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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67화 (167/193)

< 아이스헨지(3) >

앨런은 반짝임 그리고 룬문자의 기척을 찾아서 기둥 위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기둥 하나하나의 면적은 초고층 빌딩과 비슷해서 넓이가 상당했다.

영하 10도 이하의 기온에서도 몸에 열이 날 정도로, 사실 파워슈트 덕분,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문득 이상함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의 길이가 왜 일정하지?’

맑은 하늘에는 태양만이 오롯이 존재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커튼에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새겨져 있었다.

앨런은 바이저를 통해 태양을 관찰했다. 아예 바이저에 시간을 HMD로 띄워놓고 둘을 동시에 바라봤다.

한동안 지켜보니 위화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계속 제자리에 있어.’

설원은 원시림과 달리 낮과 밤이 존재했다. 당연히 천체의 움직임이 관측되어야 했지만, 태양은 못이라도 박힌 듯 한자리에만 붙어있었다.

앨런은 기둥 가장자리로 움직여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보라가 없으니 시야는 훤했지만, 기둥 밑에 설치한 텐트, 테일러, 시바가 안 보였다. 다른 기둥에 개미처럼 붙어있던 학자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자신이 기둥의 정상에 올라와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지금까지 꼭대기에 발을 디딘 탐험가들은 모두 실종되어야 했다.

그러나 위에 발을 디디고, 내려다본 풍경이 아름다웠다고 증언한 탐험가와 학자가 얼마나 많던가.

이건 명백히 이상 현상이었다. 자연스레 눈보라와 실종의 상관관계가 떠올랐다. 눈보라를 무시하고 버티려고 했던 사람들은 어김없이 자취를 감췄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보라가 몰아쳤나? 그렇다면 눈보라 자체가 공간을 격리하는 현상인가?’

앨런은 파워슈트를 뒤적여서 굉장히 얇은 철판 조각을 꺼냈다.

‘내려가도 되는지 확인해야겠지.’

철판은 종이와 비슷하게 팔랑거리며 떨어지더니, 일정 높이 이하로 내려가자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루로 변했다. 다른 위치에서 실험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내려가면 큰일 난다는 사실을 알자, 자연스레 앨런의 시선이 다른 기둥 위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특이한 점을 찾을 순 없었다.

그래도 절망하진 않았다. 미궁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내려줬다. 도달자가 거의 없을지라도 해결책이 존재하긴 했다.

일단 상황을 타파하려면 작은 단서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앨런의 생각이 자연스레 반짝임에 머물렀다.

눈보라가 칠 때 기둥에 매달려서 왼쪽 눈으로 위를 보면 빛이 보였다. 그냥 깜깜하기만 한 기둥도 있긴 했다.

‘룬문자인지, 별문자인지 몰라서 그냥 놔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손가락에 마력을 담아 왼쪽 눈 근처를 문지르자, 대낮에 은하수가 펼쳐졌다. 우주처럼 새까만 입력창에는 무수히 많은 별문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앨런이 이것저것 기능을 강화하고 더한 결과였다. 별문자에 이제 막 입문한 마법공학자가 지금 광경을 본다면 ‘여긴 내 길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복잡했다.

앨런의 손이 별의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별문자는 손이 스쳐 지나가도 그 자리를 지켰다.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기둥의 반짝임을 입력할 장소를 확보하고, 손가락에 마력을 담았다. 섬세한 동작으로 콕콕 찌를 때마다 별이 하나씩 태어났다.

작업을 마친 앨런은 눈을 감았다. 별문자가 맞는지 왼쪽 눈에서 미약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적용까지는 시간이 걸리니 잠깐만 기다리자. 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마침내 마력이 가라앉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 별문자라는 예상이 맞았는지 새로운 풍경이 앨런의 앞에 펼쳐졌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반으로 나뉘어있었다. 오른쪽 눈에는 여전히 대낮의 풍경이 비쳤고, 왼쪽 눈에는.

‘약한 눈보라가 치는 밤이구나.’

바이저의 HMD도 마구 요동쳤다.

