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미로(1) >
사람의 뇌는 개구쟁이라 무언가를 잊으려 하면 오히려 떠올린다. 그 이미지는 점점 선명해지고, 나중에는 뇌리에 박혔다.
누군가가 ‘개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하지마.’라고 명령하면 듣는 이의 머릿속은 어떨까.
앨런도 비슷한 현상을 겪는 중이었다. 애써서 잊고 있었는데 카탄과 제자들의 행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로마아와 해적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망각하려 해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덩치를 부풀렸다. 마법공학 논문을 읽어서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허사, 파워슈트 개조에만 몰두하려고 노력해도 마찬가지의 결과만 나타났다.
앨런은 요새 묘하게 얌전해진 상자를 힐끔 보다가 창고 구석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창고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개인실이 주인을 반겼다.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으며 삼라만상에 접속했다.
온갖 마법, 그중에서도 특히 환상과 정신계열 마법을 많이 접목한 가상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또 다른 도시를 만들어냈다.
평범한 도시는 아니었다. 운해를 뚫고 세워진 빌딩들이 사방에 즐비했고, 광고판을 몸에 새긴 거대한 고래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앨런이 나타나자,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해커들은 뇌 확장 장치도 없이 감히 접속한 사람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고 했다.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잠수부 스킨을 입은 해커가 앨런을 향해 작살총을 겨눴다. 몸을 꿰뚫려도 아프진 않지만, 맞는 순간 온갖 마법이 정신을 잠식하리라.
작살이 앨런을 향해 날아왔다. 삼라만상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을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력과 정신력.
앨런은 작살의 끝을 슥 바라봤다. 그리고 쇠꼬챙이의 첨단이 자신이 아니라 해커에게 향하길 원했다.
“끅!”
바람은 이루어졌다. 작살에 이마를 꿰뚫린 해커가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죽지는 않았어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리라.
“잠깐, 저 새끼는? 야 글렀다.”
누군가가 앨런을 알아봤다.
“저게 누군데?”
“몰라. 정신방벽도 없이 접속하는 미친 새끼 있어.”
해커들은 상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운해 속으로 잠수했다. 구름 아래에는 온갖 찌꺼기와 위험한 파편들이 가득하지만, 저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앨런이 상어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경찰의 표식을 달고 있는 가오리가 슥 나타나더니 놈을 삼켜버렸다.
잠깐의 소란이 끝났으니 랑카의 소식을 찾아볼 시간이었다. 키워드를 떠올리자마자 몸이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온갖 크기의 석판이 나타났다. 앨런은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석판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을 잡아챘다.
‘랑카의 소식. 작성은 한 달 전.’
비교적 최근이라 바로 글자를 읽었다. 랑카는 여전히 솔도스의 경제적 식민지였다. 내전은 수시로 발발했고, 국민은 항상 고통에 신음했다.
앨런은 또 다른 석판을 읽었다. 국제기구와 인권 단체가 랑카의 문제에 대해 호소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럴듯한 직함을 달고 있으니 목소리를 내고는 있어도, 감히 솔도스의 심기를 거스르려는 직접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결국, 세상은 야생.
그 어떤 사상으로 포장해도, 그 어떤 문명으로 나아가도 본질은 같았다.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나···.’
마주치는 모두가 경쟁 상대였고, 힘의 우열로 정해지는 자원 분배가 특히 그 부분을 부추겼다.
이번에는 사진과 영상이 첨부된 석판이 앨런의 눈앞을 지나갔다. 탈출하는 랑카인도 있으나 십중팔구는 바다가 무덤이 되었다. 살아남아도 미래가 밝진 않았다.
섬인 랑카에서 가장 가까운 땅은 남대륙인데, 같은 신대륙이면서도 솔도스가 있는 북대륙과 비교하면 치안이 안 좋았다.
마약 생산이 GDP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 갱단에게 무릎 꿇은 나라, 말만 연합이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부족 국가 등등.
‘그러니 해적도 활개를 치겠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을 잡았던 해적을 만나고 싶은데, 찾을 확률도 낮고, 테일러나 시바에게도 민폐였다. 혼자 가는 방법도 있지만.
