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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49화 (149/193)

< 봉인(3) >

미로, 그중에서도 통로 여러 개가 교차해서 꽤 넓은 장소에서 테일러가 머리를 긁적였다.

“해부?”

“네.”

“해부라고 하니까 뭔가 어감이···. 그냥 조사라고 해라.”

“원시림 생물은 쉽게 도축하셨잖아요.”

“그래야 마석을 빼내지. 그런데 네가 해부라고 하니까 좀 그래.”

앨런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작업을 진행했다.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온 파란 칼날은 효율을 생각하지 않고 마력을 무식하게 때려 박은 마나소드의 일종이었다. 덕분에 절삭력이 어마어마했다.

말미잘의 본체는 승합차 크기였고, 다발로 붙어있는 촉수는 말도 안 되게 빽빽했으며 얼음임에도 신축성을 지녔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정령과 비슷한 존재였다. 특수한 얼음이 녀석의 몸이자 무기였고, 주위의 얼음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고통은 느끼나?”

앨런이 촉수 하나를 서걱서걱 잘라내자, 말미잘이 몸부림쳤다.

끼익!

“비명 지르잖아.”

“이건 통각에 의한 반응이 아닌 듯합니다. 왠지 짜증으로 느껴지네요.”

그 증거로 말미잘의 촉수 끝이 앨런을 향했다. 하지만 녀석은 공격도, 도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속박], [접착], [쇠약], [둔화]가 가미된 사슬이 촉수와 몸체를 둘둘 묶고 있어서 말미잘의 반항은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너무 쉬운···.”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아까부터 네가 불길한 소리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더라.”

“앨런 형제님이 언령사도 아니고 그러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파티의 수준이 높아서 무탈하게 제압했지, 다른 파티였으면 고생했을 겁니다.”

그건 앨런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점이었다.

탐험가는 손댈 수 없는 얼음 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내키는 대로 공격한다. 미로는 전부 얼음이고, 일방적인 공격만 들어오니 다른 탐험가였다면 죽을 맛이었으리라.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은 계속 움직였고, 거대한 말미잘은 잘게 쪼개져서 노점상의 물건처럼 바닥에 깔렸다.

시온은 검을 손질하느라 이쪽에 관심이 없었고, 테일러는 워낙 많이 본 장면이라 질색하지도 않았다. 시바는 평소에 전리품을 챙길 때면 표정이 굳었는데, 이번에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건 징그럽지 않군요.”

“얼음이니까요.”

앨런의 말대로 말미잘의 신체 부위는 사람이나 동물처럼 딱딱 나뉘어있지 않았다. 정령에 가까운 존재답게 그저 얼음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래서 딱히 구별할 필요도 없죠. 핵으로 추정되는 부분과 가죽만 특이하네요.”

두 부위를 분리하자 나머지는 녹아내렸다. 핵은 차가우면서도 젤리처럼 말랑거렸고, 말미잘의 외피는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얼음 속에 숨어서 촉수만 내미는 생태를 지녔으니 본체의 방어력을 덜어내는 식으로 진화하거나, 창조되었을 겁니다.”

앨런은 핵을 소중히 보관했다. 정밀 검사 장비는 지상에 있어서 자세한 조사는 잠시 미뤄뒀다.

대신 가죽에 집중했다. 승합차 크기여서 그런지, 벗기고 나니 넓이가 상당했다.

테일러는 앨런의 조사를 어깨너머로 구경하다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가죽이 바닥, 그러니까 얼음과 거의 하나가 된 상태로 붙어있었다.

“앨런, 가죽 가라앉는다!”

“네, 저도 보고 있어요.”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앨런이 쭉 당기자, 가죽이 너풀거리며 상승했다.

“말미잘이 얼음 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던 원인이 가죽이었네요.”

앨런은 추가적인 연구에 착수했고, 몇 시간이 흐른 후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가죽을 몸에 두르면 얼음 속에서 움직일 수 있네요. 가죽의 양이 많아지면 속도도 빨라지고요.”

실험 대상은 정찰 거미였다. 잘게 자른 가죽을 몸통에 묶은 녀석은 얼음 속에서 헤엄치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던 시온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했고, 경험 많은 테일러도 입을 떡 벌렸다.

