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인(2) >
앨런은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위를 쳐다봤다. 조금 전에 읽은 사나운 글귀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지진을 일으켜서 지하에 매몰해버릴 의도인가?’
하지만 진동은 금방 그쳤다. 벽과 천장을 장식한 얼음은 너무 멀쩡해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때, 앨런은 왼쪽으로 고개를 휙 틀었다. 마력이 안 느껴지던 얼음벽에서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건 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오고 있어.”
시온은 그 말과 함께 검을 빠르게 뽑았다. 검집을 탈출한 검은 쾌속하게 움직이며 허공을 갈랐다.
챙!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장소에서 쇠끼리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얼음 가루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반짝거렸다.
앨런은 기척을 냈던 존재를 맨눈으로 살폈다. 시온에게 저지당한 기다란 촉수는 통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너무 맑고 투명해서 충돌이 있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촉수는 대개 혼자가 아니지.’
그 생각대로 벽이 꿈틀거리더니 촉수 몇 가닥을 더 뽑아냈다.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유연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천장을 기는 녀석은 암살자처럼 은밀히,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녀석은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우선 등장한 촉수는 3가닥. 시온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베어냈고, 테일러가 마나소드로 다져놓은 녀석을 시바가 주먹으로 분쇄했다.
앨런은 가만히 지켜봤다.
“앨런! 피해!”
“알고 있어요.”
테일러의 걱정스러운 음성을 들으며 파워슈트에 몸을 맡겼다. 테일러, 시온 그리고 스티븐의 움직임을 모방한 슈트는 간결하고 안전하게 주인의 몸을 옮겼다.
앨런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간 촉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에는 해골이 있었고, 촉수가 막 그것에 접촉한 참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촉수는 빠르게 휘감았다. 매우 굵은 동체임에도 손가락처럼 섬세함을 지녔다. 촉수에 돌돌 말린 해골은 그대로 얼음 내부로 끌려갔다.
‘잡아먹으려는 움직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해골은 보관되었다. 미로의 벽에 잠들어있는 지하인들처럼 똑바로 선 자세로.
보아하니 죽이려는 의도는 아닌 듯하나, 얼음벽에 영원히 갇힌다면 결과는 비슷했다. 만약 의식이 살아있다면 더욱 끔찍했고.
“움직여라. 어서!”
테일러의 다그침에 일행이 계단을 올라갔다. 다행히 방에서 미로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촉수가 덮쳐오지 않았다.
계단을 완전히 빠져나온 앨런은 시온의 발밑에 떨어진 촉수를 발견했다. 깔끔하게 잘린 촉수는 꿈틀거리다가 바닥을 통해 흡수되었다.
“계속 재생하는 거야?”
“그럼 나갈 때까지 잘라내야지. 할 수 있지?”
“응.”
시온은 테일러의 물음에 매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설원에서는 무엇이 등장하든지 자신이 훨씬 강하다는 태도였다.
테일러의 부추김에 의해 시온이 앞장섰고, 덕분에 앨런은 촉수를 관찰할 시간을 벌었다.
파워슈트의 다리에 적용된 [활주]가 마찰력을 극단적으로 줄였고, 그 상태로 표범의 꼬리를 붙잡으니, 마치 개 썰매처럼 보였다.
앨런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촉수도 함께 담았다.
‘미로 전체가 적대적이진 않아.’
그건 다행이었다. 전체가 꿈틀거렸다면 이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을 테니까.
얼음벽 너머, 살의를 지닌 존재가 느껴졌다. 사실 살의인지 애매하긴 했다.
앨런은 그걸 확인하고자 마력을 듬뿍 담은 철판 하나를 던졌다. 사람의 몸을 순환하는 마력회로를 모방해서 새긴 탓인지, 촉수는 철판을 휙 낚아챘다.
아까 해골을 집어삼켰을 때처럼 돌돌 말더니 벽 안에 처박았다.
‘어떻게든지 붙잡으려는 속셈이군.’
앨런은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촉수의 마력이나 움직임을 역추적했다. 철판을 3개쯤 던지자 녀석의 정체가 더 명확해졌다.
“부정형입니다. 본체는 흐물흐물한 반액체 형태고, 무기인 촉수는 보다시피 얼음이고요.”
“그거 완전 말미잘이잖아.”
앨런은 테일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차이가 워낙 크지만요. 놈은 얼음을 통해 움직여요. 미로 자체가 놈의 몸이자, 이동통로죠.”
“그럼 어떻게 피해? 아니, 처리해?”
시온이 촉수 하나를 쳐내면서 물었다. 그녀는 앞을 보며 말했는데, 마치 앨런의 귀에 대고 속삭인 듯했다.
