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망자(2) >
데니스와 카크다는 여전히 동굴까지만 다녔다. 20층까지 딱 한 번 가봤는데, 궁전은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 복귀했다고 한다.
카크다는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 이상은 매직웨어가 못 버틴다.”
20층에 도달한 순간, 전투를 거친 매직웨어가 삐걱거리니 여정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복귀까지 생각하면 여력을 남겨둠이 당연했다.
“마법공학자를 고용하면요?”
“굳이 힘들게 여기까지 내려오려는 사람은 없고, 있다 해도 고용비가 무시무시하다.”
순수한 육체로 20층에 도달할 실력을 길렀다면 이런 고민 자체가 의미 없겠지만, 매직웨어도 능력 일부로 취급하기에 생기는 문제였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탐험가다.”
카크다도 일반인과 비교하면 맹수지만, 맹수의 세계에도 급이 다른 생물은 있는 법이다.
테일러는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보통이지. 나야 전성기 때는 심도 4였으니 잃은 기억 찾기고, 너는 힐러니 엄청나게 강할 필요는 없고.”
“형제님, 저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궁에 오래 머물수록 어머님의 은총이 깊어집니다.”
“그건 많이 싸워서 그래.”
“네?”
“용사파티가 왜 빨리 강해지는 줄 알아? 맨날 싸우니까 경험치가 팍팍 쌓여서 그래. 매번 목숨을 거는데 약하면 더 이상하지.”
“일리 있는 말입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강하게 해준다고 하니까요. 그럼 앨런 형제님은요?”
“쟤는 괜히 이해하려 하지 말자.”
앨런은 데니스와 카크다의 파티를 데리고 20층에 도착했다. 몇 차례 전투를 겪고도 신품 같은 매직웨어를 보며 탐험가들이 감탄했다.
“확실히 깊게 내려가려면 마법공학자가 필요해.”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마력수련법과 무술에 매달리든지.”
“성과 낼 자신 있어?”
“아니.”
매직웨어의 단점이기도 했다. 장착 전후의 차이가 워낙 크고, 돈만 있으면 큰 힘을 손에 넣기 쉬워지니, 탐험가들은 옛날 사람처럼 수련에 매달리지 않았다.
테일러는 그런 변화가 매우 못마땅했다.
“이래서 젊은것들은···. 매직웨어에 기대기만 하고, 마도구가 자신이 지닌 능력이라고 착각하지. 항상 기본을 잊으면 안 돼. 왜 기본이라고 부르겠어?”
“정론입니다.”
시바가 적당히 맞장구쳐주는 사이, 일행은 넓은 도로를 거닐었다.
20층은 폐허가 된 도시를 연상케 했다. 형태만 보면 고층 빌딩으로 추측되는 건물도 다수 있지만, 동굴 높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랫부분만 남아있었다.
앨런은 음식점 혹은 카페로 쓰였으리라 추정하는 건물이 나타나자 시간을 살폈다.
“저녁 먹을 시간이네요. 오늘은 여기에서 쉬죠.”
“그래. 강행 돌파하려다 영원히 가면 안 되지.”
만일의 습격에 대비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일부는 경계를, 일부는 휴식을, 일부는 음식을 준비했다.
데니스는 불침번을 정하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져서 불침번 시간이 짧아지리라 예상되었다.
“앨런, 너는 그냥 자라.”
“왜요?”
“우리 일행의 매직웨어를 몽땅 점검해줬는데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시킬 순 없지.”
앨런은 무언가를 살피고 고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서 일부러 찾아다녔지만, 다른 사람은 충분히 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돈도 안 받아서 솔직히 처음에는 호구인 줄 알았다니까.”
“어렵지도 않았어요.”
“겸손은.”
앨런의 말은 진짜였다. 과장 좀 보태서 숨 쉬는 일만큼 쉬웠다.
필요에 따라 가열 조리도구도 되는 마석등을 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멀리에서 소음이 들렸다.
의족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던 데니스가 벌떡 일어났다.
“오토마톤인가?”
“아뇨. 사람 발소리요.”
“하, 왜 하필 여기로 오고 지랄이야.”
침낭에 쏙 들어가 있던 탐험가들이 툴툴 대면서도 빠르게 뛰쳐나와서 무기를 꺼냈다.
지인이 아니라면 항상 긴장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는 사람도 의심해야 하는 장소가 미궁이었다.
탐험가의 수칙 중 하나.
다른 탐험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
대부분은 이 수칙을 잘 지키나 예외가 있으니. 그건 바로 탐험가의 장비와 괴물 전리품을 노리는 살인강도였다.
휴식을 방해받은 탐험가들이 이를 갈았다.
“구더기들인가?”
