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쇠(1) >
앨런은 코니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전투 때문에 큰 소음이 발생했으니 차분하게 이야기하려면 조용하고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야트막한 언덕의 봉우리 살짝 아래에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앨런 일행은 그곳에 앉고, 코니와 습격자들은 밑에 무릎 꿇렸다.
코니는 정신을 잃은 동료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물건을 빌린 사람인 줄 어떻게 알았···.”
테일러의 손이 위로 올라가자, 코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알았습니까?”
“경찰을 만났어요. 에셀 마탑의 자회사인 연구소에서 어떤 물건을 훔친 도둑을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역시 내 코는 틀리지 않았어. 지독한 냄새가 나더라니.”
“우리는 경찰과 관계없어요. 그냥 설원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쪽이 습격하면서 이렇게 엮이게 되었죠.”
“고작 3명으로 원시림도 아니고 더 아래까지? 미친···, 악!”
테일러가 넓적한 돌을 던졌고, 이마를 맞은 코니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차마 노려볼 용기는 없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하, 빌어먹을. 잘못 걸렸네.”
“코는 옳았는데 눈은 틀렸구나.”
테일러의 말에 코니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앨런이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경찰은 왜 여기까지 내려왔을까요?”
“그것도 몰라? 경찰 고위직 중 한 명이 연구소장의 남편이잖아.”
“철저히 조사했군요.”
“이 정도는 기본이지.”
딱!
“어딜 우쭐거리고 있어. 넌 지금 잡힌 도둑이란 사실을 잊지 마. 예전 같았으면 다리부터 자르고 캐물었어.”
뭐가 그리 자랑이라고 어깨를 펴던 도둑은 괜히 이마에 혹만 생겼다. 자신의 친구들을 노려봤지만, 그들은 반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리? 그럴까요?”
앨런의 말에 테일러와 코니가 서로를 바라봤다. 도둑의 눈동자에 지진이 발생했고, 테일러가 진심이냐고 물었다.
“갑자기?”
“일단 잘라놔도 나중에 의족 달면 되니까요. 치료나 운송을 생각하면 그냥 놔둬서 제 발로 걷게 하는 편이 더 좋긴 하겠네요.”
“훔친 물건은 수상한 열쇠다.”
코니는 앨런이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발설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굉장히 협조적인 태도가 되었다.
“열쇠? 지금 가지고 있나요?”
“당연히 숨겨뒀지. 그건 내 목숨을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앨런은 에셀 마탑의 자회사인 디그리 마법연구소를 떠올렸다. 귀중한 연구 주제는 마탑에서 맡고 자잘한 부스러기는 자회사에 넘겨준다지만, 그래도 에셀의 이름이 붙어있는 회사였다.
싸움과 도둑질이 다른 영역이라도 움직임을 보면 대충 수준이 어떤지 보이는 법이다.
“어떻게 훔쳤죠?”
“뭔가 기분 나쁜 뉘앙스인데.”
“정말 신기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자기객관화를 해보세요. 정말 그곳의 보안을 뚫고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무시하지 마. 지금은 이렇게 붙잡혔지만, 내 기술은 굉장하다고.”
앨런의 말을 들은 테일러가 맞장구쳤다.
“듣고 보니 그렇네. 이렇게 띨띨한 녀석이 어떻게 보안을 뚫고 물건을 탈취했지? 디그리 연구소가 작긴 해도 내부가 엉망이라는 소문은 못 들었는데.”
“···.”
코니는 테일러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앨런의 말에만 꼬박꼬박 토를 다는 모습을 보면, 폭력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었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누군가의 손발이겠죠. 은신 특화 마도구를 받았을 수도 있겠네요. 내부자가 도와줬을 수도 있고요.”
“아니야!”
“아니라면 왜 미궁에 내려왔죠? 그것도 친구들을 데리고?”
“···.”
“일만 잘 해결하면 수배도 금방 풀어주겠다고 했나요? 아니면 두둑한 차명계좌를 지닌 채 다른 나라로 망명하게 도와준다고?”
계속 말대답하던 코니는 이번에는 침묵을 지켰다. 사건의 내막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를 맞힌 까닭이리라.
