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스헨지(4) >
앨런은 눈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동글동글한 형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되돌려준 마법에 파괴당하고도 몸을 복구했다.
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길쭉한 고드름이 나타나더니, 곧 눈이 쌓여서 처음 봤던 모습으로 변했다.
앨런은 적을 인식했고, 룬캔버스로 빚어낸 룬문자가 눈사람들을 가리켰다. 계속 공격을 되돌려주는 도중에도 다른 생각이 솟구쳤다.
‘공간 계열 마법은 미궁에서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이동, 확장 등 공간을 조작하는 마법은 미궁이 거부했다. 다만, 미궁에서 발견되는 오파츠라면 살짝 달랐다. 브레이커가 사용하는 차원 배낭은 오파츠고, 상자의 공간 확장 역시 소원의 조각이라는 오파츠로 얻은 결과였다.
사례가 많으니 오파츠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룬문자가 이런 능력을 보여주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로렌조 씨가 공간문을 열어서 변화가 생겼나? ···아니겠지.’
그랬으면 벌써 대서특필 되었으리라. 메이즈시티에 또 다른 난리가 생겼을 테니 앨런이 모를 리 없었다.
‘공간에 관여하는 룬문자는 더러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서 있는 공간 혹은 새로이 얻은 룬문자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평범한 룬문자는 아니었다. 앨런은 룬문자 4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데도, 지금은 오직 하나에만 정신력 대부분을 할당해야 했다.
삑!
앨런은 기계음을 듣고 외부에 집중했다. 바이저에 나타났던 빨간 원이 모두 사라졌다. 어느덧 눈사람이 모두 사라졌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눈더미만 남았다.
지팡이로 눈을 뒤적거리자 잘게 부서진 마정석이 나왔다. 표면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는데 파손되면서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아깝게···. 룬문자의 명칭은 [공간간섭]으로 정하자.’
앨런이 생각하기에 가장 직관적이며, 앞으로 변화 혹은 성장할 여지가 많은 이름이었다. 성취가 깊어지면 다른 룬문자와 연계해서 특화할 수도 있으리라.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깨끗한 공기가 폐 끝까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물먹은 솜 같던 몸도 가벼워져서 평소보다 힘이 넘쳤다.
모두 룬문자 때문이었다. 룬문자 하나가 마력을 얼마나 많이 빨아먹는지, 마나하트가 거의 바닥날 뻔했다.
물론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피로가 전부 날아간 듯한 느낌은 곧 끝날 테고, 마력과다증은 소비한 만큼 더 많은 마력을 생산해서 육체를 괴롭힐 것이다.
앨런은 벌써 가슴 내부를 압박하는 묵직함을 최대한 억제하며 발을 내디뎠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서는 이상한 공간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아이스헨지의 중심부로 향할수록 기둥 위에 놓인 시체가 점점 많아졌다. 눈사람에게 당했는지 외곽의 시체보다 상태가 엉망이었다.
‘장비 제작연도와 기술을 살펴보면 주인의 실력은 뛰어났던 것 같은데···.’
미궁에서 장비와 실력은 비례하는 법. 앨런의 예상대로라면 눈사람에게 당할 탐험가가 아니었다.
‘설마 다시 나타나려나?’
눈사람이 무너져서 만들어진 눈더미는 그대로였다. 아직은 앨런의 걱정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밤의 세계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어느새 멈췄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달빛만이 아래로 쏟아졌고, 드높이 솟은 얼음 기둥들은 저마다 투명함을 뽐냈다.
지상에 내려온 달빛과 기둥이 만들어낸 휘황찬란한 광경이 앨런의 시선을 빼앗았으나,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완전한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는 초고층 빌딩 크기의 얼음 기둥이 펜타그램, 그러니까 오망성의 꼭짓점 형태로 서 있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이 앨런의 관심을 빼앗았다. 앨런의 마력 감지력은 유독 예민해서 이런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제어력 역시 굉장히 뛰어났으나, 앨런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의사가 제 병 못 고친다지.’
마력과다증 이야기였다. 제어력이 뛰어나면 뭐하나. 몸을 망치는 마력을 얌전하게 길들일 수도 없는데.
어쨌든 그건 그거, 이건 이거였다. 꼭짓점 중 하나에 발을 디디자 주변의 풍경이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른 듯 이상하게 변했다.
동시에 눈보라가 다시 시작되고, 멀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바이저의 HMD에 다시금 빨간 원들이 생겨났다. 눈보라가 쏟아붓는 눈송이가 뭉치더니 다시 사람의 형태를 이뤘다.
그들이 무기를 들거나 말거나, 앨런은 일그러짐이 심한 장소에 손을 뻗었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당연하겠지. 이러면 어떨까?’
파편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룬문자를 떠올렸다. 룬문자가 우연히 이 자리에 있을 리는 없었다. 미궁은 탈출하는 길과 타개할 열쇠를 언제나 마련해뒀다.
어느새 든든해진 마나하트를 자극해서 다시금 [공간조작]을 펼쳤다. 아까처럼 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눈보라와 찬바람이 자취를 감춘, 아주 조용한 방이었다. 벽과 천장은 큼지막한 얼음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앨런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발밑에서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 조각에 눈금이 새겨져 있네. 깨진 플라스크인가?’
연구시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앨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건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누군가가 쌓아 올린 지식이라면 더더욱.
손을 들어 근처의 책상을 쓸었다. 파워슈트의 장갑에 빛나는 물질이 묻었다.
‘금속과 마석을 잘게 빻아서 혼합한 가루야.’
마법공학자가 마력회로를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혼합법이었다. 가루를 담은 카트리지를 룬펜에 끼우면, 혼합물이 녹아서 마력회로로 재탄생했다.
