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69화 (169/193)

< 아이스헨지(5) >

앨런이 사라지고 벌써 일주일.

얼음 기둥 아래 설치된 텐트 옆에 테일러와 시바가 앉아있었다.

식량이 부족할까 봐 사냥하고 돌아오기도 했는데, 주로 테일러가 혼자 나섰다. 누군가는 돌아올 앨런을 기다려야 하고, 시바는 사냥 기술이 미흡한 탓이었다.

마침 눈보라가 그쳤기에 밖에서 사슴 고기를 구웠다. 고기는 어딘가에서 구해온 얇은 돌판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변해갔다.

시바가 고기를 한 점 집어먹고 감상을 말했다.

“고기에서 기름과 쇠 냄새가 납니다.”

“사이보그 사슴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똑같은 맛이 나려나?”

“끔찍한 소리군요.”

“늙어서 고기도 질기겠지.”

“형제님···.”

시바의 책망에 테일러가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시바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불안감을 숨기고자 유쾌함의 가면을 썼고, 농담은 그 일환이었다. 실종 후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앨런이 있을 때 자주 마주쳤던 학자 무리는 인원 하나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는데, 예민해진 테일러는 거칠게 받아쳤다.

“상심이 크···.”

“좆같은 말 듣기 싫으니까 꺼져. 한 번만 더 그따위 개소리 내뱉으면 혀를 찢어버리겠어.”

다소 과격한 반응이나 상대도 사정을 알기에 이해하고 물러났다. 나중에 시바가 몰래 사과를 하기도 했다.

사박

시바는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표범이 몰래 다가와 있었다. 앨런이 사라지자마자 줄곧 절전모드였는데 웬일로 밖에 나와 있었다.

“무슨 일이니?”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당연히 표범은 조용히 위만 쳐다봤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시바도 녀석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꺾었다. 위를 향한 눈이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작은 점을 포착했다. 점이 점점 커질수록 시바의 눈도 똥그랗게 변했다.

“아!”

앨런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둥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부드럽게 감속하고 사뿐하게 착지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왔구나.”

“다녀왔습니다.”

여전히 앉아있는 테일러의 뒤로 시바가 슬그머니 붙었다.

“형제님, 혹시 다리에 힘 풀리셨습니까?”

“쓰읍.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쪽으로 가. 앨런 앉을 수 있게 의자도 가져오고.”

시바를 보고 인상을 쓰더니, 앨런을 볼 때는 얼굴이 펴졌다. 차별적인 대우였지만 시바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것보다 복귀의 기쁨이 더 컸다.

“일주일 동안 굶주렸겠군요. 어서 앉아서 꼭꼭 씹어 드시죠.”

“일주일이요?”

“네. 앨런 형제님이 사라지고 정확히 7일 2시간이 흘렀습니다.”

앨런은 시바의 말을 듣고 얼음 기둥을 올려다봤다. 체감상 길어야 하루였데, 이곳에서는 벌써 저렇게 세월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네요. 위에서는 25시간 지났는데···.”

삐!

표범이 조용히 다가와서 몸을 비볐고, 상자는 집게발을 번쩍 들었다.

“아, 부유 장치는 망가졌어.”

삑!

상자가 높고 사나운 기계음을 냈다. 앨런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보며, 위에서 겪은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실종되었던 탐험가들의 시체가 얼어붙어 있더군요.”

“장비는? 옛날 마도구를 취미 삼아 수집하는 사람들이 좋아하겠는데.”

“부장품이라 생각해서 그냥 놔뒀어요.”

“앨런 형제님이 정말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좀 보고 배우시지요.”

“내가? 좋아하겠다고 말했지 판다고는 안 했다.”

“그게 그거지 않습니까.”

앨런은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룬문자 이야기를 꺼냈다. 기묘한 세계에서 빠져나왔으니 [공간간섭]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그런 룬문자가 존재한다고? 어디 한번 보자.”

“지금 오른손에 기운을 모았는데 보이세요?”

“마력이 모인 건 알겠는데 모습은 평소와 같구나.”

앨런이 표범을 바라보자 녀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톱을 뽑아 들고 주인의 오른손을 향해 휘둘렀다.

