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쇠(3) >
폭발과 함께 불이 붙은 자재 창고로 다마스 공업의 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무언가 구린 물건이 있는지, 소방서에 연락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화재를 진압하려고 애썼다.
테일러는 높은 담벼락 위로 솟아오르는 불길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앨런, 저게 조용한 처리니?”
“상대적인 의미죠. 시선이 분산되면 다른 시설의 경비는 허술해지니까요.”
앨런은 반쯤 눕는 의자에서 한쪽 눈만 뜨며 말했다.
“처음에는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매직웨어의 재료나 룬문자를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죽은 화염마법사와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
“네. 그때 우리는 도둑맞은 유물을 회수 중이었잖아요. 갑자기 공격당한 셈이라 좀 화가 나긴 했어요.”
“원한은 잊지 않는구나. 무서운 아이···.”
“아이라뇨. 저도 법적 성인이 된 지 벌써 1년쯤 지났습니다.”
앨런의 말에 무알코올 성수를 마시던 시바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무알코올인데도 화재가 뿜어내는 빛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형제님 생일이 언제였죠?”
“6월 아, 오늘이네요.”
“그럼 저건 축포라고 생각해도 되겠군요. 생일 축하합니다.”
테일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정상이 아니었다.
“어휴. 나라도 균형을 유지해야지.”
머리를 흔들고 있으니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6월 6일이지. 태어난 시간이 언제인지 물어···. 아니다. 그만두자.’
그 시각, 앨런이 부리는 거미는 환풍구 속을 사사삭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노박 클리닉에서도 장난감 쥐로 정찰을 했지.’
그때는 실시간 연결이 아니라 녹화된 영상으로 정보를 살폈다. 지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났다. 실력, 재산 그리고 자유.
폭탄 목걸이를 걸고 있을 때는 그 방법밖에 없어서 일단 시도했지만, 지금은 분쟁을 피하고자 잠입을 선택했다.
‘지식과 힘이 쌓일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져.’
그래서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큰 힘에는 큰 자유가 따르니까.
누군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앨런이 겪은 세상은 그런 법칙이 적용되었다.
거미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이럴 목적으로 다리에 붙여놓은 말랑말랑한 물질이 제 역할을 했다.
나중에 누군가가 환풍구 안쪽을 살펴보면 먼지에 찍힌 작은 자국이 남겠지만, 이미 탈출했을 테니 상관없었다. 아니면 먼지가 더 쌓여서 아예 모를 수도 있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 날개를 통해 내부를 살피자, 화재 현장으로 가는 직원들이 보였다. 보안요원 일부는 제 자리를 지켰다.
‘저게 당연하지.’
사고가 발생했다고 자리를 이탈하면 자격 실격이었다. 몇 명은 도우러 갈지라도 충분한 인원은 남아야 했다.
“굉장한 소리가 들리던데.”
“자재 창고에 화재가 발생했어.”
“또 누가 근처에서 담배 피웠나?”
“그건 나도 모르지. 혹시 모르니 점검이나 해.”
보안요원 중 한 명이 벽 근처의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서 시작된 신호가 어딘가로 향했고, 지하에서부터 마력의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뿜어졌다.
공장 전체를 커버하며, 낯선 기척이나 마력을 감지하면 경보를 울리는 장치였다.
거미가 제자리에 웅크리자, 배 부분이 약하게 빛났다. [은신]으로 기척을 줄이고, [복사]로 파장을 베끼고, [방출]로 자신이 가린 만큼 똑같은 양의 파장을 뿜어냈다.
“이상은 없어.”
“좋아. 이제 직접 돌아다니며 확인할 차례야.”
“왜 날 쳐다봐? 오늘은 네 차례야.”
“이런···.”
거미는 보안요원들을 지나쳐 더 깊은 장소로 향했다. 우선 사장실에 들러서 컴퓨터에 접속, 최신 정보나 결재 문서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툭
환풍구의 회전 날개를 조심스럽게 분리한 거미가 조용히 착지했다. 책상 아래로 뽈뽈 기어가서 결재용 단말기에 접속했지만.
“깨끗하네요.”
“앨런, 그게 무슨 소리니.”
