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65화 (165/193)

< 아이스헨지(1) >

공간문을 사용하면 2주나 걸릴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탐험 속도가 빨라지리라 예상하지만,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죠.”

“왜?”

“사람이 몰리면 괴물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니까요. 그러면 나침반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마석을 구하기 힘들죠.”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늘어난 만큼 개인에게 할당되는 괴물은 줄어들었다. 탐험가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녀석들이고 무한히 생성되지만, 한계는 있는 법이다.

앨런 일행도 하나의 층을 통과하려면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미궁에 변화가 생겼다. 본래 다른 탐험가 무리를 발견하면 거리를 유지하거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지만.

“이봐 30층으로 내려가려는 거지?”

접근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지금도 늑대 라이칸으로만 이루어진 무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

“우리도 30층을 목표로 삼았거든. 마석 얼마나 채워 넣었어? 일단 우리가 모은 건 이 정도.”

“나침반을 가동하기 충분하네요. 이리 주세요.”

앨런이 마석을 흡수시키자 나침반 바늘이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을 가리켰다. 앨런 일행이 앞서고, 라이칸 무리가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30층의 상황도 비슷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탐험가들이 보였다. 나무와 어둠과 괴물만 가득한 장소치고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시바가 손을 흔드는 라이칸 무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30층인데도 사람이 이렇게 많군요. 잘하면 형제자매님을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픈빨이야. 공간문이 열렸으니 신기해서 너도나도 몰려드는 거지. 한두 달 지나면 다시 비슷해질걸.”

“테일러 형제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실력에 자신 있는 탐험가에겐 1~26층 구간이 지루하겠지.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걸 버틸 인내심이 모자라서 탐험을 포기한 거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남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지. 6개월이 지나고 다른 나라의 탐험가까지 합류한다면 변화가 눈에 띄긴 하겠어.”

호기심 때문에 잠깐 구경 온 탐험가 빼고는 계속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공간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분야에서 신기록을 세우거나 첫 발견을 해낸다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정말 대단하다. 어떤 노력을 했지? 밥만 먹고 저러니 당연한 결과지. 일단 여기까지는 외부인의 시선이고, 같은 일을 하는 부류라면.

저게 되네? 그럼 나도?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전례 없는 일은 앞으로도 발생할 확률이 현저히 낮지만, 한 번 일어나면 언제든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다.

다른 공간문 발견을 위해 남는 탐험가는 이전보다 집요하고 격정적으로 미궁을 내려갈 것이다.

“제이크는 좋아하겠어.”

“회장님이 왜요?”

“걔는 탐험가 수준이 올라가면 좋아하거든. 새로운 물결이 흘러와서 자신을 막은 층을 뚫길 바랄지도.”

“미궁의 심층은 심도 7의 강자도 어려워하는군요.”

“그러니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구도 최하층까지 내려가지 못했지.”

“회장님도 파티를 이뤄서 내려가겠죠?”

“당연하지.”

그렇다면 회장의 실력을 쫓을 수 있을 만한 탐험가들이 무리를 이뤘는데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심도 7끼리 협력하면 수월할 텐데요.”

“그런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어쩌면 이미 힘을 합치고 있을 수도 있지.”

이번에도 적당히 사냥해서 마석을 모으고, 다른 탐험가 집단과 힘을 합쳐서 다음 층을 찾았다.

31층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곰은 당연히 실종 상태였다. 곰을 사냥하겠다고 문을 졸졸 따라다니는 무리도 있었다.

앨런은 그들을 지나쳐서 문으로 들어갔다. 어둠을 통과하자마자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하얀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방한 장비를 갖춘 테일러와 시바는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어깨를 움츠렸다.

“이러다 윤활유 어는 거 아니냐?”

“영하 40도까지는 버티니 괜찮아요. 설령 기온이 더 낮아지더라도 발열 장치가 있으니 문제는 없을 테고요.”

“고장 나도 네가 있으니···. 그런데 40도면 우리가 먼저 얼어 죽겠다.”

