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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53화 (153/193)

< 도망자(3) >

앨런과 근위병은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쳤다. 근위병은 대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름대로 언제나 옥좌의 곁을 지켰다.

앨런은 다음 층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옥좌 뒤에 만들어지는 문을 통과해야 했다.

내부로 진입하자 근위병이 손짓했다. 그의 명령에 따르는 오토마톤들이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쿵!

옥좌 근처에 서 있던 근위병이 단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3m의 거구가 떨어지니, 지면이 깜짝 놀라 부르르 떨었다.

앨런은 근위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중이떠중이 탐험가를 걸러내는 존재이자, 지상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파워슈트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테일러는 옛 시절을 회상했다.

“젊었을 때 여기까지 도달하면 최대한 파손 없이 제압하려고 고생 좀 했지. 그런데 요즘은 일단 때려 부수고 핵심부품만 챙겨가.”

“저는 자금문제 때문에 근위병의 파워슈트를 기초로 삼아 손수 제작하긴 했죠.”

앨런처럼 파워슈트를 직접 개조하는 경우는 옛날 방식이었고, 요즘은 공장이나 공방에서 뚝딱뚝딱 만들었다.

어떤 기술을 적용하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양해지는데, 건설 현장과 전장 등 모든 영역에서 쓸모가 있었다. 당연히 고급 마법공학을 담을수록 가격도 천정부지로 솟았고.

표범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호랑이 크기면서도 기둥을 적절히 활용하니 금방 풍경에 녹아들었다. 실제로 외장갑에 새겨진 [동화]가 은신 능력을 강화했다.

표범은 근위병을 주시하다가 주인을 바라봤다. 습격해도 되겠냐는 물음이었다.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핵심부품만 챙겨가겠지만, 상자의 능력이 강화되었으니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제압할 계획이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형제님, 저번처럼 얼려서 제압하십니까?”

“아뇨. 극저온으로 피로도가 쌓인 마력회로를 전부 다시 설계해야 했거든요.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

앨런이 손짓하자 상자가 서랍을 열었다. 손바닥 크기의 거미들이 뽈뽈 기어 나왔다. 평소보다 숫자가 많았다.

동물형 오토마톤이 거미를 인식하고 앞발을 내지르지만, 앨런의 거미는 고양이에게 사냥당하는 벌레와 달랐다.

샤샥거리는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고, 때로는 그냥 얻어맞고도 멀쩡하게 달아나서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벽과 천장 그리고 기둥이 사방에 있으니 거미가 움직이기 좋았다.

테일러와 시바가 달려오는 오토마톤을 막아내는 사이, 앨런이 거미 부대에 신호를 보냈다.

주인의 명령을 받자마자 꽁무니에서 푸른 실을 뽑아냈다. 실체가 없으면서도 실체에 간섭할 수 있는 마법의 실이었다.

마력의 실이 허공에서 얽히며 거미집 모양으로 변하고, 근위병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거미집은 접촉하자마자 대상을 옭아맸다.

실에 적용된 룬문자는 [속박], [접착], [쇠약], [둔화]. 거미의 크기가 작아서 위력은 약할 수 있으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여럿이 모이면 튼튼하게 버티는 법이었다.

‘무시하는 존재도 있지만, 근위병이 그 정도는 아니지.’

회장, 파괴자, 교수님 등 지금까지 만났던 강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휙휙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동료들이 근위병을 속박하자, 대기하고 있던 거미 일부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나머지는 여전히 기둥에 붙어있었는데, 이들을 연결하면 육각기둥이 되었다.

‘중심에는 근위병. 설계는 완벽해. 아니, 훌륭해.’

앨런은 완벽이란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수 없으니, 자신이 손을 대기가 곤란했다. 발전 가능성이 막혔다는 소리기도 하고.

잡념은 생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훨씬 광대한 영역은 근위병에게 집중되었다.

육각기둥 형태로 배치된 거미들이 빛을 뿜어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들의 배에 적힌 룬문자가.

[진공]

근위병의 주위에 가득하던 공기가 자리를 이탈했다. 그건 산소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생명체는 산소와 호흡이 가져오는 높은 에너지 효율을 채택했고, 그건 지하인도 똑같았다.