연구실의 주인이 같은 직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대충 살펴봐도 방의 풍경은 휑했다. 도둑이라도 들었는지 제대로 남아있는 물건이 없었다. 그나마 본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파편 정도는 존재했다.
‘망가진 현미경, 부서진 마력 실린더, 마석 가루가 남아있는 막자···. 도둑도 이 광경을 보면 발걸음을 돌리겠지.’
그 정도로 깔끔하게 털어갔다. 원래 이런 구조인지, 아니면 누군가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추측하면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백 년 일찍 태어났으면 미궁이 미답의 지역이었을 텐데. 아니지, 그때면 매직웨어 정립도 제대로 안 되었을 시기구나. 잠깐, 처음부터 내 손으로 정립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을지도···.’
흥미를 끌 물건이 없자, 앨런의 시선이 중심에서 외곽으로 옮겨졌다. 반대편에 문 하나가 있긴 했다.
계속 발에 밟히는 유리 조각을 넘어 문 앞에 우뚝 섰다. 이번에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살짝 밀자마자 활짝 열렸다.
얼음 문 너머에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통로가 존재했다. 유리창이 하나도 없는 복도는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모를 빛 덕분에 밝았다.
통로의 존재 이유는 무언가의 연결. 방을 나섰으니 당연히 그 끝에는 다른 공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물론 그 전에 또 다른 문을 통과해야 했다.
문 앞에는 개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이가 빠진 도끼, 자루가 부러진 망치, 망가진 절단기, 휘어진 빠루 등등.
선객이 버리고 간 장비가 문 앞에 쌓여있었다. 당연히 마법이나 오러로 상처 내려고 시도했겠지만, 얼음으로 이루어진 문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다.
앨런이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하려는 순간, 문에서 뿜어진 빛이 전신을 비췄다. 어떤 대처를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문하는 것처럼 전신을 샅샅이 훑던 빛은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왼쪽 눈에 집중되었다.
앨런은 열기를 느꼈다. 화상을 입을 정도로 화끈하진 않았지만 불쾌함을 느끼긴 충분했다.
‘해킹인가?’
어떠한 흐름이 강제적으로 파고들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앨런은 거부했다. 인공 안구는 타인이 만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눈이었다. 강화도, 개조도 자신의 손끝에서 이뤄져야 했다.
동시에 앨런의 눈앞에 어떠한 환영이 보였다. 매직웨어는 마법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방화벽에도 마법이 적용되었다.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정신, 환상 계열 마법이 주로 채택되었다. 해킹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침투이기에 효과적이기도 했다.
어쨌든 앨런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자신이 구상한 미로, 해자, 함정 등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쿵!
성문을 두드리고 있는 노인이 그 원인이었다. 허리가 꼿꼿했고, 고집불통 같이 생겼으며, 머리카락은 회색이었다.
‘카탄.’
앨런은 그의 사진을 삼라만상에서 본 적 있었고, 지금 성문을 두드리는 침투형 마법과 똑같이 생겼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성문을 깨트리려고 노력했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공성추가 문을 강타했다.
정체도 모를 마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앨런은 상상했다. 그러자 철문이 쿵쿵거리며 떨어져 내렸고,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수면 만들고, 깨트리면 복원했다. 정신과 환상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의지. 그 부분만큼은 쉽게 무너질 생각이 없었다.
카탄의 손길이 묻었으리라 짐작되는 해킹 마법은 강력했다. 웬만한 시도는 해킹으로 취급도 안 하는 방화벽이 상당히 허물어졌다.
물론 앨런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다. 부수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따로 기억해두기도 했다.
‘이 방법은 나중에 개량해서 써먹어야지.’
앨런에게 자신을 무너트리지 못하는 고통은 모두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노인의 형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화벽을 뚫지 못한 마법이 완전히 힘을 잃자, 앨런의 시야도 현실로 돌아왔다. 굳게 닫혀있던 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열린 상태였다.
연구실과 달리 작은 방이었다. 중심에 발을 디디자 웬 빛무리가 앨런을 가뒀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니, 그제야 그것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세상을 본뜬 듯한 동그란 홀로그램이었다. 카탄은 최근의 인물이기에 대륙과 바다의 형태가 지금과 같았다.
‘이 점들은···.’
앨런은 대륙에 찍혀있는 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지만, 빠르게 해소되었다.
‘여긴 메이즈시티가 있는 위치야.’
미궁은 전 세계에 퍼져있었고, 점들은 그 지점과 일치했다. 문제는 점 위에 그려진 ‘X’ 표시였다.
‘무슨 의미지? 보통 부정할 때 많이 쓰긴 하는데···.’
수많은 점 중에 ‘X’ 표시가 없는 점은 5개였고, 그중에는 메이즈시티도 포함되어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고개를 돌렸다. 홀로그램에는 점 말고도 다른 표식이 존재했다. 이번에는 세모였는데 그중 몇 개는 익숙했다.
‘여기는 카사라, 저기는 재봉사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밀림···.’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땅과 거의 일치했다. ‘거의’라는 말은 아닌 장소도 있다는 뜻이었다.
앨런은 지도를 머릿속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더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없어 보였다.
들어올 때와 비슷하게 룬문자를 사용하니, 눈보라가 몰아치는 얼음 기둥이 앨런을 맞이했다. 사박 소리를 내며 눈을 밟자마자 눈사람들이 이쪽을 인식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가장자리에 선 앨런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제는 돌아갈 수 있겠어.’
물건을 기둥 밖으로 떨어트리면 가루가 되는 이유가 이제는 보였다. 공간과 공간에 짓눌려 갈려버리는 것이다. 마치 맷돌에 넣어진 콩처럼.
‘콩처럼.’
앨런은 [공간간섭]을 몸에 두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 아이스헨지(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