“아니, 형제님. 발열 장치도 있는데 그렇게 꽁꽁 두르셨습니까?”

“어허, 추위에는 장사 없어. 너도 털이 그렇게 많은데 춥다고 옷 입었잖아. 얼마나 껴입었는지 공처럼 보이네.”

테일러의 말대로 시바의 부피는 한껏 늘어났다. 너무 동그래서 내리막길에서 굴리면 빠르게 내려가리라 예상되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맑은 날씨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얼마나 굵고 빽빽한지 10m 전방도 살피기 어려웠다.

눈사람처럼 변한 일행이 이동했다. 발이 푹푹 빠지며 깊은 고랑을 만들었지만, 잠깐 앞을 봤다가 다시 뒤를 보면 고랑이 어느새 눈으로 채워져 있었다.

키 때문에 다리 대신 배로 눈을 밀어내던 시바가 소리쳤다.

“저번처럼 겨우살이 여관이나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어림없을걸. 본질은 마법사 집단이긴 한데 이익을 내려고 여관을 운영한단 말이지. 그리고 지금은 탐험가가 많이 내려왔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성수기.”

“아···.”

시바는 대번에 이해했다. 여태 수도원에서 살았지만, 시장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수요가 급증하면 가격은 폭등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것들은 주머니 사정도 풍족하니 그냥 머무르겠지. 아마 빈방도 없을걸.”

“그래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시바의 기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여정 동안 마주친 것이라고는 눈과 얼음 그리고 괴물뿐이었다.

바람을 겨우 가릴만한 언덕 지형에 텐트를 설치하던 테일러가 미련을 토로했다.

“저번에 얻은 말미잘 외피가 있으면 눈 아래에 파묻혀서 따뜻하게 자는 건데.”

“가죽은 녹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죠.”

얼음 미로를 나가자 흐물흐물해지더니 설원을 나가자마자 사라졌다. 미궁에 귀속되는 물건이 한둘은 아니지만, 일단 사용해봤기에 아쉬움이 더 커졌다.

앨런은 32층에 있는 아이스헨지에 도착했다. 저번에 시온과 함께 왔을 때는 다른 방향을 통해 33층으로 향했기에 이쪽 지형이 생소했다.

평야 지형에 빌딩 굵기의 얼음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모두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높이가 얼마인지 헤아려보려고 해도 눈보라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내려와!”

어떤 탐험가가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았다. 불빛이 매우 강한 전등을 위로 쏘니, 누군가가 기둥에 묶은 밧줄을 타고 쑥 내려왔다.

“룬문자 기록 중인데 왜 불러?”

“실종되기 싫으면 눈보라 그칠 때까지 기다려.”

앨런과 똑같은 지식의 탐구자였다. 그들은 기둥에 단단히 묶어놓은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비슷한 무리가 종종 보였다.

“앨런, 어디로 갈 거냐?”

“다른 탐험가와 너무 가까우면 방해될 수 있으니···.”

앨런은 주위를 둘러봤다. 눈보라 속에서 어둡고 거대한 형체들이 일렁였다. 저게 전부 얼음기둥이었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앨런은 다른 이들처럼 텐트를 설치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일러가 마석등의 불을 밝혔다.

“아까 들었지? 실종 위험이 있으니 눈보라가 칠 때는 올라가지 마라.”

“저도 알고 있어요.”

“잘 알면서 왜 불안하게 만드니?”

“제가요?”

“그래, 너. 몽유병 핑계 대고 올라가지 마라.”

“전, 그런 병 없습니다.”

“알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 사전에 차단하는 거다.”

앨런은 자꾸 다그치는 테일러를 피해 시바를 쳐다봤다. 옷과 수염에 달라붙은 눈이 녹으니 눈사람에서 사람으로 돌아왔다.

“시바 씨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시바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룬문자 같은 지식에 관련된 사항이라면 신뢰도가 매우매우매우 떨어집니다. 정화봉사단에 가입한 나쁜 형제자매님들과 비견되겠군요.”