앨런은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보수 때문에 덜컥 일을 맡았지만, 도둑질에 성공하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이게 맞나? 이대로 물건을 바치면 정말 고이 보내줄까?”
“한마디로 쫄아서 도망쳤다는 말이군. 메이즈시티 밖으로 나가는 길은 감시 당하고,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면 남은 장소는 미궁뿐이지. 독 안에 든 쥐 신세긴 하지만, 독이 워낙 넓어야지. 잠잠해지면 슬쩍 나와서 탈출할 생각이었을걸.”
“저런···. 그렇다면 고민하지 말고 수녀님께 연락하시지. 그러면 친절하게 모시러 왔을 텐데요.”
코니는 앨런과 테일러가 말할 때는 잠자코 있다가, 시바가 한마디를 거들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거긴 죽어도 싫어.”
“정화봉사단에서 도대체 뭘 하길래 반응이 저래?”
“지은 죄를 씻어낼 뿐입니다. 대부분은 만족하며 평생을 그곳에서 일합니다.”
“만족은 개뿔. 뇌 아래에 폭탄 심어놓고 만족?”
“폭탄이라뇨. 어머님의 따끔한 훈육을 그런 폭력적인 물건에 비교하지 말아 주십시오. 훈육의 강도가 너무 세다 보니 봉사자분들께서 어머님의 곁으로 여행을 떠나긴 하지만요.”
“터지긴 터지잖아!”
시바의 능글맞은 태도에 코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정은 대충 알았으니 이제 코니의 처우를 결정할 차례였다.
“어차피 내려가려고 했으니 23층의 연구기지에 코니 씨를 팔면 되겠네요.”
“여기까지 소식이 전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회사가 얽혔으니 손 놓고 구경만 하진 않겠지.”
“잠깐!”
코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행동이나 표정으로 불쌍함을 최대한 표현하려는 듯했지만, 꽁꽁 묶인 상태라 애벌레처럼 꿈틀대기만 했다.
“26층에 친구들이 있어. 그냥 풀어주면 사례할게.”
“26층이면 구더기가 있던 장소네요.”
“구더기 말고 자유인이라고 불러줄래? 악!”
이번에는 앨런이 행동했다. 테일러가 나서기 전에 지팡이로 코니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전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왠지 코니 씨만 보면 있는 줄도 몰랐던 파괴 욕구가 끓어오르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니 에셀 마탑이 정보 통제를 잘했군요.”
“그게 무슨?”
“26층의 구더기는 몇 달 전에 쓸렸어요. 일부는 정화봉사단에 가입했죠.”
“몇 분은 벌써 어머님 곁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부럽지만 저는 아직 지상에서 할 일이 남았기에···.”
입을 벌리고 있던 코니가 시바의 말을 듣더니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
“하···. 정화봉사단은 싫은데···.”
“저도 지금 당장 지상으로 돌아가긴 싫습니다. 연구기지가 있는데 뭐하러 위로 올라갑니까?”
“거긴 더 싫어.”
물론 코니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앨런은 코니와 습격자 2명을 줄줄이 엮어서 상자 뒤에 매달았다. 마치 노예 상인의 행렬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나가던 탐험대가 그 모습을 보고 구더기로 착각한 일도 있었지만, 시바가 나서서 모신교 특유의 기운을 보여주자 오해는 금방 풀렸다.
그렇게 도착한 23층의 연구기지. 그동안 물만 줘서 코니와 습격자들의 얼굴은 홀쭉했다. 호랑이 굴임에도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말만 연구기지고 요새처럼 생긴 건축물 앞에 다다르자, 문 앞 경비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마법사 하나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앨런의 바로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로렌조 님의 의뢰를 받았던 탐험가들이군.”
몇 달이 흘렀으니 잊을 법도 하건만, 원체 머리가 좋은 마법사라 그런지 기억하고 있었다.
“뒤에 묶어놓은 사람은?”
“디그리 마법연구소에서 무언가를 훔친 도둑들입니다.”
“아, 잠시···.”
다시 초소로 올라갔던 마법사는 몇 분 후에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로렌조 님이 보자고 하시는군.”
“알겠습니다.”
앨런이 순순히 말에 따르자, 문을 통과하던 테일러가 조용히 물었다.
