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자(1) >
앨런이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테일러가 손을 들며 환영했다.
“어서 와라. 교수와 이야기는 잘 나눴니? 잠깐, 너무 길게 말하면 못 알아먹으니 요약 부탁한다.”
앨런의 짧은 설명을, 그래도 10분 이상, 들은 테일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원의 조각?”
“네. 그렇게 부르더군요. 들어보셨나요?”
“아니.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내가 말했겠지. 아···, 램프 속에 갇힌 요정 같은 이야기가 떠돌긴 했는데, 어쩌면 조각에 빗댄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요정이 있을 수도 있죠.”
“그나저나 엄청 대단한 물건이었네.”
붉은 얼굴로 코를 골던 시바가 상체를 일으켰다. 자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눈만 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끅! 아, 저도 모르게···.”
라이터를 들이밀면 바로 불이 붙을 것만 같은 기체를 토해내자, 눈이 한층 맑아졌다.
“대단한 물건이라기엔 조각을 감싸고 있던 기운이 너무 흉흉했습니다.”
“제가 들었던 부작용의 원인이 검은 기류일 겁니다.”
“소원을 비틀어서 이루어준다고 했죠?”
“네.”
“그건 마치 악마 같군요. 경전에 적힌 악마는 언제나 세 치 혀로 사람을 속이고,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부수거나 검게 물들입니다.”
테일러는 시바의 앞에 널브러진 성수 병에 슬그머니 손을 댔다가,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쓰레기통 속으로 휙 던졌다.
“비약이 너무 심해. 앨런 말을 들어보니 괜찮은 사람도 있긴 하다며.”
“그런 건 악마의 변덕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 그들의 행동도 마찬가지로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종교인의 관점에서는 이렇다고 하네. 앨런, 네 생각은?”
“모든 결과에는 과정과 원인이 있습니다. 마법을 완성하려면 마력과 주문이 필요하죠. 소원의 조각은 열망을 이뤄줌과 동시에 변질시켜서 대가를 충족하는 듯합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있으니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앨런이 더 알고 싶어도 아직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어쨌든 조각은 더 있겠구나.”
“미궁은 전 세계에 있으니 훨씬 많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거대한 미궁은 이곳에 있지. 만약에 커다란 조각을 발견해서 최강의 힘을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영원한 잠에 빠지게 만들겠죠.”
“왜?”
“꿈속에서는 무적이니까요. 그리고 그편이 훨씬 처리하기도 쉽고요. 진짜로 소원을 들어주는 일보다 소모 값이 적다는 뜻입니다.”
테일러는 어느새 잠에 빠진 시바를 슬쩍 쳐다봤다. 악마가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어머님께 이르러 간 듯했다.
“어쨌든 부작용을 극복하거나 비틀 수 있다면 좋은 물건은 맞지?”
“네.”
“그런데 왜 소문이 안 났을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긴 주식 시장에서도 좋은 정보는 지들만 알고 있는 법이지. 단물을 쏙 빼먹고 남은 껍데기는 개미한테 떠넘겨.”
“당해보셨나요?”
“그런 적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는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월세는 밀려있었지, 쓰레기통에는 경마 잡지가 굴러다니지. 주식 그리고 선물에 손을 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허. 눈빛이 매우 불손해.”
“···.”
“이젠 안 그러잖아.”
그러면 됐다. 현재는 착실히 살고 있으니.
“요즘 어때요?”
“뭐가?”
“기분이나 생활 등이요.”
“좋지. 몸은 젊은 시절로 돌아갔지, 미궁에서 탐험할 거리는 넘쳐나지. 그렇게 자금을 모아서 매직웨어를 바꾸면 더 깊이 내려가도 괜찮을 거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한편에서는 사람의 의지를 믿기도 한다. 변화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 차이는 무엇일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겠죠.”
“갑자기 무슨 소리냐?”
“별 뜻 없어요.”
“그나저나 우리 이제부터 뭐하냐? 바로 내려갈 건 아니지? 사흘 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앨런은 테일러의 불안한 눈빛을 보다가 자신도 소파에 앉았다.
[봉인이 풀렸다면 용을 찾아라.]
소원의 조각을 봉인한 유리관에 적힌 글귀였다. 당연히 용을 찾아보고 싶지만, 그게 쉬울 리 없었다.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미궁에 가야죠.”
“언제···?”
“계획은 나중에 짜고, 일단 3일 정도는 푹 쉬죠.”
그 말에 테일러가 환하게 웃었다. 벌떡 일어나서 전신 거울 앞에 가더니 머리카락을 자꾸 매만졌다.
