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1) >
평소와 똑같은 아침 식사 시간, 앨런은 천천히 눈을 뜨다가 텐트로 얼굴을 쏙 들이미는 테일러를 발견했다.
“앨런, 요즘은 오래 자는구나. 아니, 오래도 아니지. 마력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도 6시간은 누워야 해.”
“원래 그 정도 잤습니다.”
“눈만 감고 있다고 자는 건 아니지. 안 자고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걸 내가 모를 줄 아는 거냐? 이럴 때일수록 많이 자둬야 해.”
군사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은 마법사들이 우글거리고, 괴물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침번을 설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수면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마법사들은 경비를 철저히 섰다. 편하게 생활하는 앨런 일행을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나, 일단 로렌조의 손님이니 조심스럽게 대하긴 했다.
“어쨌든 오래 자니 상쾌하지?”
“네.”
테일러는 앨런이 꿈의 도서관을 차렸다는 사실은 몰랐다.
‘특별한 능력은 아니지. 꿈의 저주를 분석하다 보니 자각몽이 뚜렷해졌을 뿐.’
그렇다 보니 꿈에서 본 책에 적힌 내용이 왜곡되었는지 아닌지 깨어난 후에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앨런은 복습이라 생각하고 기쁘게 받아들였고, 지금까지는 틀린 적이 없었다.
앨런은 저주에 관한 내용도 비밀로 할 예정이었다. 테일러에게 말했다간 걱정할 테고, 비밀을 만들어둬야 나중에 비슷한 일을 겪을 때 활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휘관실에서 얻은 큐브였다. 저주를 깨트리자 사라진 검은 아지랑이는 그것이 악몽에 빠트렸던 원천이었음을 의미했다.
앨런은 큐브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차피 텐트 안이라 볼 사람도 없고, 큐브 자체는 외부로 어떠한 기운도 뿜어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얀 블록 장난감이라 하겠지.’
상자가 아침 식사를 쟁반에 얹어서 가져오고, 밖에서 음식을 준비했던 시바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형제님.”
“네.”
“그···, 색깔이···.”
“변했죠.”
“혹시 저번처럼 소원의 조각입니까? 그렇다면 정말 위험한 물건입니다.”
“아뇨. 다릅니다.”
앨런의 느낌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위대한 마법공학자 카탄의 기술이 담긴 왼쪽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소원의 조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태풍이라면, 큐브는 고요한 산 같았다. 안에 담긴 기운의 흐름을 자연에 빗댄다면.
또 다른 차이가 있었으니, 그건 각각을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이다. 소원의 조각이 불길했다면, 큐브는 밤하늘을 보는 듯했다.
굳이 비교하면, 앨런이 되찾은 열쇠가 품은 기운이 정화 전 소원의 조각과 비슷했다.
‘열쇠와 큐브가 같은 시설에 있었으니 서로 비슷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왜 소원의 조각과···.’
앨런이 고민하고 있으니 테일러가 밥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식기를 두드렸고, 시바는 하얗게 변한 큐브를 지긋이 바라봤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검은색이었는데 사라져서 아쉽게 됐습니다.”
“···.”
앨런은 악몽을 언급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대신 밥을 먹으며 용이 언급했던 큐브에 무슨 능력이 담겼을지 궁리했다. 물론 세월 혹은 미궁의 신비가 큐브에 간섭해서 내용물을 뒤바꾸어 놨을 확률도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미궁은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 내려주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해결책에 도달하는 길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돌파구가 존재하긴 했다.
‘저주의 시전자는 용, 아니면 미궁?’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밑을 보니 포크가 빈 그릇을 두드렸다. 어느새 음식을 깨끗하게 비운 것이다.
슬슬 뒷정리하려고 텐트 밖으로 나가니,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법사들이 보였다. 유적 입구에 있는 검은 안개 속에서 로렌조가 이끄는 무리가 나타나자 어수선함이 더욱 심해졌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로렌조를 따라 군사시설로 들어가려 했지만, 입구에 자리 잡은 호위에 의해 막혔다.
“심정을 알겠는데 좀 참읍시다. 진리의 탐구자이자 고고한 이성을 지닌 존재들이 이렇게 행동하면 되겠습니까?”
“그럼 너나 꺼져!”
“그래. 난 들어가야겠으니 당신이나 참아!”
거센 반발이 돌아오자, 호위가 인상을 찌푸렸다.
“좋게 말하려 해도···. 로렌조 님의 명령입니다. 대기하세요. 뭐 합니까? 어서 해산하고 각자의 일을 하세요.”
로렌조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법사면서도 육탄 돌격을 감행하려던 사람들이 몸을 돌렸다. 시선은 발걸음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군사시설을 계속 주시했다.
