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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50화 (150/193)

< 봉인(4) >

앨런은 상자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게 눈을 닮은 카메라 아이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시선 둘 곳을 찾기 힘든 모양새였다.

상자가 등을 보이고 가만히 있자, 뒤에 있던 표범이 엉덩이를 굼실거리더니 조용하게 돌진해서 머리를 툭 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상자도 집게발을 치켜세우며 달려들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앨런은 고요한 표정으로 서랍 안쪽만 쳐다봤다. 물론 헬멧 바이저 때문에 누군가가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볼 순 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니 탈출의 기쁨을 누리던 테일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비밀의 방에서 얻은 조각이 사라졌어요. 대신···.”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이해가 쉽기에 상자의 서랍에 팔을 집어넣었다. 어깨까지 쑥 들어갔는데도 바닥까지 한참 남았다.

지켜보던 테일러도 똑같이 따라 했다. 그의 손가락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오, 잘됐네. 네 마음에 드는 차원배낭을 구하려면 적어도 100억은 질러야 했는데 이렇게 얻게 됐구나. 일단 부피가 얼마나 되나 확인해볼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조각이 품은 기운 기억하시죠? 굉장히 불길했잖아요.”

“그건 사라졌잖아. 꿀 좋아하는 곰이랑 네 마력이 정화했다며.”

“그래도···.”

“생수를 떠올려봐라. 그것도 원래는 구정물이나 지하수야. 깨끗하게 정수해서 마트의 진열대와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는 거지.”

“결과는 좋죠. 하지만 그건 과정을 하나도 모르는 엉뚱한 결과예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야겠어요.”

“그건 네 마음이지. 난 말리지 않으마.”

앨런의 탐구심에 불이 붙으면 아무도 못 말렸다. 궁금하다고 카사라에 가고, 파괴자까지 만나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겠는가. 물론 파괴자와의 만남은 원래의 계획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성격상 한동안 연구에 매달릴 테니 이번에 올라가면 푹 쉴 수 있을 것이다. 테일러는 식물이 많은 어딘가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앨런의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연구하고 싶었지만, 일행이 있으니 그건 못 할 짓이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지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시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선배.”

“···.”

시온은 문이 사라진 얼음벽만 쳐다봤다.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자, 앨런이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온의 어깨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녀의 손이 파워슈트의 장갑을 붙잡았다. 가녀린 손가락에서 뿜어진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아, 너구나.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요?”

“저거···.”

힘없는 목소리로 사라진 유적을 가리켰다.

“회장님에게 뭐라고 말하지?”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거짓말이나 변명한다고 통할 분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

통로를 따라 걷는 도중에도 시온은 자꾸 뒤를 보며 다른 생각에 빠졌다.

한참을 걷다 보니 크레바스에 처음 빠졌던 지점까지 도달했다. 앞장서서 걷던 테일러가 얼음을 두드렸다.

“어떻게 올라가냐? 시온, 정신 차려. 지난번처럼 기다리면 길이 열리려나?”

“응. 크레바스가 열리면 빙벽의 균열을 밟고 뛰어 올라가면 돼. 쉽지?”

“그게 쉽니?”

“힘 좀 써야겠군요.”

대화를 듣던 시바가 위를 쳐다봤다. 그의 두꺼운 목이 거의 90도로 꺾였다.

2일 정도 기다리니 큰 진동과 함께 크레바스가 입을 쩍 벌렸다. 테일러나 시바의 우려대로 녹초가 될 일은 없었다. 앨런이 신발에 새겨준 룬문자 덕에 빙벽을 수직으로 내달릴 수 있었으니까.

설원을 나가는 길에 순록 사이보그가 길을 막았는데, 마탄 폭격에 산산이 조각나서 눈밭에 흩뿌려졌다. 앨런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전투는 만나자마자 끝났다.

“힘 좀 썼구나.”

“이런 건 제 방식이 아닙니다. 연구를 위해 최대한 멀쩡한 채로 사냥해야 하는데···.”

“잘 알지.”

훨씬 중요한 탐구 거리에 마음이 빼앗긴 앨런은 급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집중력이 흩어지겠지만, 앨런의 공격은 오히려 매섭게 변했다.

*

복귀하고 일주일. 앨런은 여전히 상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숨소리마저 너무 낮고 규칙적이라 차마 그 정적을 깰 기분마저 사라졌다.

“에취!”

수염을 다듬던 시바가 콧구멍을 찔려서 재채기를 사납게 했다. 눈만 굴리던 테일러도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 앨런, 잘 돼 가니?”

“아뇨.”