*
앨런은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미궁의 문에 도착했다. 첫 번째 줄은 여전히 사람이 많지만 이른 시간보다는 덜했고, 두 번째 줄은 언제나처럼 비슷했다.
첫 번째 줄은 저층의 탐험가들이 몰리기에 당연히 붐볐다. 당일치기로 1~3층만 오가는 광부는 새벽에 전부 들어갔기에 그나마 지금이 한산했다. 물론 상대적인 비교다.
두 번째 줄은 원시림과 설원을 다니는 탐험가들이 사용하기에 옆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 이들에게 당일치기라는 개념은 없기에 언제 오든 비슷한 숫자를 유지했다.
빠르게 줄어드는 대기열을 따라 성큼성큼 걷고 있으니, 상자의 무한궤도가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러 검증을 거친 결과, 상자의 내부는 25t 트럭 정도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물건과 서랍의 크기가 안 맞아도 일단 접촉만 하면 수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입이 늘겠구나.”
“네. 버려야 하는 전리품이 크게 줄었으니까요.”
그동안 손이 모자라서 버렸던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건 다른 탐험가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차원배낭에 엄청난 가격이 붙은 이유기도 했다.
상자는 집게발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곤 했는데, 그러면 서랍이 금방 넘쳐서 앨런이 자주 감독해야 했다.
‘이제는 그럴 일도 많이 줄어들겠지. 아니면 신나서 더 주워 담으려나?’
미궁에 진입하자 햇빛의 은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류가 쌓아 올린 마법공학이 만들어내는 빛이 사방에서 번쩍였다.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무엇을요?”
“쟤 말이야.”
테일러의 손가락이 상자를 가리켰다.
소원의 조각은 사용자의 소망을 감지하고, 결과가 어찌 되든지 이루어줬다.
소원, 열망, 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입력한 대로만 동작하는 기계가 지닐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상자는 단순한 기계를 넘었다는 의미이며, 미약하더라도 지성이 싹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평소에 말했잖아. 쟤 하는 짓이 수상하다고.”
“그렇네요.”
“아직은 아기 수준이라도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지. 인공정령에 가까우려나?”
“흠···.”
“네 눈에는 아직도 미달이야? 그럼 네 기준에서 지성을 깨우쳤다는 건 어떤 건데?”
“적어도 저를 속일 수 있어야죠.”
“기준이 너무 높잖아. 잠깐, 속여? 그럼 반란이잖아.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잡아서 영혼석을 열어봐야죠.”
영혼석은 사람으로 치면 뇌니, 해부해서 뇌세포를 관찰하겠다는 말과 똑같았다.
삐—
“저 봐. 바로 반응하잖아.”
상자가 미로 벽에 바짝 붙어서 이동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시바 뒤로 움직이기도 했다. 드워프보다 몸집이 더 커서 쓸모없는 노력이었지만.
“어차피 별문자 추가하려면 열어야 해요.”
“그 부분은 마법공학자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 네 말을 듣고 보니 진정한 의미의 인공정령이 되려면 멀긴 하구나.”
다시 터벅터벅 걸었다. 맨홀에서 오토마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지금의 앨런에겐 날벌레 수준이라 금방 처리됐다. 테일러나 시바도 손목만 몇 번 움직이면 되니, 긴장감이 차오를 리 없었다.
지루함은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졌다.
“나만 심심해? 시바, 너는?”
“전 괜찮습니다. 미궁에 깊이 내려갈수록, 괴물들에게 안식을 선사할수록 어머님의 사랑이 깊어짐을 느낍니다. 그러니 지루할 틈이 있겠습니까? 형제님들만 괜찮다면 미궁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가끔 합니다.”
“성수 보충은?”
“아, 정정하겠습니다. 가끔은 바깥 공기도 쐐야죠. 사람이 어떻게 미궁에만 있겠습니까. 두더지도 아니고.”
“앨런, 너는?”
“저는···.”
“아냐. 됐다.”
원시림에 있는 기지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할 게 뻔했다. 앨런의 생각은 알 수 없어도, 어떻게 행동할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미궁에서도 공간문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설원까지 평균적으로 2주 정도 걸리잖아. 언제 거기까지 내려가냐.”
“편하긴 하겠네요. 아침은 지상에서 먹고, 점심은 30층에서 먹겠군요.”
“안타까운 점은 무슨 지랄, 아니 마법을 사용해도 다른 층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거지.”
