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쇠(2) >
지상에서는 무슨 마법을 써도 상관없지만, 미궁 내에서 공간이동이나 단거리 점멸 같은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미궁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어진 규칙이며, 탐험가들의 머릿속에 박힌 상식이기도 했다.
다른 층에 마법으로 간섭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여서 수집가가 벌였던 일은 지금도 미궁 학계에서 뜨거운 논의 중 하나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신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정성스러운 장난을 친다기에는 로렌조의 이름과 직위가 무거웠다.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썼을까?’
바로 떠오르는 여러 경우의 수가 있긴 했다.
에셀 마탑주나 브레이커의 회장 같은 사람이 전력으로 이동한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0퍼센트에 수렴했다.
다음은 오직 속도에만 투자한 탐험가에게 배달을 부탁하는 것이다. 의족을 착용했거나 탈것을 사용하면 마석을 계속 갈아 끼우고, 육체수련자라면 회복약을 계속 먹으면 된다. 이런 경우에는 현실성이 좀 있지만.
‘길을 전부 외운 탐험가가 이른 새벽에 출발해도 밤늦게나 도착하겠지. 어쩌면 24시간을 전부 소모해도 모자랄 수도 있고. 게다가 나침반도 문제야.’
그런데 지금은 정오, 그러니까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하이퍼루프 열차가 있는 지상이라면 몰라도, 괴물이 출몰하고 지형이 복잡한 미궁을 그리 빠르게 주파할 수는 없었다.
미궁은 변화한다.
특이한 현상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정체 모를 오파츠도 나타난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소원의 조각이라는 괴상한 오파츠도 발견했었다.
그러니 꽉 막힌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볼 필요가 있었다.
“혹시 공간문을 열 방법을 찾았나요?”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혁명이었다. 시간은 돈이고, 또한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니까.
탐험가 중에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여정이 너무 지루하다고 미궁에서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앨런은 여정 속에서 공부하니 아무런 상관없지만, 그런 시간 자체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리라.
‘특히 실력이 뛰어날수록 그렇게 느끼겠지.’
1시간에 1만 코인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존재하면, 1억 코인의 사람도 있을 테니까.
앨런이 로렌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도, 그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
“공간문, 맞죠?”
“그전에 수락할지, 여기에서 나갈지 결정하면 좋겠군.”
앨런은 바로 도장을 찍고 싶은 심정이나 문제는.
‘시바.’
욕이 아니라 이름을 되뇌었을 뿐이다. 모신교의 수도승 시바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하려는 일은 탐험도 호위도 아니라, 마탑의 후계 구도 싸움에 한 발을 담그는 행위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로렌조의 의뢰는 도둑맞은 열쇠 되찾기고, 그 과정에서 상대측 피고용인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앨런이 조용히 있으니, 로렌조가 뒤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수도승이 있었군.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누군가를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이번 일도 제자 중 하나가 내가 맡은 사업체에 도둑을 보내서 발생했지. 아직도 고민 중인가?”
“네? 제가 고민을 왜 합니까? 도둑놈들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쪽에 고용되는 용병이나 탐험가도 대충 사정을 알면서 일할 테니, 그리 좋은 사람들도 아닐 테고요.”
앨런은 시바의 말을 듣고, 그를 설득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시바는 전투를 담당하는 수도승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선함이 남아있어도, 그 안에는 호전성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미궁을 내려가며 괴물들과 다투는 일에 거리낌이 없겠지.’
범죄는 나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한다. 시바는 이런 기조를 행동 원리로 삼았다.
일반인들이야 치안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억울함을 풀 수 있지만, 마력을 몸에 받아들인 초인들은 자력구제를 선호했다.
처음 불을 발견하던 시기부터, 달에 식민지를 건설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사실 자력구제가 아니면 온갖 신비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원한을 풀기도 힘들었다. 괜히 기업들이 무력 부대를 운영하겠는가.
그래도 선뜻 수락하는 모습을 보면, 모신교는 평범한 종교와 거리가 멀긴 했다. 사실 정화봉사단만 봐도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럼 결정됐군. 하겠나?”
“네.”