“얼음의 정령일 확률이 높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영체 계열의 괴물이거나요. 본체는 얼음벽 안에 있으니, 완전히 파괴하려면 벽을 뚫어야죠.”
지금 가진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미로에 처음 진입하자마자 시온이 실패하던 장면을 누구나 목격하지 않았던가.
촉수는 앨런이 던지던 철판에 적응했는지, 디코이를 피하며 앨런을 직접 노려왔다. 물론 허리를 살짝 틀면서 피했지만.
콰앙!
바닥을 내리찍은 충격에 몸이 들썩였다. 촉수는 통짜 얼음으로 이루어졌고 당연히 질량도 무시무시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오면 더 까다로웠을 텐데 말이죠.”
앨런이 말을 마치자마자, 테일러의 발밑에서 촉수가 솟구쳤다.
테일러는 반사적으로 샷건을 겨눴다. 마법공학으로 강화한 탄환이 총구를 빠져나와서 적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 폭발력에 단단하던 얼음 촉수에도 금이 생겼다.
테일러는 망설임 없이 앞발을 차올렸다. 축구공을 차는 듯한 동작에 얻어맞은 촉수가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 단단하진 않군요. 제가 미로의 설계자였으면 통째로 매몰시켰을 겁니다.”
이번에도 앨런이 의견을 내자마자 촉수가 움직였다. 천장에서 빠져나온 촉수 여러 가닥이 꽈배기처럼 꼬이더니 통로를 가득 메울 생각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온의 검이 다시 번뜩였다. 불길하게 느낄 정도로 사나운 회색 검기가 처음의 굴욕을 지우겠다는 듯 사납게 날뛰며 촉수 다발을 깎아냈다.
쿵!쿵!
얼음 덩어리가 일행 사이로 떨어졌다. 물론 이런 것에 다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군요. 다른···.”
“앨런! 불길한 소리 그만해줄래?”
자꾸 앨런이 말한 대로 이루어지자, 테일러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것도 잠시, 튀어나오는 촉수를 향해 마나소드를 들이밀었다.
앨런은 그 모습을 보며 상자에게 손짓했다. 앨런은 마법공학자였고, 전사처럼 즉각적인 대응은 힘들었다.
분석하고, 약점을 파악하고. 이 과정을 거치니 시간이 좀 걸렸지만, 대신 훨씬 아프게 때릴 수 있었다.
둥둥 떠서 따라오던 상자가 서랍을 열었다. 녀석의 몸 안에서 야구공보다 2배 정도 지름이 큰 구체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투두둑 떨어진 구체는 데굴데굴 구르며 앨런을 따라왔다. 마치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호위함 같았다.
앨런은 통로 앞을 틀어막을 기세로 뭉쳐있는 촉수를 발견했다. 아무리 시온이라도 저걸 처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녀의 무기는 검이고, 아무리 날카로워도 짧은 선이니까.
“발사해.”
주인의 명령에 구체가 정면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일행을 앞서나간 구체는 쐐기 형태를 이뤘다.
찰칵찰칵!
구체의 표면이 접히며 새까만 렌즈가 나타났다. 검은색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며 붉게 변했다.
그리고 발사.
여러 가닥의 빨간 광선이 통로를 막은 촉수를 밀어, 아니 녹여버렸다. 강력한 열선에 직격당한 얼음이 금방 수증기로 변하고, 통로가 사우나처럼 변했다.
“형제님 저건 설마 수문장의 눈입니까? 우리가 저 정도로 많이 쓰러트렸습니까?”
“아뇨.”
당연히 아니었다. 10층의 수문장은 나름 비싼 몸이어서 노리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수문장의 렌즈가 앨런의 손에 처음 들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구조 파악은 진작에 끝났다.
“위력이 훨씬 강해 보입니다.”
“개량도 해뒀죠.”
구체가 뿜어낸 열선은 수문장이 사용하는 공격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구체에 새긴 룬문자 [액화]는 얼음을 상대로 특효약이었다.
“대신 한 번 쏘면 충전이 필요합니다.”
상자가 집게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널브러진 구체를 주섬주섬 챙겼다.
“충전할 때가 되면 알아서 되돌아오는 기능도 넣어야겠네요. 이리 와.”
앨런이 부르자 상자가 옆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녀석의 몸에서 빠져나온 마력 케이블이 파워슈트의 가슴 부분에 꽂혔다.
“형제님, 그건?”
“충전하는 겁니다. 급하면 마석을 써야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좀 있으니까요.”
어차피 앨런의 마력은 넘쳐났다. 테일러 수련법으로 통제력을 키우면, 마나하트도 기다렸다는 듯 크기를 부풀렸다. 마치 라이벌끼리 경쟁하는 것처럼.
“공중급유하는 것 같습니다.”