일주일 동안 관찰했지만, 공간 확장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룬문자, 회로마법, 별문자의 지식으로는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주술이나 초능력도 아니었다.

미궁의 신비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탐험가들이 찾는 오파츠 절반 이상은 원리도 모르는 채 사용 중이니, 이번 일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앨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고 넘어가는 결말은 싫었다.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무엇인지는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공간 확장 자체는 상자의 영혼석에 귀속되었어요. 별문자 입력창에 알 수 없는 공간이 생겼거든요.”

우주를 닮은 입력창과 별처럼 반짝이는 별문자. 입력창 구석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듯 새까만 영역이 나타났다. 어찌나 어두운지 주변의 검은색과 확연한 차이가 났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영혼석만 멀쩡하면 몸을 마음대로 바꿔도 되잖아.”

“조각이 처음에 지니고 있던 불길한 기운이 마음에 걸려요.”

“정화했잖아. 너도 그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결론을 내렸고. 탐험가들이 저주받은 오파츠를 사용하는 일은 흔해. 물론 효용이 단점보다 커야겠지만.”

“그건 맞죠. 하지만 지하인이 조각을 봉인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파괴자가 심어둔 기운도 반응했다고 하니···.”

테일러는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머리 쓰는 일은 앨런의 몫이고, 자신은 그저 육체만 움직이면 됐다.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일까.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오로스 교수에게 물어보는 건 어떠냐? 그 양반보다 미궁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찾기도 힘들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신뢰겠지만. 어때?”

“교수님이라면 말을 꺼낼 만하죠. 이참에 교류하고 오겠습니다.”

앨런은 조각과 공간 확장에 너무 매몰되었던 탓인지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바로 테일러의 의견을 수용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해했던 상자를 신속히 조립하고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너도 표범처럼 얌전히 있어.”

엎드려 있던 표범이 주인을 슬쩍 쳐다보고, 상자도 눈을 위아래로 끄덕였다.

앨런은 창고를 나가기 전에 뒤를 슥 돌아봤다. 공간 확장이 영혼석에 담겼기에, 몸체 변형은 마음대로 해도 됐다.

‘아이스 골렘처럼 영혼석을 나누겠다는 계획은 폐지해야겠지.’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상자가 눈을 숨겼다.

시립대에 도착한 앨런은 콘크리트 나무와 진짜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지성 가득한 인재들이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일단 약에 취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시립대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원판 모양의 개인형 이동장치에 탑승, 미궁 학과 건물을 향해 이동했다. 외관을 벽돌로 장식한 모습이 금방 눈에 띄었다.

렉터와 함께 다녔던 기억을 되살려서 교수실로 향하던 앨런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실수했다.’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연락도 안 하고 무작정 들이닥친 것이다. 앨런은 미궁학과 학생도 아니니, 이건 무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거닐고 있으니, 익숙한 모습의 금발 남자가 맞은 편에서 걸어왔다. 함께 탐험했던 칼슨이었다.

그는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눈 밑에 새까맸다. 수산시장에 진열된 물고기 같던 눈동자가 앨런을 보더니 미약하게 반짝거렸다.

“어, 너구나. 무슨 일이야?”

“그러는 칼슨이야말로 피곤해 보이네요. 혹시 어디 아픈가요?”

“걱정은 고마워. 이건 그냥 피곤해서 그래.”

“학과 공부 때문에요?”

“아니. 나도 모르게 오로스 교수님의 일을 돕게 되었거든. 교수님의 수업자료에 틀린 부분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장학금 받고 있으니 괜찮을지도.”

그렇게 말하는 칼슨의 눈은 살짝 풀려있었다. 앨런은 안쓰러워서 영양제를 건넸다.

“이건 뭐야?”

“웨스턴스카이의 사장님이 만든 영양제요.”

“거기에서 파는 약은 비싸다고 들었는데.”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고마워. 음, 맛있다.”

페어리가 채취한 꿀을 기초로 만든 영양제라 그런지 매우 달콤했다. 일하기 싫어하는 페어리도 그때만큼은 앞장서서 꽃에 매달렸다. 그들이 먹는 꿀이 반절, 요화가 손에 얻는 꿀이 반절이었다.

요화는 앨런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삐쩍 말랐냐고 영양 보조제를 챙겨줬다. 덕분에 똑같은 영양제가 집에 3상자나 있었다.

“혹시 교수님 뵈러 왔니?”

“네. 그런데 연락을 안 해서···.”

“너라면 기쁘게 맞이하실걸. 지금이라면 교수실에 계실 테니 어서 가봐. 교수님이 오늘 수업은 끝내서 시간이 넉넉하실 거야.”