‘아저씨가 절대 반대하겠지. 그러고 보니 여권도 문제고.’
일단 앨런은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메이즈시티는 특별자치시라 탐험가를 한다고 하면 너그럽게 봐주는 경향이 있지만, 어쨌든 본질은 그랬다.
카사라는 솔도스의 땅이었으니 이동 문제는 없었지만, 목적지가 해외라면 좀 달랐다.
‘마음먹으면 국경수비대는 피해 다닐 수 있지만, 너무 피곤해.’
앨런은 솔도스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렸다. 불법 입국 동지들이 이목을 끌어줘서 감시망을 무사히 벗어난 순간,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자연은 사람의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솔도스의 땅은 무식하게 넓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군과 식량 찾기를 생각하니 저절로 거부감이 들었다.
‘신청하면 정식 신분증이 나오려나?’
탐험가로 3~4년 정도 성실히 일하면,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의미에서 시민권을 받을 수 있긴 했다. 물론 평범한 탐험가일 때 그 정도 걸린다는 뜻이었다.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앨런이 자신을 되돌아보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삼라만상을 빠져나와서 테일러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니.
“1년이라도 설원까지 갔으니 될 것 같은데. 심도 4, 거기에 마법공학자니 고급인력이지. 잠깐 미궁에서 1년?”
“네. 1년 좀 지났는데 왜 그러세요.”
“그럼 생일잔치를 해야지.”
“네?”
“탐험가에겐 2번의 생일이 있다. 태어났을 때와 미궁에 처음 들어갔을 때.”
미궁 탐험 초기, 탐험가들이 지닌 장비는 형편없었고, 알려진 정보도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갑자기 생긴 수상한 공간문으로 들어간다? 맨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람과 문명은 도전과 시행착오로 발전했다. 매일 발생하던 사상자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1년을 살아남으면 또 다른 생일이라며 잔치를 벌였지.”
“안 챙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네 말대로 지금은 의미가 좀 달라져서 단순한 기념일이 됐지. 저번에 귀찮다고 태어난 생일도 안 챙겼잖니.”
“간단하게 밥이나 먹죠.”
“또?”
마침 창고 문이 열리며 시바가 안으로 들어왔다. 테일러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마침 잘 왔다. 이리 와서 감정이 메마른 녀석에게 기념일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 좀 해줘라.”
“음···.”
시바는 기대와 다르게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보던 테일러는 속이 답답해져서 물었다.
“너는 또 왜? 앨런처럼 답답하게 만들래?”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 설마 파문당했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우리마저 널 버리진 않을 테니 안심해라. 이제 술에다가 성수라는 이름 붙이는 짓도 그만하고.”
“형제님, 그게 아닙니다. 저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땡중이지. 평소에 하는 짓을 봐라. 기도할 시간 되면 우리 핑계 대고 빠졌지?”
“그걸 어떻게···.”
“살다 보면 알게 돼. 완전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하는 건 똑같거든.”
테일러가 실실 웃고 있으니 시바가 반박했다.
“그 부분은 어머님과 합의 했으니 문제없습니다.”
“꿈속에서?”
시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으니, 일단 저렇게 주장하면 반박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굳이 하려면 가능은 하겠지만, 입씨름으로 번질 뿐이었다.
“장난은 이쯤하고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꺼내 봐.”
“잠시 출장 갈 일이 생겼습니다.”
“출장? 다녀와. 나는 허락하마.”
테일러는 흔쾌히 수긍했다. 시바가 없으면 앨런이 지상에 머물 테고, 그러면 웨스턴스카이에 방문할 시간이 많아졌다.
“이참에 여행도 즐기고 오란 의미로 내가 좀 보태마. 길게 다녀와도 돼.”
주머니를 뒤져서 현금 칩을 찾고 있으니, 시바가 고개를 단호히 흔들었다.
“단순한 출장이 아닙니다. 카미로의 형제자매님들이 힘을 빌려달라고 연락했습니다.”
“카미로는 남대륙에 있는 나라잖아.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
테일러는 바로 삼라만상에 접속해서 카미로의 최근 이슈를 찾아봤다. 검색어를 입력하자마자 정보와 뉴스가 좌르륵 펼쳐졌다.
