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4) >
앨런은 그림자로 변한, 혹은 원래부터 그림자였을 둘을 바라봤다. 계속 자신을 유적 밖으로 데려가려 할 뿐, 적대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다시 파워슈트 안쪽의 보관함을 확인했다. 샅샅이 찾아봤는데도 넣어둔 큐브는 잡히지 않았다.
파워슈트는 앨런, 본인만 개방할 수 있고, 설령 누군가가 열려고 시도하면 그만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씻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입고 있었고, 그때도 세척할 겸 옆에 세워뒀다. 그러니 누군가가 훔쳐 갔다기보다는.
‘아직도 꿈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유적에 처음 왔을 때? 큐브를 처음 얻었을 때? 용을 처음 만났을 때?’
꿈을 통해 어떤 마법에 걸린 게 분명했다. 눈치를 못 챈 이유는 시전자가 까마득한 경지의 마법사거나, 꿈을 꾸는 사이에 당한 탓이리라.
‘강력한 마법사가 큐브를 원했다면 그냥 빼앗으면 될 일. 꿈이 문제군.’
앨런이 가만히 서 있자, 테일러와 시바를 흉내 낸 그림자가 재촉하며 몸을 당겼다.
“어서 빠져나가자.”
“형제님,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테일러. 지나치게 박식했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테일러는 마법공학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습득한 지식의 영역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시바.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지도 않았는데 각 잡힌 기도를 드렸다. 간경화에 걸려서 성수를 끊으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그럴 일 없으리라.
‘왜 나를 유적에서 내보내려 하는 걸까? 왜 큐브를 확인하려고 할 때 사건이 발생했을까?’
질질 끌려가던 파워슈트는 앨런이 마음먹자마자 못이라도 박힌 듯 멈춰 섰다.
일단 유적의 밖, 그러니까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장소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법사들도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도 본래의 색채를 잃고 까맣게 변했다. 유적 일부도 마법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지금 보니 검은 안개만 끼어있었다.
다시 테일러를 바라봤다. 박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자신의 꿈이고,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짜인 장소였다. 그러니 테일러의 입에서 논문의 내용이 술술 흘러나왔으리라.
‘지금은 꿈 자체가 용 혹은 유적에 의해 오염된 상태긴 하지만···.’
꿈을 깨트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언제까지고 적대적인 수작에 어울릴 수는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살이나 전투처럼 강한 충격과 흥분으로 뇌를 자극하면 됐다. 아직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 떠올리면 뇌에 정보가 없기에 알아서 꿈에 균열이 생기기도 했다.
자살은 당연히 금지였다. 미궁의 신비가 더해진 꿈이니, 여기에서 죽었다간 현실의 정신마저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었다.
‘저주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자.’
언제부터 꿈이었는지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가장 의심되는 순간은 꿈속에서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용을 만났을 때였다.
그렇다면 다마스의 부하들이 유적에 왔던 일도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하긴, 적대적인 무리가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데 마탑주의 명령이 있다 해도 얌전히 길을 터줄 리가 없지.’
마법사 역시 지식에 목마른 존재. 누군가가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짜증이 솟구치고,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면 양보라는 단어를 잠시 잊어버리는 부류였다.
앨런이 계속 가만히 있으니, 테일러, 아니, 그림자들 전부가 앨런을 노려봤다. 오직 앨런만이 이곳에서 뚜렷한 색채를 지녔다.
그림자들의 눈과 입이 있어야 할 장소는 훨씬 새까매서, 그곳을 지켜보면 빨려들듯 한 기분이 들었다.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일렁거리자, 기괴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알았지?]
“이 수법에는 대상의 정신을 흐리는 작용도 포함되어 있죠? 그러니 아저씨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도 눈치를 못 챘죠. 그래도 괴리가 너무 심하더군요. 부족한 부분은 대상의 기억이 알아서 채워 넣게 하는 기법을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겠죠.”
“···.”
길고 따끔한 첨언에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용하지. 이번엔 다를 것이다.]
세계가 점점 흐려졌다. 꿈을 되돌려서 앨런을 다시 가두고자 하려는 시도 같았다.