“아니. 그 새끼들치고는 너무 대놓고 접근하는데. 설마 실력에 자신 있나?”
다른 건물도 활용하며 전투에 대비하고 있으니, 인상이 험악한 무리가 등장했다.
데니스가 앞으로 나섰다. 마나소드가 푸른 검날을 뿜어냈고, 의족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듯 김을 뿜어냈다.
“너희들 미쳤나? 다른 파티가 야영하는 장소에 들어와?”
“초면에 말이 심하군.”
앨런이 새로운 무리를 천천히 훑어봤다. 그중에 이질적인 사람이 하나 있었다. 홀로스킨 너머를 꿰뚫어 보자, 오크가 아니라 수달의 머리가 있었다.
저 밑의 울창한 밀림에 서식하는 수달이 아니라, 동방대륙의 귀여운 수달을 닮았다.
<분석>
이름 : 오토
종족 : 라이칸
특징 : 수달, 형사
앨런의 기억에 남은, 정확히 말하면 인적사항을 저장해둔 경찰이었다. 예전에 로만 컴퍼니의 범죄자들을 그에게 넘겼다.
새로이 나타난 인물 중 하나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우리도 여기에서 하룻밤 머물러도 되겠나?”
“아씨, 경찰이잖아.”
“어떻게 알았지?”
데니스의 말에 경찰 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뻔하지. 어떤 탐험가가 다른 파티가 야영하는 장소에 와서 같이 묵자고 해? 미궁에서 일하려면 최소한 조사는 하고 와야지.”
“9층에는 야영지가 있었는데···.”
“거긴 특수한 장소고. 이미 당신들 소문 싹 퍼졌어. 그런데 진짜 경찰 맞아? 소문을 이용해서 안심시켜놓고 싹 털어먹으려는 수작은 아니고?”
“뭐? 말이 너무 심하군.”
“이런 말을 들을 각오는 하고 왔어야지. 여긴 미궁이니까.”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앨런이 앞으로 나섰다.
“데니스.”
“왜?”
“경찰 맞아요. 저 뒤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예전에 봤던 수달 형사예요.”
“수달? 아, 그 무섭게 생긴 척하려고 인상 쓰던? 어디?”
“당연히 홀로스킨으로 모습을 속였죠.”
경찰들도 그 이야기를 들었기에 뒤에 있던 오토의 등을 떠밀었다. 갑작스레 소통창구가 된 수달이 대화를 시도했다.
“월급을 투자해서 나름 괜찮은 홀로스킨을 샀는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요.”
수달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잔뜩 생겼다. 어쨌든 함께 밤을 견디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경찰들의 모습은 꾀죄죄했다. 여기까지 내려온 걸 보면 나름대로 실력은 있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미궁은 호락호락한 장소가 아니었다.
앨런이 경찰이 사용하는 마도구와 매직웨어는 어떨지 궁금해하는 사이, 오토 형사가 말을 걸었다.
“앨런이라고 했었죠?”
“네.”
“이게 홀로스킨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진짜로 그냥 보입니까?”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토의 콧잔등에 주름이 생겼다. 수달 얼굴이라 귀엽게만 보였다.
“하, 방화벽이 튼튼하다고 해서 샀는데 이럴 줄은···. 나중에 방문해서 뒤집어야겠습니다.”
대화를 들은 시바가 테일러에게 속삭였다.
“앨런 형제님이라 가능한 일 아닙니까?”
“맞아. 시온이 쓰는 홀로스킨도 눈치채는데 일반 형사가 사용하는 마도구쯤은 쉽지. 어디가?”
“오해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냥 놔둬. 재밌잖아.”
“아니, 형제님···.”
“상인이 평소에 구린 짓거리를 많이 했으면 이번에 된통 털릴 테고, 아니면 무사히 넘어가겠지.”
“오. 일리 있습니다.”
물론 테일러는 그런 이유보다 단순한 흥미를 위해서 말렸다. 예로부터 싸움과 불구경은 큰 볼거리였으니까.
앨런은 오토의 꼬리에 달린 주사기총을 점검하며 물었다.
“왜 내려오셨나요?”
“선의를 베풀었어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저쪽은요?”
앨런이 가리키는 장소에는 시바와 데니스 쪽 탐험가, 경찰 몇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모두 모신교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마침 모신교 수도승도 있으니 즉석 기도회가 열렸다.
사람은 이성적이면서도 비이성적이었다. 특히 위험한 직업에 종사할수록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지는 심리가 커졌다.
여태 묵직한 목소리로 좋은 말을 전하던 시바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특별히 성수를 나눠드리겠습니다.”
“어, 이건? 성수가 아니라···.”
“어허. 성수입니다. 한 모금 정도는 티도 안 나니 괜찮습니다.”