눈이 파랗게 빛나는 테일러는 자신이 보는 정보를 소리 내서 말했다.
“갱단이 모신교 지부를 폭파···. 오, 이런···.”
모신교는 강하게 행동하는 종교였다. 치안력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경찰을 자처하기도 하니, 범죄자들의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괜히 전투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수도승과 수녀를 육성하겠는가. 힘이 없으면 어머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신념을 지키기도 어려웠다.
“남대륙에도 수도승이나 수녀들이 있잖아. 그 친구들은?”
“모두 바쁘신 분들이라 여기까지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하긴 치안이 개판이라 몸을 뺄 수가 없겠네.”
폭력배 무리라고 우습게 보면 큰코다쳤다. 덩치가 큰 조직은 작은 나라 하나쯤은 압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 지원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말고 다른 형제자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원? 갱단 대···. 아니지.”
테일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는 ‘대가리 깨러 간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 하네.’라고 내뱉으려 했지만,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고?”
“괜찮습니다.”
파워슈트를 정비하며 이야기를 듣던 앨런은 둘 옆으로 다가갔다. 대화 속에서 낯익은 단어가 들린 탓이었다. 카미로. 마침 항구도시 아로마아가 있는 나라였다.
“저도 가겠습니다.”
“앨런 형제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도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말을 꺼내기 어려웠는데 마침 잘됐네요.”
테일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앨런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알기에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웨스턴스카이의 뚜렷한 형상이 점점 흐려졌다.
“앨런이 가면···, 나도···, 가마···.”
“형제님, 갑자기 숨결이 거칠어졌는데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
어쨌든 동료들이 힘을 보태준다고 하니 시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쪽의 덩치가 커지면 다치는 형제자매의 수가 줄어들 테니까.
“알라나 수녀님이 좋아하시겠군요.”
“정화봉사단을 이끄는 수녀님 말이죠?”
“리더는 아니고 높은 위치긴 하죠.”
앨런은 수녀를 떠올렸다. 검은 수녀복을 찢을 듯한 근육과 사나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강하게 생긴 분이셨죠.”
“오크와 드워프의 피를 이으셔서 그렇습니다. 덩치는 어머니, 갈색 피부색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두 종족의 혼혈이면 육체 성능이 굉장하겠군요.”
하긴, 그 정도는 되니 범죄자들을 통제하는 것이리라.
*
다음날, 알라나 수녀가 이끄는 시커먼 차들이 창고 근처에 나타났다.
문의 결과, 정식 신분증을 만들 수 있지만, 일주일이나 걸렸다. 여권까지 신청하려면 족히 2배는 더 걸리리라.
그런 이유로 앨런은 정화봉사단 소속으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기로 했다.
알라나 수녀가 차에서 내리더니 테일러와 손을 맞잡았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같은 의인이 많아야 세상이 살만할 텐데···.”
“하, 하, 하.”
테일러는 멋쩍게 웃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수녀의 덩치가 장난 아니었다. 개조를 통해 부풀린 자신과 거의 비슷했다.
“그쪽의 젊은 형제님도 고마워요.”
“헉!”
알라나 수녀가 윙크를 날리자 비명이 들렸다. 앨런이 낸 소리는 아니고, 근처의 차에 탑승한 봉사단이 내는 소리였다.
앨런이 차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노박을 따라 왔다가 사로잡힌 오크, 카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씨벌.”
미궁에서 테일러의 낚시에 걸렸던 구더기, 게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안녕.”
“세상을 위해 사는 모습을 보니 좋네요. 예전보다 훨씬 낫죠?”
“···.”
얼마나 좋은지 대답도 못 했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 병력수송 차량 구석을 차지한 앨런은 마도구를 매만졌다.
앨런에게 쫓겨난 봉사단원은 툴툴거리려다가 표범에게 한 대 얻어맞고 침묵했다. 그것도 잠시, 단원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최대한 많이 생포하자.”
“그래, 이 좋은 걸 우리만 누릴 순 없지.”
말투에서 굉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 카미로(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