하지만 앨런은 이미 자신이 꿈속에 갇혔음을 인지했다. 미지는 공포를 불러오지만, 원인을 알았다면 공포를 몰아낼 대처법을 세울 수 있었다.
전부가 거짓인 세상에서는 자신만을 믿어야 했다.
‘나를 중심으로 삼는다.’
마력과다증의 육신은 저주받았지만, 마법저항력만은 타고났다. 동시에 테일러 수련법으로 뇌까지 강화하니, 정신력도 덩달아 성장했다. 동방대륙의 표현으로 치면 상단전이 커진 것이다.
세계가 점점 흔들리며 사물이 흐릿하게 변했다. 먼지로 변해서 마구잡이로 휘날리기도 했다.
앨런의 정신이 거센 파도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면 꿈이란 사실을 잊고 무언가가 원하는 대로 휘둘릴 공산이 컸다.
쿠구궁!
이제는 지면마저 으르렁거렸다. 건물에서 시작된 균열이 사방으로 뻗쳐나가더니 앨런의 발밑까지 도달했다.
균열이 입을 쩍 벌리고 앨런을 집어삼켰다. 몸이 계속, 끝없이, 내내 추락했다.
낙하가 길어질수록 몸을 보호하던 파워슈트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외장갑이 사라지고, 인공 근육이 찢기고, 강화골격마저 바스러졌다.
마침내 몸뚱이가 외부에 노출되었다. 든든한 파워슈트가 사라졌으니 육체도 위험에 처했지만, 신기하게도 멀쩡했다.
원인은 미간에서 뿜어지는 빛. 균열이 뻗은 손길을 모조리 쳐냈다.
앨런은 묵직한 닻을 상상했다.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자마자,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풍랑 아래로 내렸다.
‘성공.’
동시에 세상이 휩쓸렸다.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테일러가 야전 침상 머리 쪽에서 어깨를 흔들었다.
“잠이 덜 깼나. 내가 공부는 적당히 하고 일찍 자라고 했지? 늦게 자면 종일 피곤해. 기다릴 테니 나와라.”
앨런은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폭풍 속에서 정신의 닻을 무사히 내렸고, 덕분에 그곳이 꿈이었다는 기억이 남았다.
방금 봤던 테일러는 평소와 똑같았다.
‘이곳은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기억 보호에 성공했으니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일어나서 유적으로 향하는데, 다마스의 부하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이곳에 도착한 일이 없었다.
덕분에 로렌조의 부하들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유적을 바삐 돌아다녔다. 마법사에게 이곳은 천국 그 자체였다.
앨런도 똑같았지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천국을 만끽하긴 어려웠다. 우선 첫날에 했던 대로 움직였다.
“아저씨, 저 글자 보여요?”
“무슨 글자?”
“지휘관실이라고 적혀있어요.”
앨런은 지휘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벽화를 힐끔 바라보고, 책상과 책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네요.”
“마법사들이 벌써 털어갔겠지.”
다시 벽화를 관찰했다. 틀린 그림을 찾는 놀이처럼 샅샅이 뒤졌다.
‘여긴 나의 꿈이야. 분명 저주의 핵이 어딘가에 있겠지.’
첫날처럼 미간에 빛을 모아서 벽화를 비췄지만, 큐브가 톡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안경 마법사가 거래를 제안하러 오지도 않았다.
앨런은 테일러와 시바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사이, 작은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손가락에 마력을 모아서 칼날을 만들고, 책상 아랫부분에 흔적을 만들려는 순간.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테일러가 야전 침상 머리 쪽에서 어깨를 흔들었다.
“기다릴 테니 나와라.”
테일러가 다시 텐트 밖으로 나가고, 앨런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방금 잠에서 깨어난 사람을 연기했다.
‘어떻게 알았지?’
정신의 닻을 내리는 데 성공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휩쓸릴 뻔했다. 저주도 성장했기에 균열도 없이 꿈을 되돌린 것이다.
앨런은 똑같이 행동했다. 지휘관실에 갔다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일행과 잠시 멀어졌다. 이번에도 흔적을 남기려 하니.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테일러가 야전 침상 머리 쪽에서 어깨를 흔들었다.