텐트에서 막 나온 테일러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로렌조 씨가 직접 온 걸 보면 꽤 중요한 일인 듯합니다.”
“아, 그건가? 며칠 전에 새로운 지하층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
“왜 안 말해줬냐는 표정 짓지 마라. 난 분명 알려줬어.”
“언제요?”
“네가 어제 파워슈트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집중하느라 못 들었겠지. 어차피 미리 알았어도 마법사들이 통제해서 못 들어갔을걸.”
“아쉽네요. 먼저 발견했으면 다 우리 건데.”
“지상층을 중심으로 움직였으니 어쩔 수 없지. 어디 가니? 구경하러 가려고?”
“네.”
앨런이 군사시설 입구에 도착하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호위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기다리라고···. 음, 우리 소속이 아니군.”
“열쇠 찾아온 탐험가들이잖아.”
동료의 설명에 그제야 호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무슨 일이지?”
“당연히 유적조사죠.”
“로렌조 님의 명령으로 입장은 잠시 보류다. 너희는 우리 소속이 아니고, 로렌조 님과의 거래로 조사권을 얻었겠지만, 이번만은 기다려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포기···라는 단어는 앨런의 사전에 없었다. 입구 앞에 앉아서 철판에 룬문자 그리는 연습을 했다.
외적으로는 각도, 굵기, 크기에 따라, 내적으로는 심상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기에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앨런이 자리를 잡으니, 눈치를 보던 마법사들도 하나둘 뒤에 붙기 시작했다. 경비를 서는 인원을 빼면 거의 다 왔다고 해도 좋았다.
“아니, 이게 무슨···.”
블랙프라이데이를 노린 손님들 같은 모습에 호위가 당황하며 입을 떡 벌렸지만, 집중하는 앨런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앨런의 발밑에 있는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듣고 있나?”
앨런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에 칼날을 생성해서 그림자를 찔렀다.
“무슨 짓이지?”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더니 마법사의 형상을 취했다. 저번에 지상에서 봤던 마법사였다.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마법사님도 이런 경험 있으시죠?”
“음. 동의한다.”
“무슨 일이시죠?”
“로렌조 님이 잠시 보자고 하시는군.”
“지하에서죠?”
“그래.”
앨런이 거절할 리 없었다. 그림자 마법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아, 제발···.”
호위는 난감해하면서도 명령받은 대로 입구를 지켰다.
앨런은 계단을 내려가며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림자로 만든 듯한 옷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는데, 니카브처럼 눈만 내놓고 있었다.
“용건이라도?”
“로렌조 씨가 무슨 일로 불렀는지 궁금해서요.”
“그건 직접 말씀하실 거다. 저 아래다.”
처음에 앨런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지금 발을 디딘 곳이 끝이었지만, 지금은 훨씬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층 전체가 하나의 방이었다. 로렌조는 육각기둥 앞에 서서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마석과 마정석이 쌓여있었다.
앨런 일행이 다가가자 로렌조가 몸을 돌렸다.
“왔군.”
“여기는 뭐 하는 장소죠?”
축구 경기를 해도 될 정도로 넓은 방에는 육각기둥 하나만 있어서 굉장히 단조로워 보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방 하나를 배정할 만큼 기둥이 그만큼 중요한 설비란 의미였다.
로렌조는 대답하는 대신 기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앨런이 얻었던 열쇠가 꽂혀있었다.
“열쇠의 쓰임새는 여기였군요.”
“새로운 층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지. 감상은 그게 다인가?”
앨런은 열쇠 바로 옆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사각형의 홈이 파여있었는데, 그 안에 큐브를 넣으면 딱 맞을 듯했다.
앨런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안경을 쓴 마법사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폭음을 듣고 지휘관실에 찾아왔던 여자였다.
“여기에서 무언가를 얻었으리라 짐작한다. 내 추측이 맞다면 그 무언가로 저 구멍을 채울 수 있겠지.”
“일단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죠.”
앨런에겐 그 무엇보다 궁금증 해소가 먼저였다. 어차피 로렌조도 심증이 충만한 상태라 거짓은 소용없어 보였다.
큐브를 꽂으니, 육각기둥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옆으로 펴졌다. 높이 3m, 넓이 10m쯤 되는 검은색 직사각형이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깨끗하게 비쳤다.
로렌조는 한쪽에 생긴 우물 형태의 구조물을 가리켰다.
“마석.”
그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이 마석을 퍼부었다.
“반응 없습니다!”
“마정석.”
마석을 꺼내고 마정석으로 쏟아부었다. 테일러가 ‘저 정도면 10억은 가뿐히 넘겠는데···.’라며 말한 순간.