근위병의 본체는 오러도 사용하는 전사. 무호흡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꽤 길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파워슈트 내부에 있던 공기도 서서히 빠져나가자, 근위병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거미줄에 꽁꽁 묶여있어서, 가벼운 잠꼬대로 느껴질 뿐이었다.

테일러와 시바가 해치운 오토마톤을 한곳에 모으고, 상자가 집게발로 주섬주섬 챙기고 나자, 근위병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파워슈트는 사용자의 생명에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하고 등판을 열었지만, 열린 외장갑 내부로 보이는 근위병의 등은 고요하기만 했다.

“깔끔하네요.”

“깔끔?”

“피를 씻을 일도, 부품이 망가졌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죠. 사지와 몸통을 분리해서 보관하면 끝. 제 말이 맞죠? 신경가스를 사용할까도 생각해봤는데, 미궁은 밀폐된 장소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죠.”

앨런은 근위병 앞에 섰다. 근위병을 쏙 빼내고, 파워슈트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인공 폐는 독성 물질을 거르고, 시바 씨의 성법에는 그런 공격을 막을 수단이 존재하지만, 뭔가 찝찝하잖아요.”

“어···, 어. 그래. 생각해보니 질식이 훨씬 낫네.”

대전 안은 금방 깨끗하게 변했다. 바닥에 오토마톤이 흘린 기름이 묻어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터였다.

“아저씨도 파워슈트 만들어드릴까요?”

“아니. 예전에 타봤는데 어색하더라고. 고급 매직웨어는 파워슈트의 출력을 똑같이 뿜어내거나 상회할 수도 있어. 알고 있지?”

“형제님. 만들어달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커흠.”

“시바 씨는요?”

“저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육체수련자는 굉장히 예민하고,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려면 웬만한 파워슈트로는 어림도 없었다. 경지가 점점 상승하면 강철보다 피부가 단단해지는 지경까지 다다르니, 영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테일러가 단어 하나를 콕 집어냈다.

“아직은? 너도 여지를 남겨두는 거냐?”

“매몰차게 거절하면 앨런 형제님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웃기고 있네. 신경도 안 쓸걸.”

테일러의 말대로 앨런은 관심이 없었다. 거미들을 회수하며 고장을 살피고,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수리했다.

“자, 그만하시고.”

앨런은 손뼉을 쳐서 이목을 모은 다음, 옥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은 문이 입을 크게 벌렸다.

“앨런. 아까 도망쳤던 토끼는?”

“원시림에 숨었겠죠.”

앨런은 평소처럼 표범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자신이 들어갔다. 검은 통로를 나가자마자 목격한 광경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였다.

쾅! 화륵!

폭발과 동시에 주변에 불길이 번졌다.

“좋아! 명중이다!”

“경찰 맞아?”

“어차피 공고했으니 끝장을 봐야지! 뭐해? 쏟아부어!”

원시림에 진입하자마자 어떤 무리가 기습했다. 그들은 에비를 최대한 활용해서 화력을 퍼부었다.

특히 화염계열의 마법이나 폭탄이 많이 날아들었다. 원시림의 생물들을 불로 지지면 남아나는 부위가 없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는 그만큼 효율적인 공격이 또 있을까.

점점 덩치를 부풀리는 화염과 더해지는 열기에 습격자들이 주춤하는 순간.

화염을 뚫고 고양잇과 맹수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많은 공격에 얻어맞고도 외장갑만 조금 그을린 모습이었다.

표범은 자비가 없었다. 돌진하던 운동량 그대로 습격자 하나를 깔아뭉개고, 빠르게 회전하는 드릴 송곳니로 목을 물어뜯었다.

카드드득!

“으아아···.”

목 보호대 덕분에 맘껏 지르던 비명은 점점 줄어들었다.

입가가 붉게 물든 표범이 머리를 살짝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날카로운 눈이 적을 살폈다.

뒤늦게 문을 빠져나온 테일러는 주변의 상태를 보자마자 앨런을 찾았다.

“괜찮니?”

“네. 예전에 화염 마법사와 싸웠잖아요. 그때 얻은 데이터를 파워슈트에 최대한 적용했죠.”

“아···, 그때.”

테일러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떠올랐다. 마법사의 머리를 붙잡고, 얼굴에 열광선을 쏘던.

“설마, 그때 세던 숫자가···.”

그런 생각도 잠시, 이를 드러내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탐험가, 아니 살인강도 무리가 눈앞에 있었다.