“공간문은 아니고 물질 전송이다. 40일 전쯤에 미궁 어딘가에서 유적 하나를 발견했지. 분명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층의 끝인데도 유적이 나타나더군.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
“정확히 언제 그리고 어디인가요?”
“그건 비밀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신비를 품고 있는 유적을 찾았다면 꼭꼭 숨겨둠이 당연했다. 로렌조가 도난 사실을 알고도 미궁에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로렌조가 말한 시기와 앨런이 얼음 미로에서 소원의 조각을 얻은 시점은 비슷했다.
‘조각을 살핀다고 너무 급하게 올라왔나? 자세히 살피며 복귀할걸···.’
운이 좋다면 최초 발견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앨런은 후회를 빠르게 씻어내고 로렌조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 유적에서 물질 전송의 단서를 발견했지. 지금은 작은 무생물만 가능하지만, 점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너라면 얼마나 큰 혁신인지 알겠지?”
“네.”
비행 마법으로 대륙 간 물류 이동이 가능해진 사건과 비견할 만했다. 공간문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활용하면 배보다 배꼽이 크니 논외고.
“맡기고자 하는 일은 열쇠의 회수다. 일을 잘 해결하면 유적을 조사할 권리를 주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가져가도 좋다.”
조사 자체가 굉장히 구미 당기는 제안이었다. 찾은 물건을 가져가도 된다는 말은 이미 찾을 만큼 찾았다는 의미지만, 앨런은 평범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그곳에도 미궁의 언어가 있겠지.’
앨런이 좋다고 말하기도 전에, 머리가 무의식적으로 위아래로 율동 했다.
“결단이 빨라서 좋군. 방금 말했다시피 해줄 일은 열쇠 찾기다. 도둑을 신문하는 중이니 지금은 편히 쉬고 있어라.”
앨런 일행은 저번에 묵었던 객실로 향했다. 원시림의 흙과 오토마톤의 기름을 씻어낸 테일러가 앨런의 방으로 들어왔다.
“미쳤네.”
“내려올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유적과 열쇠는 별개로 봐야겠지?”
“아마도 그렇겠죠. 미궁 내 물질 전송이라면 에셀 마탑주가 직접 관여해도 이상하진 않으니까요. 로렌조 씨는 책임자라 미궁에 머무르고 있군요.”
“에셀 마탑이 굉장한 발견을 했어. 덩치가 엄청나게 커지겠는데.”
“자기방어를 위해 다른 기업과 권리를 나눌 겁니다. 혼자 맛있는 걸 먹으면 공격당하지만, 같이 먹으면 맛을 본 사람들이 지키려고 노력하겠죠.”
“하긴.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어. 기왕이면 적보다는 친구를 만들어 두는 편이 좋지.”
혼자가 된 앨런은 침대에 누웠다. 하얀 천장을 보고 있으니 온갖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로렌조의 일을 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봉인이 풀리면 용을 찾아라]
물질 전송은 미궁과 지상을 연결하는 능력이었다. 용이나 드래곤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힘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로렌조가 발견한 유적에는 그들의 자취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약간의 단서를 얻기만 해도 좋았다.
앨런은 저녁을 먹고, 예전처럼 공터에서 마법사들을 구경하다가 로렌조의 부하가 건네는 기억수정을 받았다.
바로 방에 돌아가서 테일러와 시바를 불렀다. 기억수정을 단말기 역할을 하는 거미에 꽂자, 녀석의 카메라 아이에서 빛이 뿜어졌다.
에셀 마탑의 자회사 목록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테일러의 눈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부 경쟁은 피한다며? 지금 여기를 다 털라는 거야?”
“루미에 마탑주가 말하는 내부는 마탑만인 것 같네요. 보아하니 자회사는 제자들이 운영하는군요.”
“고독처럼 경쟁을 부추기네. 앨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적당한 경쟁은 개인의 성장을 촉진하지만, 너무 과하면 부작용이 크죠. 저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제자가 다음 마탑주가 될 텐데···.”
“자기 스승이랑 똑같아지겠지?”
“우리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죠.”
“그래도 생각은 해봐야지. 그만한 거인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세상이 변하는데.”
“우리도 그만큼 커지면 되죠.”