충격을 받은 앨런은 다른 일에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왼쪽 눈에 저장된,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룬문자가 까맣게 물든 시야 속에서 별처럼 떠올랐다.

앨런은 룬문자를 하나씩 살펴보며 어떻게 연계할지, 어떤 조합을 사용하면 위력적일지 고민했다.

룬문자라고 다 비슷한 위력이 아니었다. 앨런은 최대 4개의 룬문자를 조합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룬문자는 하나만으로도 그 이상의 위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특수한 룬문자가 존재했고,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아이스헨지로 몰려드는 이유였다.

룬문자는 미궁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 후로 새로이 나타나는 룬문자의 출처는 대부분이 미궁이었다.

운이 좋다면 세기의 발견이 기다리고, 아니면 누군가 혹은 기업이 독점하려고 숨겨놓은 룬문자를 찾을 수도 있었다.

아이스헨지를 통제하면 지식을 독차지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전 세계의 공격을 받으리라. 그만큼 이곳은 학계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앨런이 눈을 뜨자 이쪽을 바라보던 테일러와 시선이 마주쳤다.

“앨런.”

“안 나갈게요.”

실종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스헨지에 방문한 탐험가는 종종 사라지곤 했는데, 그들은 모두 눈보라가 칠 때 기둥 위에 있었다. 그리고 미궁에서의 실종은 죽음과 동의어였다.

앨런은 지식이 좋지만,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는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벌써 삶을 끝마치면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하리라.

하루가 지나자 눈보라가 가라앉았다.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얼음기둥에 바짝 붙어서 위를 올려다보는 도중, 테일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은 괜찮겠니?”

“파워슈트가 있으니까요.”

어차피 힘든 일은 파워슈트가 담당하니, 몸에 돌아오는 부담은 최소로 줄어들었다. 마력과다증인 앨런은 좀 힘들긴 하겠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손과 발에 힘을 주자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거기에 [인력]이나 [접착] 등의 룬문자도 빛을 뿜어내자 몸이 기둥에 찰싹 달라붙었다.

앨런은 도마뱀처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맑은 날씨임에도 기둥은 꼭대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사실 높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기둥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룬문자가 훨씬 중요했다.

앨런은 나선을 그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얼음에 구멍을 뚫을 듯한 뜨거운 시선은 덤이었다.

가끔 룬문자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폭발]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익숙한 문자였다. 워낙 많이 접하다 보니 눈을 감고 새겨도 될 정도였다.

10m쯤 올라가자.

‘[폭발]’

그만큼 또 등반하자.

‘또 [폭발]?’

발견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였지만, 계속 알고 있는 룬문자가 나오니 힘이 빠지긴 했다.

‘기둥을 박살 낼 수도 없고···.’

표면에 얕은 구멍을 뚫을 수는 있어도 아예 기둥을 반으로 부러트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미궁이란 그랬다. 브레이커의 회장이 전력으로 두드려도 마찬가지의 결과만 나타나리라.

[폭발]만 4개를 발견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없던 구름이 갑자기 생겨나고,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다.

“앨런!”

큰 목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아래에서 쏘아졌다. 마음 같아서는 더 올라가고 싶지만, 지금은 고집을 부릴 시간이 아니었다.

기둥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려던 앨런은 아쉬움에 위를 쳐다봤다.

‘어?’

앨런의 눈이, 정확히 말하면 왼쪽 눈이 어떠한 반짝임을 목격했다. 자세히 보려 했지만, 발이 땅에 땋는 순간 빛이 사라졌다.

테일러가 앨런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텐트를 가리켰다.

“어서 들어가자.”

“네.”

앨런은 대답하면서도, 텐트로 들어가면서도 위를 쳐다봤다. 아까의 반짝임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왼쪽 눈 근처를 쓰다듬었다.

‘카탄은 아이스헨지를 즐겨 찾았다고 했지.’

물론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테일러가 텐트 입구에 앉아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다.

< 아이스헨지(1)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