“이거 대박인데. 가죽으로 텐트를 만들면 얼음 속에서 안전하게 잘 수 있겠다.”

“가죽의 능력이 영구적이라면 말이죠.”

미궁에 출몰하는 유적은 미궁의 법칙에서 살짝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안에서 얻는 물건도 마찬가지의 능력을 지녔으나, 일부는 유적을 벗어나면 고물이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미로도 유적의 일종이니 나가봐야 알겠죠.”

“그럼 가죽을 이용해서 문이 사라진 장소를 통해 탈출하면 되나?”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지만, 일단 해봐요.”

생각만으로는 전진할 수 없는 법. 결과를 얻으려면 직접 행동해야 했다. 말로만 떠드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진리였다.

“꽉 막혔네요.”

물론 행동한다고 결과가 무조건 좋으리란 법은 없었다. 앨런이 보낸 거미는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크레바스 길을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그러면 사라진 문을 등장시킬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먼저 떠오르는 장소나 특이점은···.”

“벽 속에 잠든 지하인과 해골이 있던 방이겠지.”

“오.”

“앨런, 신기하다는 눈빛은 치워라. 내 경력이 몇 년인데 이런 거 하나 유추 못 할까?”

마침 바로 앞에 지하인 하나가 보였다. 양손을 교차해서 가슴에 붙였고, 똑바로 선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특별한 점은 못 느끼겠네요. 벽처럼 마력이 아예 없는 건 같고요.”

“형제님, 그럼 미로에 있는 지하인들이 전부 시체란 뜻이군요.”

“네.”

시바가 어머님에게 짧은 기도를 드리고, 테일러가 얼음벽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럼, 여기는 미로가 아니라 묘지란 뜻인가?”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앨런의 머리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눈으로 보거나 마력으로 감지할 때는 몰랐는데, 거미를 얼음 내부에서 직접 운용해보니 무언가가 있긴 했다.

지하인과 연결된 투명하고 가느다란 관이 벽을 따라 어딘가로 이어졌다. 다른 지하인도 마찬가지였다. 관을 쫓아 이동하니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해골이 있는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네요.”

투명한 관 역시 아래로 향했다. 방에서 멈추지 않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앨런은 거미를 내려보냈다. 얼음 속을 유영하던 녀석이 어느 순간에 툭 떨어졌다. 거기에는 숨겨진 방이 있었다.

얼음에서 튀어나온 관이 다발을 이뤄서 어딘가로 이어졌다. 방 중앙, 관이 연결된 원통형 유리관 안에는.

“검은 조각?”

“나도 보여줘.”

시온의 채근에 앨런의 왼쪽 눈에서 빛이 뿜어졌다. 홀로그램이 만들어지며 방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했다.

앨런은 홀로그램을 구경하는 셋에게 물었다.

“혹시 저게 뭔지 아시나요?”

“···.”

셋 다 묵묵부답이었다. 어쨌든 하나는 명확해졌다. 얼음 미로에서 탈출하려면 저 조각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 방법은 직접 알아봐야죠.”

상자의 머리 위에 돌돌 말아놓은 가죽을 펼쳐서 재단하고, 각자의 몸에 빙빙 휘감았다. 투명한 망토가 어깨부터 발끝까지 감쌌다.

가죽을 몸에 두르고 마력을 불어넣자,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분명 얼음 내부인 데도 마치 무거운 물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영 동작이 어설퍼도, 파워슈트의 힘이 워낙 좋아서 몸이 쭉쭉 나아갔다. 잠시 후, 앨런 일행이 아래에 모두 도착했다.

테일러는 내려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윽···.”

시바도 마찬가지였다.

“저 조각. 직접 보니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제가 원래 폭력적인 사람은 아닌데, 지금은 그것에 의지하고 싶습니다. 앨런 형제님은 괜찮으십니까?”

“저는 참을 만합니다.”

파괴자가 주입했던 기운이 처음으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주로 머리 부분에서.

“선배는요?”

“나는 괜찮아.”

시온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해서 그런지 표정이 살짝 바뀐 게 다였다.