“웬일로 귀찮다고 안 하네.”
“번거롭긴 한데 더 큰 보상을 얻으려면 윗사람 혹은 책임자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코니 씨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으니 다른 이득이라도 있어야죠.”
연구기지는 예전과 비슷했다.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공터에서 마법사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노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창의적인 생각은 자유에서 파생되고, 그러려면 획일화된 구조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다고 마법사들이 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에셀 마탑은 엄연히 회사. 성과를 낸 마법사에게는 더 큰 보상이 돌아가니, 저렇게 편해 보여도 뇌 속에서는 전기신호와 신경전달 물질이 범람하고 있으리라.
에셀 마탑주의 제자인 로렌조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앨런 일행을 맞이했다. 표정은 고요한데, 그의 푸른 머리는 불꽃처럼 사납게 느껴졌다.
“또 보게 됐군.”
“안녕하세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덕담이나 일상 언어와 거리가 멀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로렌조는 코니를 쳐다봤다. 맞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던 도둑은 사라지고, 맹수를 눈앞에 둔 토끼만 남았다.
“도둑이라···.”
“알고 계셨나요?”
“그래.”
로렌조가 마력 파장을 내뿜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마법사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코니와 친구들을 끌고 나갔다. 매직웨어 덕분인지 성인 3명을 쉽게 잡아당겼다.
로렌조가 팔꿈치를 책상에 올리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살짝 받쳤다.
“이번에도 일을 맡아볼 생각 있나?”
“다른···.”
“다른 사람 알아보라는 말은 하지 말고.”
앨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렌조가 선수를 쳤다.
“도둑의 몸값까지 더해서 후하게 보상하지.”
“왜 우리죠?”
“스승님에겐 제자가 여럿 있지. 나도 그중 하나고.”
로렌조가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개조한 테일러보다 키와 덩치가 작지만, 왠지 모르게 커 보였다.
“스승님은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으시지.”
“저번의 유물 사건도 비슷한 맥락이군요.”
“알고 있었나?”
“에셀 마탑의 연구자들을 습격해서 유물을 탈취하려는 집단이 있다면 마탑과 비슷한 덩치를 지녔겠죠. 아니면 내부에서 벌어지는 파벌싸움이든지. 구더기에게 마도구를 제공했던 사람은 제자 중 하나겠군요.”
“네 말이 맞다. 우리는 경쟁 관계고 더 위로 향하기 위해 무력충돌도 시도하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직원들을 경쟁으로 소모하지 말라는 지시겠죠?”
“독심술이라도 쓰나? 네 말대로 스승님은 외부의 무력을 포섭해서 경쟁하라고 하셨지. 그것도 능력이라고 하시면서.”
고용할 수 있는 무력의 수준도 정해져 있으리라. 제자보다 더 강한 사람을 고용하면 통제도 힘들고, 시험이라는 취지에도 어긋났다.
일단 로렌조부터 심도 5의 강자였다. 그보다 강하면 심도 6이라는 말인데, 그런 사람을 고용하는 일이 쉽겠는가. 고용해도 문제였다. 그 순간 경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살육전으로 변해버릴 테니까.
“이런 사실을 전부 말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가 이 일을 받으리라 생각하시나요?”
“난 마탑에서 나고 자라서 마법사들의 행동 원리를 잘 알아. 너 역시 그런 부류지. 이걸 보면 참여할 수밖에 없을 거다.”
로렌조가 그리 말하며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신문이었다. 목 뒤에 칩을 꽂으면 정보가 입력되고, 삼라만상에 접속하면 어디에서나 뉴스를 볼 수 있다지만, 여전히 옛 문물을 선호하는 사람은 있었다.
테일러 역시 약간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뒤쪽에 경마 정보가 있거든?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
“아저씨.”
“커흠. 그런데 신문은 왜? 잠깐, 뭐야?”
테일러가 입을 살짝 벌리며 앨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살짝 흔들었다.
“날짜 보여?”
“네. 오늘 신문이네요.”
시온이 전부 무시하고 23층까지 달려도 2~3일이 걸린다. 그런데 오늘의 날짜가 적힌 신문이 눈앞에 존재했다.
< 열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