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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66화 (166/193)

< 아이스헨지(2) >

카탄, 위대한 마법공학자. 본래의 이름은 ‘탄’이나 위대하다는 의미의 칭호 ‘카’를 붙여 카탄이 되었다.

그는 별문자의 해독가라 불리기도 했다. 왜 해독가냐면 영혼석에 입력하는 별문자는 미궁 발견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자는 있었지만, 별문자의 압도적인 효용성이 모두 사장해버렸다.

사람이 똑바로 서도 머리가 천장에 안 닿는 대형텐트 안, 앨런은 야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카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가곤 하죠.”

“갑자기 무슨 소리니? 그래, 듣고 있으니 해봐라.”

테일러는 고개를 갸웃거리려다가 그만뒀다. 앨런의 사고 전환은 워낙 빨라서, 때로는 대화를 나누다가도 몇 단계 건너뛴 말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대학 들어갈 시기면 □□이 좋은 직업이겠네요.’라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눈보라 때문에 뭘 하기도 곤란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 별문자를 해독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요.”

“잘했겠지.”

“별문자는 문자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떤 문자와도 유사성이 없잖아요. 그냥 점을 찍어놓고 모아놓은 게 다인데 그걸 해석할 수나 있나요?”

“그건 그렇지.”

“카탄이 만들어서 처음부터 의미를 부여했다면 모를까, 이미 존재하는 문자의 뜻을 찾기는 힘들죠.”

“그래서 용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냐?”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기억하고 계셨군요.”

“이 정도는 가뿐하지.”

“용일 수도 있고, 오파츠를 통해 기억을 건네받았을 수도 있죠.”

“시바! 눈 들어오잖아.”

테일러의 하얀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밖의 상황이 궁금한 시바가 텐트를 살짝 열었고, 그 틈으로 눈이 꽤 들어왔다.

“시바!”

“형제님, 제 이름을 그리 강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 이름이 동방대륙 어떤 나라에서는 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

테일러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앨런을 쳐다봤다. 어서 이야기하지 않고 뭐하냐는 동작은 덤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아까 눈보라가 치기 시작할 때, 기둥 위를 살짝 봤어요. 무언가가 반짝였는데, 지금까지 그와 비슷한 목격담을 듣지는 못했어요.”

“형제님, 텐트 열까요?”

“아, 잠시 기다려봐. 그거 열면 내 침대 위로 눈 쏟아지잖아. 그럼 지금 얼굴 살짝 내밀어서 살펴볼래?”

“지상에서는 안 보이더라고요.”

앨런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일러가 텐트 입구 쪽으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지금은 안 돼.”

“···.”

이래서 이야기를 안 꺼내려고 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심코 튀어나왔다.

“정 나가고 싶으면 거미를 올려보내면 되잖니.”

“이미 보냈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앨런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연결이 끊기더니 사라졌어요. 반짝임도 당연히 안 보였고요.”

“그럼 왼쪽 눈에 무언가 신묘한 기술이 담겨있긴 하다는 뜻이네. 그거 카탄의 제자의 제자가 만들었다며.”

“일단 다른 기둥도 한 번 올라가 봐야겠어요.”

“눈보라가 없을 때. 그리고 눈이 한 송이라도 내리면 바로 철수한다고 약속해.”

“···네.”

“대답이 늦네. 시바, 다시 말 해봐.”

“앨런 형제님. 안타깝지만 이런 일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바닥입니다. 그러니 제가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드워프는 본래 산에서 살았던 종족. 시바는 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 살았지만, 그의 육체에는 종족이 남긴 유전자가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어느덧 눈보라가 그치고, 아이스헨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니, 기둥들이 워낙 거대해서 그러지 못했다.

기둥 하나가 거의 초고층 빌딩에 맞먹기에 적당히 떨어트려 놔도 아이스헨지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었다.

앨런은 다른 기둥으로 이동해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무리가 밧줄을 설치하려고 뚫어놨던 구멍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형제님, 그냥 거미를 이용하면 편하지 않습니까?”