“수집가 같은 예외도 있어요. 회장님에게 쫓기다가 지상에 도착해서 공간문을 연 모습을 보면, 그도 거기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요.”
가끔 마주치는 탐험가들은 앨런 일행이 적은 머릿수로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멀찍이 피해갔다.
사람도 셋밖에 안 되는데 여유까지 부린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고, 웬만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미궁만큼 증거인멸이 쉬운 장소는 없으니, 아무리 선해 보여도 조심해야 했다.
시바가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그만뒀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슬프군요. 제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입니까?”
“눈만 보면 초식동물 같긴 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드워프 산적이지.”
“형제님···.”
“아니면 모신교 수도승 옷을 입고 다니든가.”
“그거 좋은 생각···.”
“아! 살인강도가 자신을 사제라고 속이고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너무 많아서 안 되겠구나.”
“그런 천인공노할···. 잠깐만요. 그냥 많다도 아니고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까?”
“자주 있지. 6개월 전에도 뉴스에서 봤거든.”
“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덕분인지 9층의 끝까지 가는 여정은 금방 지나갔다. 10층 입구는 예전부터 앨런이 자주 머물렀던 야영지답게, 오늘도 탐험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왜 저래?”
“글쎄요. 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인사하고 올게요.”
앨런은 익숙한 모습의 두 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파란 머리의 의족 검사 데니스, 마나하트에 금이 갔던 리자드맨 카크다였다.
그들과 함께 있는 탐험가들은 파워슈트를 입은 탐험가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움찔거렸다.
파워슈트가 자주 보인다고 해도, 미로나 동굴 초입을 다니는 탐험가가 쉽게 접할 장비는 아닌 까닭이었다.
앨런이 바이저를 올리자, 붙임성 좋던 데니스가 입을 살짝 벌렸다.
“앨런?”
“오랜만이에요.”
“나도···.”
“그땐 정말 고마웠다.”
카크다가 끼어들며 데니스의 말을 잘랐다. 리자드맨 특유의 딱딱한 말투가 이번만은 부드럽게 느껴졌다.
“수익을 양보한 덕분에 치료를 무사히 마쳤다.”
“잘 됐다니 다행이네요.”
앨런은 카크다와 함께 있는 탐험가들을 빠르게 훑어봤다. 예전에 봤던 얼굴들이 아니었다. 습격을 당했으니 탐험가의 꿈을 접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궁은 빠져나간 만큼, 아니 그 이상 사람이 들어오니 빈자리가 생겨도 금방 채워졌다.
“이젠 기초마법도 에비 없이 몇 가지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마탑에 들어가기 쉬워지겠죠. 잘됐네요.”
카크다는 에셀 마탑에 입사하고자 하는 꿈을 여전히 간직했고, 앨런은 그 모습이 퍽 좋게 느껴졌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데니스가 친구를 밀어냈다.
“이젠 내 차례야. 파워슈트는 뭐야?”
“20층의 근위병을 잡고 구했죠.”
“벌써 거기까지? 원시림 기지도 가봤어?”
“네.”
“와, 진짜 빠르구나. 하긴, 혼자 다닐 때부터 남다르긴 했지.”
“의족은 어때요? 오랜만에 좀 봐 드릴까요?”
“그러면 나야 좋지. 내려온 지 며칠 지났더니 삐걱거려서.”
앨런이 손짓으로 상자를 부르자 돌돌 거리며 다가왔다. 상자의 덩치를 본 데니스가 움찔거렸다.
“새로운 녀석이네. 표범은?”
“뒤에요.”
“뭐? 앗!”
데니스의 어깨가 크게 출렁였다. 그건 그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돌아본 장소에는 언제 왔는지 호랑이 크기의 오토마톤이 엎드려있었다.
“많이 변했다?”
“이것저것 장착했죠.”
“우리가 전부 덤벼도 안 되겠는데.”
“설마요.”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데니스의 의족을 살폈다. 예전에는 점검에만 한 세월이 걸렸는데, 지금은 보자마자 뭐가 문제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혹사당한 마력회로를 정돈하며 물었다.
“야영지 분위기는 왜 이래요?”
“경찰이 와서 귀찮게 했거든.”
“경찰이 여기까지 내려와요?”
“방위군은 미궁의 문만 지키니, 문제가 발생하면 내려오기도 해. 자기들 나름대로 탐험복을 입고 오긴 했는데, 우리가 보면 경찰 티가 줄줄 흐르지. 범죄자를 잡으러 내려왔나 본데, 그게 쉬울까?”
< 도망자(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