우웅!
직사각형이 투명해지며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특수 장비가 가득한 장소였는데, 이곳과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이 우글거렸다.
로렌조가 손짓하자 반대편에 있는 마법사가 마석 하나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마석이 바닥을 굴렀다. 로렌조가 던진 마석 역시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테일러가 입을 크게 벌렸다. 눈동자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거 설마?”
마법사들의 실험은 계속됐다. 처음에는 무생물을 주고받더니, 이제는 생물이 오갔다.
처음에는 벌레가 넘어왔다. 멀쩡하게 살아있자, 생물의 덩치가 점점 커졌다. 토끼, 고양이, 개. 나중에는 꼭꼭 묶인 사람도 넘어왔다.
“이, 이제 살려주시는 거죠?”
열쇠를 훔쳤던 래빗풋, 코니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인체실험용 교보재가 되어있었다.
로렌조 대신 부하들이 행동으로 대답했다. 코니를 바닥에 눕히더니 이런저런 장치를 몸에 부착했다.
“호흡, 맥박, ···, 마력 흐름. 모두 정상입니다.”
“그래도 신중해야 하는 법. 며칠 더 지켜본다.”
로렌조의 말대로 코니는 이쪽과 저쪽을 수차례 오갔다. 언제나 도출되는 결과는 ‘신체에 이상 없음.’이었다.
며칠 후, 로렌조가 다시 앨런 일행을 불렀다. 그의 입가에는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너도 뭔지 알겠지?”
“지상과 미궁을 연결하는 공간문이군요.”
“너무 덤덤한 거 아닌가? 이건 세기의 발견이야!”
로렌조가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기쁨과 흥분이 그 안에 가득했다.
“드디어 사형들을 찍어누를 성과를 얻었군.”
“사형이요?”
“그래. 나는 제자 중 어린 편이지.”
“마탑주가 직접 분쟁을 금지한 이유가 있었군요. 직접 나서서 힘으로 찍어누르면 새로이 받아들인 제자들은 버틸 수 없으니까요.”
“이해가 빠르군. 일단 보상에 대해 말하지. 너를 포함한 세 명에게는 공간문 이용에 대한 사용료를 받지 않겠다.”
“좋습니다.”
“수긍이 빨라서 좋아.”
공간문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녔다. 에셀 마탑조차도 다른 기업이나 정부와 이익을 나눌 텐데, 앨런이 거기에 숟가락을 들이밀 수야 있겠는가.
게다가 며칠 지켜보고 알았는데, 공간문을 유지하려면 많은 마정석이 필요했다. 마석도 아니고 마정석이.
거래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오자 테일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세요?”
“아깝지 않니?”
“어차피 큐브 하나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하고, 유적은 에셀 마탑의 소유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야죠.”
“그래. 네 말이 맞다. 대충 들어보니 사용료는 1천만 코인으로 책정할 것 같은데, 그것만 해도 큰돈이지.”
“왕복이요?”
“아니. 편도.”
“돈보다는 시간이 중요하죠. 공간문이 생겼으니 설원까지 가는 데 2주나 낭비할 필요도 없어요,”
앨런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악몽을 떠올렸다. 비록 꿈이었지만, 큐브는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내가 유적 밖으로 나갔으면 큐브도 진짜 사라졌으려나? 하지만 왜?’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책상을 두드리던 로렌조 앞에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신사적으로 해결하셨군요.”
“그럼 내가 저들을 처리하고 입 씻을 줄 알았나?”
“그러는 제자도 많으니까요.”
로렌조는 그림자 마법사를 지긋이 노려봤다. 자신의 부하처럼 굴고는 있으나, 진짜 부하는 아니었다. 스승님은 비서처럼 쓰라고 했지만, 그리 단순한 역할일 리가 없었다.
로렌조는 앨런 일행을 떠올렸다.
‘처리?’
전신을 매직웨어로 교체한 노인은 브레이커 요원 출신이었고, 드워프 수도승은 모신교 소속이었다. 만약 손댄다고 하더라도 이들부터 걸리는 점이 많았다.
‘앨런···.’
이제 미궁에 들어온 지 1년 된 탐험가이자 마법공학자였다.
‘1년? 고작 1년 만에 설원까지?’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겠지만, 몇 번 조사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어쩌겠는가.
그림자의 말대로 처리하려고 했다가 도망이라도 간다면? 나중에 복수하러 돌아왔을 때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는가. 기왕이면 사형들이 건드렸으면 좋겠지만, 그들도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로렌조는 그림자에게 손짓했다.
“일단 언론사에 좀 흘려. 사업을 시작하려면 대중의 뜨거운 관심이 필요하니까.”
< 문(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