“룬문자가 출몰하는 위치는 매번 달라져요. 미세한 마력 흐름을 잡아내려면 골렘이나 기계에 의존하기보다는 직접 움직이는 편이 좋아요.”

“그럼···.”

“비행은 다른 이유로 불가입니다. 눈보라가 치는 순간, 기둥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실종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요.”

괜히 머리가 하얗거나 팔뚝이 가느다란 학자들이 직접 빙벽 등반을 하겠는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실 여기까지 내려올 사람이면 수련이 깊거나 매직웨어가 좋아서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기둥을 오르던 앨런은 미약한 흐름을 느끼고 그쪽으로 갔다가 실망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제부터 자꾸 이것만 보이네.”

“형제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폭발] 룬문자가 새겨져 있어서요.”

앨런을 유혹했던 룬문자는 놀리듯이 곧 사라졌다.

지상에서 100m 정도 올라갔을까, 다시 하늘이 어두워졌다. 전조 없이 나타난 먹구름이 하얀 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앨런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반짝임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탐험이란 이런 것. 노력하고 인내하는 자만이 달콤한 보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줄을 끊고 손바닥을 기둥에 바짝 붙였다. 날카로운 가시가 안으로 수납되자, 몸이 기둥에 붙은 상태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자, 하염없이 위를 쳐다보고 있던 테일러가 옮겨 설치한 텐트를 가리켰다.

“발견했어?”

“아뇨.”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앨런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시간이 꽤 지나자 반짝임이 보이는 기둥과 아닌 기둥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홀로그램으로 입체 모형을 만들어서 여러 시도를 했다. 반짝임을 선으로 이어보거나, 반짝임이 있는 기둥만 남겨보거나, 위에서 보는 것처럼 모형을 돌려보거나.

옆에서 지켜보던 테일러가 물었다.

“이것도 저번처럼 무슨 말이라도 적혀있니? 등불? 장막?”

“아뇨.”

앨런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모형에 집중했다.

“완전한 해석을 하려면 다른 요소가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가장 좋은 방법은 반짝임이 있으리라 추정되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지만, 눈보라가 너무 자주 몰아쳤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앨런 말고도 더 있었다. 다른 기둥으로 옮기려고 텐트를 해체하는 도중, 학자들이 섞인 탐험가 무리가 근처를 지나갔다.

“아니, 왜 이래? 눈보라 미쳤나.”

“저번에는 꼭대기까지 몇 번 올라갔는데 이번엔 어렵겠어.”

“항상 이래? 너무 자주 발생하잖아. 그리고 중간쯤 올라갔다 싶으면 어김없이 몰아치고.”

“아니. 어쩌다 이런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하필 이번 탐험에 이럴 줄은 몰랐네. 혹시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원래 다른 미궁에 들어갔잖아.”

“이번에 공간문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오긴 했지. 정작 이용은 못 하고 여기까지 힘들게 내려왔지만.”

“미궁도 텃세를 부리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들이 멀어지자 자연스럽게 목소리도 끊겼다. 앨런은 학자 중 하나가 내뱉은 말에 주목했다.

“텃세···.”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공간문은 대혁명이었다. 탐험가에게는 달가운 변화지만, 미궁은 정반대로 느낄 수도 있었다.

공간문을 여는 열쇠 그리고 인장으로 추정되는 큐브. 그중에서도 큐브는 앨런의 정신을 지배해서 유적을 벗어나려고 했었다.

앨런은 괜히 그림자를 몇 번 꾹꾹 밟았다. 물론 그림자는 그대로고 눈만 깊이 짓눌렸다.

다음 기둥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실종 말인데요. 브레이커에 그런 정보는 없었나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미궁에서 으레 발생하는 신비라고 설명되어 있었지.”

매직웨어를 통째로 갈아서 그런지, 아니면 앨런과 함께 다니며 이것저것을 경험해서 그런지 테일러의 금제는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도 명확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눈보라가 치기 전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기둥을 중간쯤 등반하면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니, 빠르게 상승할 방법이 필요했다.