술, 아니, 시바가 성수라 부르는 음료는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넘쳐났고, 그건 미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힘든 일이기에 더욱 많이 찾았다.
탐험가들은 탐험 중 음주가 익숙하기에 바로 들이켰고, 경찰도 분위기에 휩쓸렸다. 개중에는 자신이 챙겨온 성수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경계심이 풀리자 하나둘 입이 열렸다.
“그 새끼는 왜 미궁까지 왔는지. 도둑질했으면 차라리 외국으로 튀지.”
마침 앨런이 듣고 싶던 이야기도 나왔다.
“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기업? 아니면 공공기관이 당했나요?”
“시벌···. 아, 실례. 지금쯤이면 알 사람은 다 알 테니 괜찮···겠죠. 이곳의 탐험가들이 지상에 올라갈 때쯤이면 뉴스 보도가 끝났을 테니까요. 에셀 마탑의 자회사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자회사라 보안이 별로였나요?”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미궁으로 숨어들었으니 에셀 마탑이 알아서 처리하게 두면 되는데, 왜 우리까지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윗선과 커넥션이 있겠죠.”
다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았다. 오토 역시 앨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리적 저항감이 무너지자 오토의 입이 술술 열렸다.
“여기까지 내려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한계 같습니다. 은신 마도구를 사용하며 최대한 전투를 피했는데도, 이곳저곳에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경찰과 탐험가는 다르죠.”
“그냥 돌아가면 위에서 호통을 칠 텐데 어쩌겠습니까. 찾을 수가 없는데.”
“도둑은 누굽니까?”
“래빗풋입니다.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말하는 겁니다.”
래빗풋. 말 그대로 토끼 발을 지닌 소인족이었다. 선천적으로 날렵하고 잘 숨는 종족이며, 타고난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범죄에 빠지기도 쉬웠다.
다음날, 데니스가 한 차례의 전투를 경험하더니 앨런에게 말했다.
“너는 더 내려가지? 우린 이쯤에서 돌아갈게.”
“기왕이면 궁전도 경험해보시지.”
“그건 우리 힘으로 해볼게. 복귀는 걱정하지 마. 경찰 친구들과 동행할 테니 예전보다 훨씬 안전할 거야.”
앨런은 데니스와 경찰이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경찰들은 힘들게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성과가 없네요.”
“내 생각에 도둑놈은 이 근방에 숨었을 것 같은데. 뭐, 목숨이 먼저니 무리할 필요는 없지.”
테일러의 말대로 20층은 숨기 좋았다. 가득한 건물은 하나하나가 은신처였고, 궁전 빼면 출몰하는 오토마톤이나 지하인이 매우 약했으니까. 게다가 여차하면 원시림으로 도주하기 좋은 위치였다.
그쪽 문제는 관계자들이 알아서 할 테니, 앨런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탐험과 새로운 지식이 기다리고 있는데, 도둑 하나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는가.
2시간 정도 이동하니 궁전이 나타났다. 도시의 건물들과 궁전 사이에는 대로가 있었는데, 도로 양옆의 풍경에는 큰 차이가 났다. 궁전은 옛 문화제 같았고, 도시는 현대나 비슷했다.
앨런은 열려 있는 문을 목격했다.
“누군가 들어간 지 얼마 안 지났나 보네요.”
“문은 꼬박꼬박 닫고 다녀야지. 예의 없긴.”
선객은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지, 파괴된 오토마톤이 없었다. 놈들은 무언가를 쫓아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새였는데, 앨런 일행을 보자마자 어김없이 달려들었다.
예전에는 몰려드는 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 빠르게 돌파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원이었다.
“마석과 영혼석을 먼저 챙겨.”
삐―
상자는 전투를 무시하고 집게발로 전리품을 수거했다. 벌이나 새를 닮은 오토마톤이 자폭공격을 감행하면 튼튼한 몸을 믿고 그냥 흘려버렸다.
선객도 전투를 아예 피할 순 없었는지 파괴된 오토마톤이 하나둘 보였다. 그리고 근위병이 기다리는 대전 앞. 커다란 문에 손을 올린 누군가가 있었다.
하얀 머리의 래빗풋이 앨런 일행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왜 따라오는 거지?”
“그냥 가는 길인데요.”
“짭새 냄새가 나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래빗풋은 소리를 빽 지르더니 대전 안으로 몸을 던졌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우리가 경찰로 보이나?”
“같이 있어서 냄새가 묻었겠죠. 매직웨어에 바르는 윤활유 냄새가 약간 특이하긴 했습니다.”
“차이가 느껴져?”
“네.”
테일러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전으로 들어갔다. 래빗풋은 근위병을 피해 검은 문으로 뛰어들었고, 표적을 놓친 근위병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 도망자(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