굳이 따지자면 테일러와 시바는 얼굴에 바퀴벌레가 툭 떨어진 듯했고, 시온은 망원경으로 구경만 하는 느낌이었다.

앨런은 조각이 둥둥 떠 있는 유리관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럴수록 파괴자의 기운이 줄어들었고, 조각이 뿜어내는 검은색도 옅어졌다.

유리관에 바짝 붙었을 때, 파괴자의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다. 조각은 여전히 검은색을 흘렸으나, 처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하인들과 연결된 관이 유리관을 감싸고 있어. 이건 보호가 아니라 속박이 목적 같은데.’

앨런의 고개가 관 다발을 따라 위로 향했다. 여기에선 보이지 않지만, 저 위에 지하인들이 있었다.

‘관이 마력의 통로라고 가정하면, 지하인들은 조각을 봉인하기 위한 제물로서 벽 안에 잠들었구나.’

앨런은 원시림의 돌산 지하에 있던 숨겨진 묘지를 떠올렸다. 거기에 세워진 수많은 묘비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연관성을 생각하면, 미로에 잠든 지하인들이 묘비의 주인이겠지.’

몸뚱이가 여기에 있으니 이름만이라도 묘비에 적어서 공동묘지를 만든 것이리라.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앨런이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유리관에 닿자마자 조각을 휘감고 있던 검은색 기운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유리 벽을 넘어 앨런의 손안으로 침투했다. 손, 팔뚝, 어깨를 지나 점점 위로 올라왔다.

‘기생? 목적지는 머리인가?’

앨런의 미간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웬만하면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력의 운용을 자제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꽉 찬 마력이 손에 손을 잡고 단단한 벽을 세웠다. 순식간에 검은 기운을 포위했다.

길이 아예 사라지자, 기운은 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기운이 옅어지고 벽도 허물어졌지만, 앨런의 보급물자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검은 기운은 계속 재생하는 마력의 벽 앞에 무릎 꿇었다. 아예 사라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파괴자의 기운이 없었다면 위험했을까?’

머리를 보호할 순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랬으면 미궁 탐험도 못 하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어야만 했겠지. 오랜 시간 책이나 읽으며. 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물론 그렇다고 정체불명의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앨런이 한동안 가만히 있으니, 테일러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니?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

그 말을 들은 테일러가 조각을 가리켰다. 검은색이 하얗게 변했는데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앨런은 조각을 상자 안에 보관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죠.”

그그긍!

앨런이 변명하자마자 위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나갈 수 있겠구나. 다시 올라가자.”

앨런은 벗어뒀던 망토를 다시 걸치며 주변을 살폈다. 조각이 유리관을 빠져나오고, 미로에도 무슨 일이 발생했으니, 여기에도 어떤 변화가 있나 확인하려는 절차였다.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매끈매끈하던 유리관 밑에 글귀 하나가 나타났다.

[봉인이 풀렸다면, 네가 그놈들이 아니라면, 용을 찾아라.]

말이야 쉬웠다. 용이나 드래곤이 남긴 물건 덕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학계는 그들이 절멸했으리라 추측했다.

앨런은 풀리지 않은 의문만 추가로 얻었다. 테일러의 예상대로 금속 문이 다시 나타났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크레바스가 보였다.

이미 한 번 갇혀봤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크레바스 통로로 빠져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얼음만 남았다.

“어?”

그 장면을 목격한 시온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선배, 왜 그래요?”

“유적이 사라졌잖아.”

“보다시피요.”

“여기에서 주기적으로 큰 마정석을 얻었는데 이제 어떻게 해? 회장님께 뭐라고 말하지?”

큰 거래처를 실수로 날려 먹은 사원의 표정이 이러할까. 앨런은 시온의 이런 반응을 처음 봤다.

조각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음이 분명했다. 거기에 생각이 닿은 앨런은 상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각 보여줘.”

삐···

상자가 내는 소리는 굉장히 약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았다.

“?”

앨런이 상자의 서랍을 열었는데, 조각을 넣어둔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각 어디 갔어?”

삐···

그런데 묘하게 서랍이 넓어 보였다. 조각 옆에 넣어둔 물건이나 거미들이 아주 작아졌다. 진짜 작아진 게 아니라 원근감 때문이었다.

< 봉인(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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