릿속에 그려진 미로의 지형이 홀로그램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거 통과하라고 만든 미로인가?”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테일러가 혀를 내두르고, 시바의 눈이 핑글핑글 돌아갈 정도의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시온이 한 점을 찍었다.
“대략 여기?”
“이쯤이면···. 냉동인간이 아예 없는 구역 같네요. 이 근방에서 특이한 곳은 거기밖에 없죠.”
시바가 테일러에게 귓속말하려 했지만, 신장 차이 때문에 허리에 대고 말했다.
“형제님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십니까? 지하인이 없는 장소가 있었나요?”
“나도 몰라. 미로의 지도를 아예 머리에 때려 박았나 보네. 저게 가능한가? 뇌 확장 장치도 없이?”
“서번트증후군이 있잖습니까.”
“그 사람들은 아픈 대신 특출난 능력을 지녔잖아. 음, 앨런도 어찌 보면 미쳐있긴 하지. 노력은 즐거움을, 즐거움은 광기를 못 이기는 법이지.”
다시 앞장선 앨런은 지도 없이도 척척 움직였다. 문어발처럼 복잡한 갈림길이 나와도 망설임이 없이 나아가서 시온이 가리킨 지점에 도달했다.
앨런은 상자 안에서 마정석을 꺼냈다. 인공 안구가 폭주하면 달래려고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상자 안에 없는 게 없구나. 그런데 그건 왜?”
“미로가 완전히 바뀌었다면서요. 그러니 저도 반대로 행동하는 거죠. 원래는 마정석을 얻었으니, 이번에는 되돌려 놓는 겁니다.”
앨런이 마정석을 바닥에 놓자마자, 사방의 벽이 환한 빛을 뿜어냈다. 작은 진동과 함께 굵은 원통이 빙글빙글 돌며 위로 솟구쳤다. 내부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당연히 내려갔다. 아래에는 단출하고 작은 방이 있었다. 책상과 의자만 덜렁 있었는데, 의자에는 커다란 해골이 앉아있었다.
앨런은 바로 접근해서 골반 쪽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테일러가 통신을 걸어왔다.
[뭐하니?]
[하얀산맥의 엉덩뼈에는 꼬리뼈가 없었잖아요.]
[이건 있구나.]
[혹시 같은 종족인가 해서요. 물론 이쪽이 훨씬 크지만요. 산맥에서 봤던, 타다 남은 뼈는 굳이 따지면 현생인류와 크기가 비슷했죠.]
앨런은 고개를 돌리다가 벽에 새겨진 문자를 발견했다. 마치 손가락으로 박박 긁어낸 듯한 모양새였다. 굵기도 해골의 손가락뼈와 비슷했고, 마침 손톱도 그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이상한 글이 쓰여 있네. 그림인가?”
시온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앨런은 글귀가 명확히 보였다.
[속았다. 믿는 게 아니었다.]
제일 위의 문장은 부정적인 단어로 가득했다. 문자의 형태도 새긴 이의 마음을 대변하는지, 매우 삐뚤빼뚤했다.
그 아래의 글은 사나웠다.
[너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건 이 글을 읽는 너도 마찬가지다.]
우연의 일치인지, 글을 읽자마자 방이 흔들렸다.
< 봉인(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