외부온도 : -10℃

외부온도 : -30℃

외부온도 : -10℃

외부온도 : -30℃

이건 작동오류가 아니었다. 우반신은 영하 10도의 세계에, 좌반신은 영하 30도의 세계에 존재했다.

무슨 작용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자신의 몸이 동시에 2가지 세계에 머문다는 사실은 알았다.

앨런은 왼쪽 눈만 감았다.

외부온도 : -10℃

바이저의 표시가 얌전해졌다. 비로소 양쪽에 존재하는 센서가 같은 온도를 감지한 것이다.

앨런은 오른쪽 눈만 감았다.

외부온도 : -30℃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양쪽의 온도 센서가 똑같이 영하 30도를 감지했다.

‘재밌네.’

어떤 눈을 뜨고 있냐에 따라 몸이 존재하는 공간이 바뀌었다. 원리는 몰라도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이러고 싶을 정도로.

물론 그럴 순 없기에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왼쪽 눈, 그러니까 인공 안구로만 세상을 바라봤다.

우선 하늘을 쳐다봤다. 굵은 눈발이 우수수 떨어지는데도 달은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히 과시했다. 짙은 먹구름을 투과해서 지상까지 달빛을 보냈다.

‘달 역시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어.’

탈출하려면 멀었다는 의미였다. 앨런은 다시 시선을 내려서 주변을 훑어보다가 처음 보는 물체를 발견했다.

눈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치우자,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있는 인간 탐험가가 나타났다. 동사한 시체였다.

앨런은 그가 무언가 단서라도 남겼을까 싶어서 품을 뒤져봤다. 시체는 랑카에서부터 지겹도록 봐서 익숙했다.

꽁꽁 얼어붙은 옷을 젖히니 수첩 하나가 나타났다. 기억수정으로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고 저장하는 세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동물에게 의체를 달아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주나 받아라.]

첫 페이지부터 사이보그 동물과 제작자를 욕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것들을 만난 탐험가라면 비슷한 감상일 것이다.

갑자기 늑대의 목이 길어지며 송곳니를 들이밀고, 곰이 닿기만 해도 녹아내리는 액체 묻은 앞발을 휘두르고, 발광하는 다람쥐가 눈 속에서 뛰쳐나오며 폭발한다.

상식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이니 당황하고 짜증 날 수밖에. 물론 앨런은 그것들이 새로운 방식을 보여줄 때마다 즐거웠다.

탈출이 우선이기에 감상을 뒤로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눈, 눈, 눈 또 눈!]

[아이스헨지에 도착했다. 카탄처럼 새로운 룬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대박도 꿈이 아니다. 은퇴하면···.]

하필이면 마법의 주문이 적혀있었다. 불길한 소리를 하면 불길함이 찾아온다. 이건 미신이면서도 미신이 아니었다. 마력과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해야 했다.

다음 페이지의 필체는 축축 늘어졌다. 마치 우울한 사람이 작성한 것처럼.

[갇혔다. 아래로 내려가려던 나오가 그대로 가루로 변했다. 왜 우리가 왔을 때 이런 일이···.]

[점점 식량이 떨어져 간다. 말다툼을 벌였다.]

[굶주림이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싸움을 피하려고 일부러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녀석이 조용하다. 얼어 죽었다.]

[자꾸 끔찍한 생각이 떠올라서 녀석을 아래로 밀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루로 변했다. 차라리 나도···.]

[좆같은 미궁. 이러니까 50년이 흘렀는데도 끝에 도달한 사람이 없지. 다른 기둥에는 탈출 방법이 있으려나?]

페이지는 그게 끝이었다. 앨런은 50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어쩐지···.’

남자의 장비가 묘하게 구식인 이유가 있었다. 자금 사정 때문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 세월의 차이였다. 앨런의 눈에는 구식으로 보여도 그때 당시에는 나름 최신형이었으리라.

앨런은 다시 남자의 시신을 살폈다. 발은 바깥, 머리는 중앙으로 향했다. 마치 바깥에서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쓰러진 모양새였다.

중앙은 이미 뒤져봐서 볼 것도 없으니, 발 쪽을 바라봤다. 기둥 밖으로 눈송이가 사납게 떨어졌다.

‘···?!’