칼슨의 말대로 앨런이 방문을 두드리자 오로스 교수가 얼른 들어오라고 말했다.

덩치에 걸맞게 의자도 워낙 커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가려졌다. 덕분에 짙은 음영이 교수의 얼굴에 드리웠고, 영화에 나오는 폭력조직의 대부 같았다.

“앨런 군. 잘 왔어요.”

탐험가에서 군이라고 바꾼 호칭을 계속 유지했다.

“혹시 저번에 건넨 제안을 수락하려고?”

“아뇨.”

“이것 참 아쉽게···.”

오로스 교수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누군가 통화를 시도한다는 의미였다.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괜찮아요. 누가 있다고 뭐라 할 사람도 아니고, 먼저 온 건 앨런 군이니까요.”

오로스가 책상 위에 놓인 구체를 두드리자 젊은 남자의 상반신이 허공에 나타났다. 회색 머리카락, 젊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깊은 눈. 그는 제이크 마셜 회장이었다.

[선객이 있었군.]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왔을지도 알겠다.]

애초에 유적의 위치를 알려준 사람이 회장이었다. 그런데 미궁 전문가인 오로스 교수와 함께 있다? 이유는 뻔했다.

오로스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혹시 설원에 있는 유적 위치를 알려줬나요?”

[그랬지. 보아하니 끝까지 돌파한 것 같군.]

“허, 그렇다면 그걸 얻었겠군요.”

[아마도. 그 정체가 궁금하니 여기까지 왔을 터.]

앨런은 둘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아무래도 둘은 유적에서 얻은 조각이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앨런은 일부러 애매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뭔지 아시나요?”

[검은 조각.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혹시 선배가?”

[비밀서약서를 썼지 않나. 자네도 알다시피 그 아이는 조사나 잠입 임무에 어울리지도 않아.]

그녀는 검밖에 모르는 바보였으니까.

앨런은 자신이 최초가 아니라는 사실에 잠깐 실망했지만, 금방 떨쳐냈다. 미궁 발견은 백 년이 훌쩍 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소원의 조각’이라고도 부르지.]

“거창한 이름이군요.”

[이름 그대로 평소에 바라던 소망을 이뤄주니까.]

“대단한 물건이었군요.”

[그래도 제약은 있다. 눈이 좋아지길 바랐는데 이마에 눈을 달아준다든지, 튼튼한 신체를 원했더니 근육만 강화해서 뼈를 부순 예도 있지.]

“원숭이 손 같은 물건이군요.”

앨런은 상자의 서랍이 왜 갑자기 넓어졌는지 이해했다. 상자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오토마톤이었고, 조각은 녀석의 탄생 목적에 반응했다.

회장의 말에 따르면 무언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한동안은 상자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혹시 사용해봤나? 결과는 어떻지?]

“회장님. 그런 질문은 좀 곤란하군요. 탐험가 사이의 예절을 지키세요.”

[내 실수군.]

가만히 듣고 있던 오로스 교수가 나섰다. 그가 말을 끊자, 집요하게 쳐다보던 회장도 기세를 꺾었다.

앨런은 조각을 떠올렸다. 모든 건 수집가가 남긴 나침반을 통해 연결되었다.

“혹시 수집가는 조각 때문에 메이즈시티의 미궁에 방문했나요?”

[어떻게 알았지? 내 말에서 어떤 단서라도 얻었나?]

“그냥 추측해봤습니다. 소원의 조각이라면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을 움직이게 할 충분한 동기니까요.”

[추측이라도 정답을 맞혔군. 그럼 교수, 내가 다시 연락하지.]

“앨런 군이 돌아가면 제가 하겠습니다.”

회장의 홀로그램이 픽 사라졌다. 앨런이 부작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오로스 교수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불친절한 조각이라도 가끔은 무상의 이득을 주기도 하니까요. 수집가처럼 페널티를 무시할 수 있다면 눈에 불을 켜고 찾기도 하죠.”

오로스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두드렸다.

“설마?”

“저는 혈기 넘치던 젊은 시절에 조각을 얻었어요. 부끄럽지만 그때는 육체가 뿜어내는 힘만을 추구하던 시절이었죠.”

“조각이 힘 대신 뇌를 강화해줬군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때는 절망했지만, 되돌아보면 굉장한 선물이었어요. 덕분에 이렇게 교수도 되었죠.”

“거기까지 도달한 건 교수님의 노력 덕분이죠. 조각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앨런은 조각에 관한 내용과 교수의 과거사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왜 봉인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 봉인(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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