“다짜고짜 공격? 미친 새끼들이.”

테일러는 바로 마나소드를 휘둘렀다. 대화는 사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통할 사람이 있고, 아닌 짐승이 있었다.

시바는 왼손으로 테일러에게 보호의 성법을 걸어주고, 오른손에는 치유의 기운을 담아 앨런을 매만졌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니 그만하셔도 됩니다.”

“외부는 멀쩡해도 마력이 흐트러졌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구더기라니···.”

“흠.”

앨런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왼쪽 눈이 주변을 빠르게 살피더니 한 부분을 크게 확대했다.

100m 정도 떨어진 굵은 나무 뒤로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까 도망쳤던 래빗풋이었다.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뭐가 무서운지 두 눈만 살짝 내밀고 있었다.

물론 래빗풋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진짜로 도망치고자 했으면 습격 따위는 내던지고 아예 몸을 숨겼어야 했다.

앨런이 표범에게 신호를 보내자, 냥냥펀치로 누군가의 가슴을 함몰시키던 녀석이 수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마법을 마구 쏘아댄 결과가 표범 외장갑에 살짝 생긴 그을음이니,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테일러는 처음에는 머리에 피가 쏠려서 급소만 노렸지만, 나중에는 진정하고 2명을 생포했다. 그들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와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개자식들이 감히 누구를···.”

분노와 달리 앨런의 모습은 너무 깔끔했지만, 어쨌든 공격당한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까 튄 래빗풋이랑 연관된 놈들이지? 그 새끼는 벌써 달아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표범이 쫓아갔으니 금방 돌아올 거예요.”

“아, 그래? 어쩐지 안 보이더라. 난 평소처럼 주변에 숨은 줄 알았지.”

테일러는 표범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사람이지만, 그조차도 잠깐 시선을 다른 데에 두면 녀석을 놓치기 일쑤였다.

앨런의 말대로 표범이 누군가의 옷깃을 물고 끌고 왔다. 대롱대롱 매달린 래빗풋은 짐승 새끼처럼 가만히 있었다. 괜히 반항했다가 드릴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리면 어떻게 될지는 아까 목격했으니까.

고개를 처박고 있던 래빗풋은 사람의 발이 보이자마자 얼굴을 번쩍 들었다.

“제 이름은 코니···.”

“닥쳐. 안 물어봤으니까.”

“궁금하실까 봐···.”

“왜 친구들을 불러왔지? 우리와 원한이 있나? 너 같은 범죄자 놈들과 엮일 일이 없었는데.”

“짭새가 아니에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에, 그쪽 사람 아닙니까?”

“아니니까 하는 소리지.”

“헤헤. 그럼 일단 대화를···.”

“대화?”

“우리는 문명인이자, 지성인이자, 도시인이니까요.”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걸 원했으면 처음부터 신사적으로 행동했어야지.”

“관계의 재정립이라고 아시는지···.”

테일러가 코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입을 열 때마다 짜증 지수가 높아진 탓이었다.

앨런이 앞으로 나섰다.

“에셀 마탑의 자회사에서 무언가를 훔쳤던 도둑이죠?”

“음.”

코니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자 테일러가 머리를 다시 때렸다.

“머리 굴리는 소리 들린다. 어차피 그래 봐야 손바닥 안이니 묻는 말에 대답해. 그럼 죽이진 않을게.”

“···.”

“또 대가리 굴리네. 저기 보여? 모신교 수도승이야. 약속은 지킨다.”

시바가 인자한 미소를 보내자 코니가 몸부림쳤다.

“정화봉사단! 날 노예로 만들 생각이지? 악독한 놈들!”

앨런은 당황하는 시바를 잠깐 쳐다봤다. 정화봉사단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런 반응이 되돌아오는지. 다시 코니를 내려다봤다.

“25층 늪지대에는 사람 살을 파먹는 벌레가 있어요. 다음 세대를 위해 숙주를 최대한 살려두죠. 아니면 그냥 고통을 주려고 미궁의 창조자가 설계한 괴물일 수도 있고요.”

“···.”

코니가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언제나 그 자리에 붙어있는 원시림의 해가 보였다.

“가짜보다는 진짜가 좋겠죠···.”

“그럼 무엇을 훔쳤는지 이야기 좀 해볼까요?”

< 도망자(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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