앨런의 혼잣말에 테일러가 반응했다.
“사장의 단말기에 접속했는데, OTT 앱이나 유흥을 위한 프로그램만 깔려있어요.”
“혹시 근처에 비서실 있니?”
“네. 있어요.”
“그럼 비서의 단말기에 접속해봐라.”
환풍구로 쏙 들어간 거미는 회전 날개를 다시 조립하고, 바로 옆의 비서실로 향했다.
3개의 책상 중 가장 화려해 보이는 책상에 안착해서 단말기에 케이블을 꽂았다. 그 단말기에는 결재 문서가 잔뜩 있었다.
“오, 찾았어요.”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아마 서명 프로그램도 그 안에 깔려있을걸.”
“잘 아시네요.”
앨런은 잡담하면서도 거미를 조종해서 문서를 훑었다. 테일러 수련법을 깊이 파고들수록 동시에 2가지 일을 처리하기 쉬워졌다.
“뭐 좀 찾았니?”
“···이 문서 같네요.”
다른 문서는 전부 공장 운영에 관한 내용이지만, 가장 최근 목록에 좀 다른 문서가 끼어있었다.
“다마스테크로부터의 보안요원 파견 요청.”
그 외의 수상함은 찾을 수 없었다.
“딱 봐도 무언가를 지키려는 움직임 같지? 그러면 거기로 이동하자.”
“네.”
앨런은 거미를 회수했다. 담벼락을 넘어가기 전에 뒤를 쓱 바라보자, 아직도 불타고 있는 창고가 보였다.
“죽은 화염 마법사의 상사는 속 좀 쓰리겠네요.”
“속 시원하긴 한데, 경계를 강화하지 않을까?”
“어차피 다른 용병들도 활동을 시작해서 숨기려 해봐야 소용없을걸요. 이 공장의 소란으로 다른 곳의 시선이 분산되면 오히려 이득이죠.”
앨런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다마스테크로 향했다. 이름만 들어도 전에 털었던 공장과 소유주가 같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뇌 확장 장치를 제조하기에 당연히 정밀하고 비싼 설비가 가득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인지 아까보다 보안요원이 더 많았다.
다마스 공업보다 훨씬 두껍고 높은 담 위에는 자동 포탑이 즐비했고, 세탁기 크기의 데스아이 여럿이 감지 파장을 뿜어내며 순찰했다.
“형제님, 여기도 조용히 처리할 계획입니까?”
“이번에는 진짜로 조용히 진행할게요.”
아까와 달리 거미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담과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은 채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시작해.”
삐—
부유 장치로 근처 공장의 굴뚝에 올라간 상자가 답변했다. 녀석은 농구공 크기의 까만 구체를 자유투하듯이 던졌다.
공장과 다마스테크의 거리를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행위지만, 구체는 추락하지 않고 활공했다.
지금은 밤이어서 까만 구체를 맨눈으로 확인하긴 어려웠다. 보안요원보다 담 안쪽에서 순찰하던 데스아이가 먼저 발견했다.
은회색 구체가 부르르 떨더니 외장갑이 차르륵 접혔다. 그 자리에 나타난 큼지막한 렌즈가 하늘로 향했다.
삐이!
두두두!
경고음과 총성이 거의 동시에 들렸다. 수상함을 눈치챈 자동 포탑이 데스아이가 점찍은 부분을 향해 기관총탄을 쏘아댔다.
구체와 탄환이 부딪치자 불똥이 튀었다. 까만 밤하늘에 생긴 불똥은 부자연스러웠고, 당연히 눈에 띄었다.
“습격이다!”
누군가가 외침과 동시에 상자가 쏘아낸 구체가 파란빛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마치 미러볼처럼 무작위가 아니라, 필요한 장소만 딱딱 비췄다.
처음에 발포하던 포탑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담 위의 포탑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작동이 정지되었다.
상자가 던진 구체는 거대한 마나 펄스 수류탄이었다. 강력한 파장을 빛의 형태로 뿜어내서, 기계 내부의 마력 회로를 망가트렸다.
물론 공격에는 방어할 수단도 존재하는 법. 차폐기술이 적용된 데스아이는 동체를 부르르 떨기만 했다.