앨런은 시바의 말에 상자를 슬쩍 쳐다봤다. 녀석은 부유 장치 덕분에 둥둥 떠다니니 충분히 그런 장면을 연상할 만했다.
대화하는 정신은 일부였다. 나머지는 미로를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어떤 방법이 촉수에 효과적인지 계속 궁리했다.
‘다음에 찍어낼 룬문자는 [둔화]야. 대상은 거미.’
삐—
형상변환 합금으로 만든 마도구, 룬캔버스는 앨런의 의지에 따라 룬문자를 자유자재로 새기고 변형했다. 따라서 급변하는 상황에 유동적인 대처가 가능했다.
앨런은 룬캔버스를 상자 안에도 설치했다. 최종 검수는 앨런이 맡아야 하지만, 초반과 중반 과정을 생략해서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상자가 서랍을 열자, 손바닥 크기의 거미들이 벽과 천장을 타고 다각다각 기어 다녔다. 앨런이 입력한 별문자가 복잡해질수록 움직임이 현란해졌고, 덕분에 촉수의 공격도 수월하게 피했다.
“저 촉수는 건드리지 마세요.”
저 앞, 거미가 유독 많이 달라붙은 촉수는 영 힘을 못 썼다. 3일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처럼 흐물흐물했다.
[둔화]의 효과였다. 앨런은 룬문자로 마법 비슷한 현상을 부렸다. 당연히 정식 마법이 아니라 효율은 떨어지지만, 어차피 마력은 많았다. 너무 과해서 문제였고.
효율이 별로라도 많이 투입하면 결과도 그만큼 나왔다. 중간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요점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였다.
촉수는 본체와 연결되어있고, 촉수에 수작을 부리면 본체에도 영향이 갔다. [둔화]는 전염병처럼 전체에 퍼져나갔다.
어느새 충전을 마친 구체가 다시 튀어나와서 열광선을 뿜어냈다. 몇 번 반복하자 촉수의 굵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건 소모전이었고, 앨런은 그런 양상을 선호했다. 상대의 힘이 빠지면, 사로잡기 쉬웠고, 그러면 파괴했을 때보다 연구할 거리가 많았다.
앨런의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줄어든 부피에 위기를 느꼈는지.
끼리릭!
테일러가 말미잘이라고 불렀던 괴물은 처음으로 괴성을 토해내더니 촉수를 숨기고 얼음벽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치사한 새끼.”
벽은 시온의 공격으로도 깨지지 않으니 말미잘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앨런.”
“우선 퇴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죠? 입구는 이쪽이에요.”
“역시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니까. 내가 잘 가르쳤어.”
“형제님, 거짓말은 심신을 병들게 합니다.”
“아니···, 그냥 농담이잖아.”
지도를 펼쳐볼 시간도 필요 없었다. 이미 미로의 지형은 앨런의 머릿속에 있으니 그대로 입구까지 이동하면 됐다.
문제는.
“입구가 사라졌네요.”
“ㅆ···.”
테일러의 입에서 비속어가 튀어나오는 가운데, 앨런은 방에서 읽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너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아예 탈출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빼앗기는 게 아니긴 했다. 무언가를 얻었든지 일단 미로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미궁에는 탈출구가 분명히 존재했다. 아무리 어두운 장소에도 한 점의 빛은 있었다.
“미궁의 창조자는 생각보다 선량한 사람이 아닐까요? 저라면 탈출구를 아예 없···.”
“앨런. 말이 씨가 된다.”
“일단 빠져나갈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도록 하죠. 가장 수상한 게 뭐였죠?”
“얼음 말미잘이지. 그런데 벽 속을 자유자재로 다니는 녀석을 어떻게 잡을 생각이냐?”
“몰아넣어야죠. 촉수를 통해 잔뜩 약화하고 끌어낼 생각입니다.”
“벽 속으로 도주하면?”
“아까 살펴봤는데 일정 범위에서만 머물더군요. 얼음 미로에 속한 공간이 한정적이라는 뜻이죠.”
물론 이 방법은 앨런 일행이라 가능했다. 하나하나의 무력이 특출나게 강해서 혼자 떨어트려 놔도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얼마 후.
키릭!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덩치가 벽 속에서 끌려 나왔다. 이쪽에서 들어갈 수 없다면, 상대를 잡아당기면 됐다.
바닥에 철퍽 떨어진 말미잘은 다시 얼음 속에 숨으려 했지만, 앨런의 룬문자에 틀어막혀서 탈출할 수 없었다.
“앨런, 이제 뭘 할 거냐?”
“당연히 해부죠.”
앨런의 손가락에서 푸른 빛이 솟아올랐다. 메스처럼 날카로웠다.
< 봉인(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