한참을 지켜보던 앨런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송이는 묘하게도 어떠한 지점을 비켜나갔다.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니 그 끝에는 다른 기둥이 있었다.

지팡이로 그 부분을 건드리자.

탁!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허공에 투명한 다리가 떠 있었다. 남자는 다리를 겨우 건너왔다가 기력을 다한 것 같았다.

앨런은 투명한 길을 꾹꾹 눌러보다가 몸을 실었다. 육중한 파워슈트가 올라가도 다리는 멀쩡하게 버텼다.

그런 식으로 기둥을 옮겨 다녔다. 가끔 시체를 발견했는데, 장비를 살펴보니 제작연도가 제각각이었다.

중심부를 이루는 기둥 중 하나에 도착하자, 비로소 무언가가 감각에 잡혔다.

‘별문자? 아냐. 이건 룬문자의 파편이야.’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룬문자보다 복잡했다. 완벽한 형상을 이룬다면 매우 강력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선보이리라 짐작되었다.

앨런이 파편을 기억에 새기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물고기 같았다.

‘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닌···.’

앨런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바이저에 주황색 원이 여기저기 찍혔다. 원 안에는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주황색은 경계 혹은 정체불명이라는 의미였다. 기둥 위에 갑자기 나타난 형상이 길쭉한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막대에 뚫린 구멍이 앨런을 향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는지 구멍에서 벼락이 뿜어졌다.

빠지직!

벼락으로 이루어진 탄환이 파워슈트 표면에 닿자마자 사방으로 강한 전류를 뿜어냈다. 방어막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진동했다.

‘전격 계열 마법에 대한 대처는 아직 미흡한데.’

앨런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바이저의 원들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적색은 적대적인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런 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모두 앨런을 향해 길쭉한 지팡이를 겨누었다. 구멍에 마력이 응집되고, 가장 강하게 빛나기 전.

앨런은 눈을 바꿔 떴다. 오른쪽 눈, 육안만 뜨자 세상이 낮으로 변했다. 달빛과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러면 깔끔하지. 싸울 필요도 없고.’

마치 눈에 뒤덮인듯한 인간의 형상들은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했다. 그들이 방출했던 마법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여기에서는 룬문자가 안 보여.’

파편을 모으려면 다시 밤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앨런은 지팡이를 들고 기둥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지팡이를 끄트머리에 대고 한 바퀴를 돌았다.

턱!

지팡이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투명한 다리는 낮에도 존재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다음 기둥으로 넘어간 앨런이 다시 눈을 바꿔 떴다. 몰아치는 눈보라, 두리번거리는 적들이 보였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룬문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다시 낮의 세계로 넘어갔다.

앨런은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기둥을 넘어가서 파편을 찾고, 적들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공간을 건너뛰었다.

계속 같은 일이 벌어지자 적, 그러니까 눈으로 빚은 듯한 사람들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따로따로 사방을 겨누고 있다가 앨런이 보이면 바로 마법 탄환을 발사했다.

마법이 제법 매섭긴 했지만, 앨런의 파워슈트는 단단했고, 파편을 기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파편을 퍼즐처럼 맞추다 보니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밤의 세계에서 룬문자가 완성되었다.

적들은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대처했다. 앨런의 움직임은 점점 중앙으로 향했으니,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예측하기도 쉬웠다.

앨런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여전히 밤의 세상에 몸이 묶여있었다. 그리고 왼쪽 눈에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

‘기간제 별문자였나?’

마법들이 코앞에 들이닥쳤어도 당황하지 않았다. 완성된 룬문자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있었다.

룬캔버스의 형상변환 합금이 움직였다. 평소에는 4개의 룬문자를 그려냈지만, 이번에는 하나에만 집중했다.

앨런의 몸이 약하게 빛났다. 마법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외형이 그렇다고 능력까지 여리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든 마법이 자신을 쏘아낸 적들에게 돌아갔다. 정확하게 총구 앞에서 폭발하며 무기를 망가트렸다.

‘공간왜곡? 공간반전?’

앨런이 처음 접하는 룬문자라 명칭을 정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물론 그전에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충분히 검증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 그럴만한 대상도 눈앞에 많았다.

< 아이스헨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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