앨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자에 닿았다.

삐···.

“이리와.”

상자가 테일러의 뒤로 몸을 숨기려 해도 앨런은 무자비하게 손을 뻗었고, 부품 하나를 떼어냈다.

부품은 카사라의 지하에서 싸웠던 데스아이로부터 획득한 부유 장치였다. 보통은 리미트가 걸려있어서 적당한 속도로만 날아다닐 수 있지만.

“방법이 있지.”

앨런은 마법공학자라 리미트 제거가 쉬웠다. 그러면 당연히 출력 제한이 사라지고, 부품이 받는 부담이 커져서 수명이 줄겠지만, 지금은 탐험이 훨씬 중요했다.

테일러는 앨런이 파워슈트 등 부분에 부유 장치를 부착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괜찮을까?”

“장치 덕분에 속도가 빨라졌잖아요. 그만큼 내려오는 시간도 단축되죠. 아마 전체적인 시간만 따지면 평소랑 비슷할 거예요.”

“진짜로?”

“네.”

개조를 마친 앨런이 기둥에 바짝 붙었다. 장치를 가동하자 몸이 위로 솟구치려 했다. 그 상태로 손발을 움직였다. 부유 장치 덕분에 같은 힘을 사용해도 이동 거리가 4~5배 증가했다.

‘얼마나 올라왔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100m를 돌파했다.

‘좋아. 아직 하늘은 맑아.’

앨런은 근처에 느껴지는 룬문자의 기운을 무시하며 꼭대기로 향했다.

“와.”

정상에 발을 디디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온 세상이 새하얬다. 근처에 늘어선 기둥들까지 더해지니 굉장히 신기한 풍경이 되었다.

만물이 발아래에 있으니,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기에 올라왔던 학자들도 비슷하게 느꼈으리라.

‘이번에는 눈보라가 없네. 미궁의 심술도 끝났나?’

앨런은 반짝임의 원천을 찾고자 기둥 위를 걸어 다녔다. 아직은 여유가 있기에 룬문자가 느껴지면 슬쩍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기둥 하나하나의 정상은 굉장히 넓었고,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 시각, 기둥 아래.

“시바···.”

테일러가 욕설인지 이름인지 모를 말을 흘렸다. 어깃장을 놓던 시바도 이번에는 조용히 있었다.

눈보라였다. 지금까지보다 지독하고 거센 눈발이 몰아쳤다. 10m? 아니, 5m 앞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었다.

테일러는 눈사람이 되어가는 도중에도 위를 쳐다봤다. 올라갔던 앨런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형제님, 안 됩니다.”

시바가 테일러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그 역시 거의 눈으로 파묻힌 상태였다.

“분명 하늘이 어두워지면 내려온다고 했잖아.”

“앨런 형제님이 안 자고 잤다고 속이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무슨 사정이 생긴 겁니다. 일단 텐트로 들어가죠. 형제님까지 올라갔다가 실종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테일러는 시바의 말대로 텐트로 들어갔다. 털지도 않은 눈은 마석등이 뿜어내는 열기에 의해 녹아내려서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투명한 비닐을 통해 기둥을 바라보려 해도 눈이 거기까지 달라붙어서 볼 수가 없었다.

상자와 표범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얌전히 붙어있었다. 버릇처럼 놀려대던 집게발도 축 늘어져 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설탕을 넣었으니 심적 불안이 좀 해소될 겁니다.”

시바가 커피를 건넸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아서 정신이 번쩍 들긴 했다.

“형제님···.”

“실종에서 돌아온 사람 있냐고 물어보려는 거지? 잠깐 기다려봐, 안 그래도 생각 중이니까.”

테일러는 흐린 기억의 바다에 풍덩 잠수했다. 얼마나 헤엄을 쳤을까. 젊은 날에 언뜻 봤던 뉴스 기사가 떠오르긴 했다.

“카탄이 실종됐던 탐험가를 구출했다는 신문을 보긴 했어. 운이 좋았다고 말했었나?”

< 아이스헨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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