진짜 맹수의 발톱도 단검과 같은데, 표범은 전투용 기계라 훨씬 살벌하고 예리했다. 당연히 테일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지금···.”

더 놀라운 광경은 발톱이 지나가고도 멀쩡한 앨런의 손바닥이었다. 붉게 물들기는커녕, 햇빛을 받아서 더욱 하얗게 보였다.

“공간을 살짝 부풀렸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표범의 발톱이 닿지 못했어요.”

“늙은이 심장마비로 가는 꼴 보고 싶으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라.”

“제세동기 기능을 지닌 매직웨어를 심장 근처에 넣어뒀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테일러가 눈살 찌푸리고, 시바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다칠만한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 그다음은···.”

앨런은 못 들은척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방화벽과 해킹 시도 그리고 카탄을 닮은 침투 프로그램이 주제였다.

“그렇게 뚜렷한 형상을 지녔다고?”

“네.”

“어차피 사이버공간에서 형상은 무의미할 텐데. 아바타가 복잡해 봐야 자원만 잡아먹지.”

“잘 알고 계시네요.”

“상식이잖니.”

테일러의 말을 들은 앨런이 그림자를 푹푹 찔렀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오오!”

시바가 감탄을 표했다. 당연히 테일러의 얼굴이 불쾌하게 변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무식해 보여?”

“···.”

대답이 없으니 주름이 더 일그러졌다. 앨런이 눈짓하자 상자가 집게발로 어깨를 주물렀고, 덕분에 테일러의 표정이 좀 나아졌다.

“카탄의 성격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기억하는데. 흠, 누군가가 그를 모욕하려고 일부러 모습을 베꼈을까?”

“왼쪽 눈에 반응한 걸 보면 카탄 본인이 남긴 조치일 수도 있죠.”

“아, 그 눈은 제자의 제자가 만들었다고 했지.”

“왜 이런 눈이 마약 카르텔의 수중에 있었을까요?”

“제자 중 하나가 돈이 부족해서 팔았거나···.”

테일러가 말을 멈추고 손날로 목을 그었다.

“그놈들과 엮여서 빼앗겼겠지. 네 추정으로는 카르텔 자체가 재봉사의 제자와 연관 있는 놈들 같다며.”

“아, 재봉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앨런은 이번에 행성 홀로그램을 설명했다. 미궁을 가리키는 점과 엑스, 위험한 지역을 가리키는 세모.

“5개의 점만 엑스가 없다고?”

“다 미궁이 있는 위치였어요.”

“가장 큰 미궁 다섯 개만 모아놨구만.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딘 미궁이 제일 넓지만.”

테일러는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앨런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미궁이 크면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럴수록 지식도 많이 쌓이니까.

테일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카탄은 여러 미궁을 돌아다녔지. 엑스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거나 볼일이 끝났다는 표시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탐험할 미궁이 아직 남았는데 그의 수명이 다했겠죠.”

“마법공학의 발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긴 해. 성격은 괴팍해도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앨런은 홀로그램으로 빚어낸 세계지도에 세모를 그렸고, 그 위치를 본 시바가 입을 살짝 막았다.

“세모는 혹시 위험도 최상급 범죄자의 근거지 아닐까요? 카사라는 파괴자, 밀림은 재봉사. 사가르 산맥에는 혹시 수집가가?”

사가르 산맥은 동방대륙과 서방대륙 중간에 있는 고산 산맥이다. 지형이 험하고, 혹독한 기후에 적응한 몬스터는 사납기로 유명해서 보통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였다.

앨런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테일러는 심드렁했다.

“원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긴 했지.”

“형제님은 브레이커에서 일하셨으니 고급 정보를 많이 접하셨겠군요.”

“비밀등급이 그리 높진 않았다. 그런데 앨런.”

“네.”

“너라면 위험한 범죄자가 있다고 지도에 따로 표시해 놓을 거냐?”

“아뇨.”

그들의 목에 현상금이 붙어있긴 했지만 잡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간다고 지식 한 조각이나 얻겠는가?

“그치? 카탄도 너랑 비슷한 생각이겠지.”

“그들이 그곳에 자리 잡은 건 우연이 아니겠죠. 카탄이 따로 표시할 만큼 중요한 물건 혹은 건물이 있을 거예요.”

