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2) >
옛날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근위병을 쓰러트리고 문을 통과하자, 그의 몸에 빙의되었다.
앨런은 20층의 궁전이 멀쩡했던 시절을 목격했다. 위에는 동굴 천장이 아니라 맑은 하늘이 존재했고, 건물은 더러움 하나 없이 반짝였다.
‘그 시절, 그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빙의 혹은 환상이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다. 좀 더 길었다면 생활상이 어떤지, 혹은 지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목격했으리라.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미궁을 창조한 존재의 장난이 아니라면.
‘진짜 실존하던 장소가 아니라면 슬프겠지.’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미궁의 창조자에게 놀아나는 꼴이니까. 허상이라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내려가는 탐험가의 노력과 학자들이 밤을 새우는 노고는 허상으로 변할 것이다.
앨런은 생각을 접고 꿈에 집중했다.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고급스러운 주택 내부로 추정되는 장소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정원엔 잔디가 깔려있고, 정체 모를 동물 몇 마리가 뛰어다녔다.
‘사람, 아니 지하인과 친근해 보이네. 애완동물이겠어.’
앨런의 고개, 정확히 말하면 빙의한 존재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다. 방의 내부 구조는 현재와 비슷했다. 당연히 가구도 흡사했다.
닮은 육체 형태가 추구하는 편리함이 비슷하게 수렴한 결과이리라. 지하인은 키만 클 뿐, 두 팔, 두 다리, 두 눈 등 현대의 사람과 똑같았다.
‘손이 크고 두껍네. 남자일 확률이 높겠어.’
남자는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서 한쪽을 쳐다봤다. 안방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문이 열리더니, 단아한 외모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지하인답게 신체가 길쭉길쭉한 여성은 남자를 보더니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둘은 천천히 걸어갔다. 복도에 뚫린 창문을 통해 햇빛이 쏟아졌다. 뚜렷한 광선을 지날 때마다 온기가 피부까지 전해졌다.
‘어느 정도 감각 공유도 되는구나. 저번보다 깊은 현상이야. 고통이 너무 심하면 내 정신도 피해를 입으려나?’
앨런이 생각에 빠져있으니, 두 남녀는 긴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에 도착했다. 문에는 흉포하게 생긴 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사방으로 불을 뿜고 있었다.
물론 앨런의 감상일 뿐, 이 시대의 사람들은 멋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문 안쪽에는 고급스러움으로 가득 찬 식당이 있었다. 천장과 벽에 뚫린 창문이 햇빛을 받아 사방으로 반사했고, 덕분에 내부는 굉장히 밝았다.
고풍스러운 원목 식탁 위에는 섬세한 정성이 느껴지는 식기가 있었다. 식탁의 나무는 살아있는지 가지와 싹이 돋아있었다. 남녀가 자리에 앉자, 가지가 스르르 움직이며 음식을 운반했다.
식탁 맞은편에는 딸로 추정되는 어린 지하인이 앉아있었는데, 사용인이 옆에서 식사를 도왔다.
‘어?’
앨런은 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붉은 눈동자에 야생성이 담기고, 찰랑거리는 검은 단발이 덥수룩하고 더럽게 변한다면.
‘알파잖아.’
곰 가죽을 뒤집어쓴 소녀, 알파와 쌍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미궁이 연계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인이겠지.’
지금 앨런이 보는 알파는 1~2년은 더 어려 보였다. 수저를 잘못 놀려서 음식물이 턱받이와 얼굴에 튀면, 사용인이 정성스럽게 닦아줬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사랑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알파를 보다가 남자에게도 향했다.
서로의 입이 열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마주 보고 웃었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앨런이 여인의 눈동자를 통해 남자의 모습을 살피려는 순간,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주변의 풍경이 확확 바뀌었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여인의 입술과 알파의 이마에 뽀뽀하고, 정원에 내려앉은 비행선에 탑승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표현은 이렇게 했지만, 1~2초 정도만 지났다. 시야가 정상적으로 되돌아오자, 어떤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전신 거울이었다. 앨런이 빙의한 남자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장년의 외모에는 강직함이 묻어있고, 제복은 군인을 연상케 했다.
‘이 사람 역시 붉은 눈에 검은 머리.’
본모습을 보기 전에는 파괴자라는 추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싹 사라졌다. 색만 같을 뿐, 외모는 달랐다.
남자는 거울을 보며 심호흡했다. 단련된 몸을 통해 마력 수련을 상당히 깊이 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도,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남자는 길고 천장이 높은 복도를 걸었다. 조각상이 주르르 늘어서 있었는데, 원시림의 생물이나 현재도 볼 수 있는 몬스터를 모습을 본떴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네.’
남자의 시선을 따라 조각상을 지켜보던 앨런의 추측이 거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추상적인 마법진이 표면에 그려져 있었고, 마력 회로를 따라 푸른빛이 번쩍였다. 때로는 마석이 끼워져있기도 했다.
조각상은 전부 골렘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방어와 공격이리라. 아니면 주인의 취미일 수도 있고.
남자의 발걸음은 커다란 문 앞에서 멈췄다. 여기에는 조각상 대신, 큼지막한 파워슈트를 입은 지하인 경비가 있었다.
‘덩치와 에너지 생성 기관의 크기는 보통 비례하니, 출력이 어마어마하겠지.’
경비들은 남자를 보고도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만큼이나 거대한 방이 있었다. 단순한 거대함이 아니었다. 푸른 귀부인이 똬리를 틀어도 될 정도였다.
남자는 방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원형의 연못이 있었는데,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물 대신 펄펄 끓는 용암이 담겨있었으니까.