“기다릴 테니 나와라.”
꿈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앨런은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이대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생각인가? 재밌네.’
다시 지휘관실로 향했다. 테일러와 시바 그리고 상자와 표범. 모두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다. 이번에도 때를 기다리다가 흔적을 남길 최적의 상황을 포착했다.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테일러가 야전 침상 머리 쪽에서 어깨를 흔들었다.
“기다릴 테니 나와라.”
침대에 걸터앉은 앨런은 속으로 웃었다.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계속 같은 장면을 빙빙 반복했다. 기억을 유지하고 나서 벌써 3번이나 당했다.
‘꿈 전체가 나를 감시하나?’
그랬으면 번거롭게 되돌릴 필요도 없었다. 꿈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의미는 정신도 가둘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앨런은 감시자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감시자는 앨런이 하려는 수작을 눈치채고 꿈을 되돌렸다.
‘감시하기 쉬운 위치. 게다가 어디에나 따라다녀야 하지.’
앨런의 눈이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발밑의 그림자는 주인처럼 앉아있는 형상이었다.
범인은 대충 알았으니 꿈을 어떻게 되돌리는지 파악할 시간이었다. 앨런은 계속 흔적을 남기려고 시도했고, 그럴 때마다 테일러가 깨우러 들어왔다.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역시 꿈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네요.”
반복.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꿈도 결국은 정신의 작용이죠. 지각 능력과 인지 능력이 높으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요.”
또 반복.
“앨런, 일어날 시간이야.”
“중요한 건 상상이죠.”
다시 반복.
그러나 이번에는 테일러가 텐트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앨런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렇지?”
“그래서 뭘 할 수 있지?”
그림자는 똑같은 자세로 앨런의 맞은편에 앉았다. 숨을 쉬는 자세도, 팔의 위치도, 목의 흔들림도 모두 따라 했다. 앨런이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살짝 벌렸다.
“아, 내 정신을 파괴하고 육체를 가로채려고 했구나?”
“정신은 유한하지. 무한하다는 건 착각이다.”
“깎아내려고 했으면 차라리 공장 노동하는 아이로 만들어서 지루하게 했어야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 경험하고 싶은데, 그러면 아저씨랑 시바 씨가 걱정하겠지.”
“···.”
그림자는 말없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앨런은 그가 계속 꿈을 되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텐트 밖만 시간이 되돌아갔다.
“어떻게?”
“꿈의 주인은 나니까. 막상 꿈을 꾸면 통제하기 힘들어 보여도 익숙해지면 다르지. 지각과 인지 그리고 상상.”
그림자의 발밑에서 그림자 촉수가 솟구치더니 녀석의 몸을 꽁꽁 묶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림자가 말했다.
“재밌는 짓을 하는군.”
“내가 더 재밌어질 예정이야. 네가 무엇인지 알아볼 시간이지.”
앨런이 다가가자 그림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꼭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다가오지 마라.”
“내 그림자잖아. 나한테 붙어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앨런의 손가락에서 푸른 칼날이 솟아올랐다. 여긴 꿈속. 마력 대신 정신력이 빠르게 소모됨을 느꼈다. 그러니 작업은 빠를수록 좋았다.
“그림자도 고통을 느끼나?”
*
앨런은 눈을 떴다. 몸, 아니 정신이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앨런! 일어났냐!”
“네.”
앨런은 밖에서 들려오는 테일러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꿈속 공기보다 훨씬 상큼했다.
평화로운 행동을 보이다가, 손가락에 칼날을 만들고 기습적으로 그림자를 찔렀다.
삐?
상자의 카메라 아이가 주인을 요모조모 살폈다. 갑자기 왜 저러나 궁금하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앨런은 상자의 집게발을 쳐내는 표범을 보다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제대로 잡혔다.
까맣던 큐브는 새하얗게 변했다. 소원의 조각을 정화했을 때처럼.
‘조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번 일로 다른 성과를 얻었다. 꿈속에 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아직은 작지만, 꿈속이니 밤새 책을 읽어도 테일러가 잔소리하러 따라올 수 없었다.
< 꿈(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