포탑이 침묵하자, 데스아이가 움직였다. 구체를 응시하던 카메라가 붉게 물들었다. 그 주위로 막대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어서 처리···해···?”
응원하던 보안요원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데스아이가 쏘아낸 강한 광선이 수상한 구체를 파괴해야 하는데.
끼이잉
데스아이가 기묘한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보안요원의 시점에서는 볼 수 없지만, 데스아이의 뒤에는 거미 하나가 달라붙어 있었다.
“원격 해킹이 어려우면 접촉하면 되죠.”
“거미도 너랑 떨어져 있으니 원격 해킹이잖아.”
“거미는 수족이니 약간 다릅니다.”
“흠, 그래서 다음은?”
테일러와 시바는 정찰 거미 하나가 보내오는 화면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담벼락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거미들은 풀밭, 파이프, 아스팔트 등을 가로지르며 구석구석 퍼졌다.
경보를 접한 보안요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기! 왼쪽!”
어떤 사람이 가리킨 곳에는 바닥을 빠르게 기어 다니는 거미가 있었다. 무광 코팅만 봐도 불순한 의도를 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처리···해···.”
보안요원의 말이 점점 느려지더니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힘이 빠진 육체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의 입가 근처에 있는 풀이 호흡에 따라 움직였다.
팝콘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테일러가 질문했다.
“오. 저건 뭐냐?”
“당연히 거미죠.”
“그거 말고. 어떤 룬문자를 썼냐고.”
“[수면]과 [기절]이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효과가 강한데.”
“아저씨가 예전에 늪지대에서 독초에 관해 알려줬잖아요. 그중에 수면 성분이 있는 식물과 버섯을 조합해서 가스로 만들었죠. 화면으로는 안 잡히지만, 저곳에는 가스가 가득할 거예요.”
테일러는 다시 화면 속의 거미들을 쳐다봤다. 화면으로 보니 개미 같았지만, 어쨌든 움직임 자체는 보였다.
“그러니까 배속에 수면 가스를 담고 다닌다는 뜻이지? 식물학도 연구했니? 효과가 생각보다 강하네.”
“요화 사장님께 배웠죠.”
“누님이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닌데···.”
“사실 페어리가 알려줬어요. 좋은 꿀을 주니까 술술 말해주던데요.”
“언제 군기 한 번 잡으라고 말해야겠다. 이번에도 마트에서 샀니?”
“아뇨. 파괴자랑 달리 비싼 꿀만 찾더라고요.”
“그 사람은 오랫동안 단맛을 못 봐서 그래. 페어리는 화원에서 좋은 꿀만 먹잖아. 그 차이지.”
공장 구석구석으로 퍼진 거미들은 [수면] 파장으로 마력을 흔들고, 가스까지 살포하며 사람들의 꿈나라로 인도했다. 그야말로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수법이었다.
“아까도 이 방법을 쓰지 그랬니? 훨씬 보기 좋네.”
“예전 일을 떠올리니 약간 화가 나서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앨런이 부리는 거미의 숫자는 많았고, 아예 대놓고 돌아다니니 아까보다 정찰 속도가 빨랐다. 잠에 빠진 보안요원들의 몸 위도 거침없이 기어 다니며 다마스테크를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연구실에서 열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미는 현미경이 올려진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연구원을 치우고 열쇠를 꺼냈다.
“평범한 은색 열쇠처럼 생겼네. 밋밋하잖아.”
하지만 앨런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열쇠에 새겨진 작은 글자는 미궁의 언어라서 당연히 테일러와 시바에게 안 보였다.
거기에 적힌 글귀는 이랬다.
[광휘를 가릴 장막을 내려주소서]
수집가 덕분에 발견했던 글귀와는 완전히 달랐다.
광휘를 가릴 장막을 내려주소서.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
누가 들어도 차이가 명확했다. 앨런은 문구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보려고 했지만, 지금 아는 사실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주술적인 의미? 아니면···.’
콰앙!
앨런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밴 앞부분에 무언가가 떨어지더니, 아스팔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에 얻어맞은 앞 유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겼다.
테일러는 충격을 감지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떨어져 내린 무언가는 사람이었다.
< 열쇠(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