“형제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풍파는 자신을 연마하는 수단이니, 올곧은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될 겁니다.”
테일러 역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회사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홀로그램이 물방울처럼 일렁이더니, 목록 옆에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회사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열쇠가 있을 만한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지도였다.
“일이 상당히 빡빡하겠는데. 자회사가 이리 많은데 어느 세월에 뒤지냐?”
“다른 사람도 고용했을 겁니다.”
“어떻게 알아?”
앨런이 말 대신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이름의 색이 유독 연한 회사가 몇 개 있었는데, 그곳을 눌러도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도면이 있으면 우리의 몫, 아니면 다른 용병이 담당하겠죠.”
그렇게 해산하는 듯싶었으나, 밖으로 나가려던 테일러가 몸을 돌렸다.
“잠깐, 코니라는 도둑놈이 열쇠를 숨겼다며. 그런데 왜 갑자기 회사 목록을 주지?”
“이미 탐색했겠죠. 없으니까 있을 만한 장소를 물색해서 우리에게 줬고요.”
“어떻게?”
“물질 전송이요. 기억수정이나 메모지는 신문보다 작잖아요.”
“아, 그게 있었지. 머리가 굳었는지 그걸 까먹었네.”
“물질 전송은 지금까지 불가능했잖아요. 그게 상식으로 굳어져도 이상하진 않죠. 이제부터는 조금씩 바뀌겠지만.”
연구기지에서 밤을 보낸 앨런은 다시 지상으로 향했다. 공간문이 있으면 편하겠지만, 아직 거기까진 기대하기 어려웠다.
*
어두운 밤, 앨런 일행은 시외에 있는 공업단지로 향했다. 불 꺼진 공장도 있고, 여전히 대낮을 방불케 하는 공장도 있었다.
승합차 운전석은 테일러, 조수석은 시바, 뒷공간은 앨런이 차지했다. 좌석이 아니라 뒷공간이라 한 이유가 있었다.
온갖 장치가 뒷공간에 가득했고, 모든 케이블은 중앙에 반쯤 누워있는 앨런의 좌석과 연결된 상태였다.
테일러는 어두운 골목길에 주차하고 앨런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창문을 살짝 열고 도넛과 커피의 조합을 즐기고 있으니, 뒤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정찰은 끝났어?”
“네.”
앨런 일행이 목표로 삼은 다마스 공업은 매직웨어, 그중에서도 의족이나 의수 등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진짜 여기에 있을까? 로렌조는 이번 절도 사건을 구실로 삼아서 경쟁자를 공격하려는 게 아닐까?”
“그런 마음도 어느 정도 있겠죠.”
“그치?”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찰하고 나니 마음이 좀 바뀌었습니다.”
“왜?”
“원시림에서 싸웠던 화염 마법사 기억하시죠?”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셋을 상대했던 적이었다. 하마터면 미궁에 묻힐뻔한 날이기도 했고.
“보안요원과 마법사의 매직웨어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때 일을 벌였던 제자가 공장의 주인이란 말이네.”
“아마도요.”
“그럼 나도 때려야지. 한 번은 어찌어찌 참을 수 있지만, 두 번을 얻어맞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게 사람이야? 시바도 안 그러겠다.”
앨런이 왼쪽 눈에서 빛을 뿜어냈다. 허공에 빛이 모이며 입체적인 공장 모형을 만들었다.
“작은 곳은 자재 창고, 큰 곳에는 제작 설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기왕이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요.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요?”
앨런은 탐험가지 전쟁 용병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여럿 있다면 피를 적게 흘리는 방법이 좋았다.
“일단 거미를 보내려고요. 지상이라 신호가 강해서 정밀한 작업도 가능해요.”
“그럼 시작하자.”
콰앙!
테일러가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자재 창고에서 불과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조용히 처리한다며?”
“네. 보안요원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 겸, 마력선에 충격을 줘서 방어 마법을 뒤흔들 겸 폭발시켰죠. 어차피 안에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야, 저게 다 얼마냐?”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우리는 지금 로렌조 씨의 손발이니까요.”
“하긴 골머리 썩는 부분은 머리지.”
< 열쇠(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