그 안에 누군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남자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용암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피부로는 서늘함만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의 옆모습이 보였다. 남자 혹은 여자, 아이 혹은 노인. 외모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눈을 뜨자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보였다. 그것만은 형상이 고정되었다.
“무슨 일이지?”
누군가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그러나 앨런이 빙의한 남자에게서는 어떠한 소리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내 허락을 구한단 말이냐?”
누군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남자가 바짝 엎드렸다. 당연히 앨런에게도 바닥만 보였다.
“고개를 들어라.”
남자가 상체만 조금 들어 올리자, 누군가의 다리가 보였다. 찬란한 붉은색 비늘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수인? 설마 용인가?’
용이나 드래곤이라면 꽤 높은 지위로 예상되는 남자가 쩔쩔매는 이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음? 무언가를 달고 왔군.”
누군가가 손을 뻗자, 강력한 기운이 앨런을 옥죄었다. 앨런이 마력을 운용해도 사슬은 더욱 강하게 꿈틀거렸다.
“신기하구나. 도대체 뭐지?”
세로 동공 점점 가까워졌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남자의 몸이 두둥실 뜨더니 누군가의 방향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앨런은 자신의 마력을 자극했다. 평소에는 몸이 상할까 봐 가만히 두는 편이지만, 필요하다면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돼 있었다.
‘빙의가 아닌가? 왜 마력이 움직이지?’
지금 상황에서 그런 고민은 사치였다. 앨런이 막아놨던 댐을 열자 마력이 쏟아졌다. 대범람이었다. 앨런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마력의 방향을 조금씩 트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긴 했다. 앨런이 아니었다면 조절조차 못 하고 몸이 터져나갔을 테니까.
앨런은 범람을 이용해서 정체 모를 사슬을 강하게 때렸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그래도 모자라면 다시.
“호?”
누군가가 짧은 감탄을 내뱉는 사이, 앨런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여전히 정신은 남자의 안에 있어서 어디로 달아나진 못했지만.
“허. 도대체 뭐지?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구나.”
남자가 무언가를 말하자, 누군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신경 쓸 것 없다. 큐브 간수나 잘하거라.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구나.”
세로 동공이 남자를, 아니, 그 안에 있는 앨런을 노려봤다.
“내 속박에서 그리 쉽게 벗어난 이유가 있겠지. 너, 다른 시간대의 존재구나. 도대체 어떤 방법인지 모르겠군.”
다시 남자가 말했다. 누군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다. 왜 다른 시간대에서 넘어왔겠느냐?. 저것이야말로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다. 저항군? 오히려 그런 것이라도 있어야 즐겁지 않겠느냐?”
앨런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괴상한 방과 수상한 사람은 사라지고, 어두운 텐트만 보였다. 구석에는 상자와 표범이 몸을 딱 붙이고 있었다.
표범이 주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더 쉬어.”
앨런은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저항군? 아니, 틀렸어.’
누군가가 그 시간대로 보낸 게 아니라 미궁의 신비한 작용이 앨런을 이끌었다. 애초에 지금 세상에는 지하인이라고 할만한 존재가 아예 없었다.
‘아니지. 파괴자가 있구나. 그럼 더 있을 가능성이···.’
어떤 지하인은 파괴자처럼 모습을 감췄을 수도, 어떤 지하인은 외모를 바꾸고 생활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대기업이나 정부가 마련한 지하실에 갇혀있겠지.’
영혼석은 오직 미궁에서만 나왔다.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온전한 성능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무언가가 약간 부족한데, 먼지보다 작은 차이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제작 기술을 알고 있는 지하인이 잡혔다면, 진작에 시장이 요동쳤겠지.’
눈을 감고 있으니 어수선한 분위기 느껴졌다. 의미 모를 누군가의 고함이 텐트를 뚫고 들려왔다.
앨런은 룬문자로 방음 텐트를 제작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외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바로 나가서 대처해야 하니까.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텐트가 열리며 테일러의 머리가 쑥 들어왔다.
“깼구나. 너도 얼른 나와봐라.”
“무슨 일이에요?”
앨런이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표범과 상자도 졸졸 따라왔다. 테일러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지금 일어났어.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지만.”
“···?”
“아마 유적에 다른 무리가 들어왔겠지.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겠어? 큰소리를 칠 테고, 상대도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받아치겠지.”
테일러의 말대로 마법사들과 새로 나타난 무리가 유적 입구에서 대치 중이었다.
“여긴 우리가 선점했다. 돌아가.”
“누구 마음대로? 로렌조가 시키면 우리가 그대로 따를 줄 알아?”
“로렌조 님이라고 불러. 다마스 님이 그렇게 가르쳤나?”
이름만 들어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다마스 공업, 다마스 테크. 로렌조와 대립 중인 제자의 부하들이 유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입장한 것이다.
“다시 말한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
“안 가면? 마탑주 루미에 님의 명령을 어기고 공격이라도 할 생각인가?”
로렌조의 밑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이 인상을 썼다. 물론 그게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였으면 바로 선빵 갈겼다. 저걸 참아?”
“탐험가보다 마법사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는 증거겠죠. 생각보다 마탑주의 영향력이 강한가 보네요. 미궁에서도 명령을 꼬박꼬박 듣고.”
“너도 제이크 봤으면 알잖아. 그런 사람이 지시했는데 어길래?”
“필요하면요?”
“······. 너랑 달리 쟤들은 부하 직원이기도 하니까.”
앨런의 대답을 들은 테일러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로렌조의 부하들이 언짢은 표정으로 길을 터주고 있었다. 어차피 중요한 물건은 확보했으니 괜찮다는 판단으로 보였다.
< 꿈(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