앨런은 파괴자의 보금자리 밑에 존재하던 유령도시와 푸른 수정을 떠올렸다. 다 때려 부술 것 같던 푸른 귀부인도 그곳에서만큼은 대로를 통해 최대한 조심스레 움직였다.

사슴 고기가 어느새 많이 줄어들었다. 앨런이 식기를 정리하려 하자 테일러가 만류했다.

“더 먹어라.”

“배불러요.”

“그렇게 삐쩍 말라서 설원을 어떻게 헤쳐나가려고. 일주일 굶었으니 모자란 만큼 채워야지.”

“전 하루···.”

“나한테는 일주일이었어.”

결국, 앨런은 붙잡힌 상태로 고기를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테일러는 이 기회에 살을 찌우겠단 생각 같았다.

시바가 도움을 주고자 말을 걸었다.

“[공간간섭]은 정말 대단한 룬문자 아닙니까? 그런데 형제님의 반응은 약하군요.”

“공간문도 생겼는데 룬문자쯤이야. 그리고 앨런이 벌이는 일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앨런.”

“네.”

“알지?”

“당연히 알죠.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생각 없습니다.”

지식은 많을수록 좋고, 나만 안다면 더 좋았다. 그리고 귀중할수록 벌레들이 꼬이니, 웬만하면 숨겨야 했다.

“비토한테 알려줄 생각은 아니지?”

“언젠가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비토는 앨런이 얻은 룬문자를 다룰 능력도, 자격도 아직은 부족했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을 망칠 확률이 높았다.

“감당하지 못할 지식은 재앙의 근원입니다.”

“너는?”

“전 괜찮습니다.”

테일러는 뻔뻔함과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조심하라고 하긴 했지만, 무릇 청년이라면 저런 기세를 지녀야 했다.

“많이 깨져봐야지. 가끔은 절망도 하겠···.”

테일러의 입술이 꾹 닫혔다. 생각해보니 앨런은 책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한숨을 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미친놈처럼 계속 웃기만 했지.

앨런은 아이스헨지에 더 머물려고 했으나, 테일러가 반대했다. 새로 얻은 룬문자를 완벽히 다루기 위한 연습과 접한 정보를 찾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상으로 복귀한 앨런은 카탄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찾아봤다. 당연히 제자들도 포함이었다.

“첫째 제자는 분쟁에서 사망, 둘째 제자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 셋째 제자는 실험 도중 사망, ···, 여덟째 제자는 찾지 말라는 기록을 남기고 실종. 왜 다 죽었거나 사라졌죠?”

“사고사일까? 타살일까?”

“누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

“카탄의 지식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제자들에겐 그걸 지킬 능력이 없었고.”

세상의 잔혹한 이면이었다. 마법공학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음에도, 야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높은 빌딩과 복잡한 거리는 또 다른 밀림이었다.

앨런이 왼쪽 눈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이 눈은···.”

“재봉사의 집 지하에도 하나 잡혀 있지 않을까?”

앨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갇혀있을 그 혹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테일러는 꿈나라로 떠나고, 시바는 어머님을 뵈러 가고, 앨런은 자는 척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꿈속 도서관이니 잠과 똑같으려나?’

앨런은 빈 책장을 차곡차곡 채우는 책들을 바라봤다. 만물을 이해하는 아카샤의 눈. 이곳을 그 시발점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어떤 현상이나 물체를 관찰함과 동시에 빅데이터로 분석하면 만물을 꿰뚫어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앨런은 도서관 구석에 있는 낡은 이부자리 위에 앉았다. 랑카에 있던 시절에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손을 대자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본래의 촉감인지, 미화된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해적이 쫓아오지만 않았어도···.’

카탄의 제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약 카르텔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건 앨런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오히려 몰두하게 된다고 할까.

‘카르텔의 두목은 제자들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자의 신상에 대해 궁리하는 듯했지만 정작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앨런의 눈이 보기 드물게 사나워졌다.

‘아로마아에 있는 노예 상인은 그 해적들이 누군지 알겠지.’

다음 날 아침, 깨어난 앨런을 본 상자는 까불거리지 않았다.

< 아이스헨지(5)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