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메라(5) >
앨런의 눈이 마법사가 지닌 무엇과 공명하며 미약한 진동을 만들었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스승이라는 말을 꺼냈으니 누군가의 제자겠지.’
적어도 재봉사 본인이 아닌 점은 다행이었다. 그녀가 여기에 있었으면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했으니까.
‘눈은 왜 반응했지?’
앨런이 고민하는 사이 흙먼지가 더 많이 걷혔다. 망가진 도시와 대비되는 맑은 밤하늘이 아래를 향해 별빛을 쏟아냈다.
마침 마법사가 후드를 걷으니 달빛이 검은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끝이 뾰족한 귀도 드러났는데, 인간과 비슷한 길이였다.
‘혼혈 엘프구나.’
순혈의 수를 압도한 지 오래라 그냥 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주치는 엘프는 거의 다 혼혈이라고 판단해도 좋았다.
“넌 뭐지? 그 눈은 어디에서 얻었고?”
“···.”
“침묵이 미덕일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닐 텐데.”
엘프가 오른손을 수평으로 털어냈다. 뾰족한 가시가 공기를 뚫고 날아와서 앨런의 몸을 두들겼다. 마력 방어막이 막아냈으나, 충격이 꽤 큰지 출렁거렸다.
“실력을 믿는다, 이건가?”
엘프는 앨런 일행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도시를 포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은 여길 찾아낼 능력이 없지. 너희는 외부인이겠군.”
엘프는 마법사답게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판단과 눈썰미가 꽤 정확했다.
“다량의 폭탄이 또 있진 않겠지. 마법사 하나, 고철덩이 하나, 더러운 종교쟁이 하나.”
“모신교에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쓸데없는 수식어가 붙는군.”
시바가 발끈하니 엘프가 피식 웃었다.
“사사건건 방해나 해대고 너희만 옳다고 설파하지.”
“우리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
“나는 사람 아닌가?”
“짐승이지. 교화 불가능한.”
“그거 아나? 너희가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힘. 사실 그건 마력의 분파다. 그저 하얀 빛을 입혀서 몽매한 것들을 현혹할 뿐이지.”
“신성력은 수단일 뿐. 제일 중요한 건 마음과 행동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따르는데 도와주는 도구지.”
“재미없긴. 그럼 시작···”
“잠깐만요.”
엘프가 팔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앨런이 말을 끊었다. 절묘한 끼어들기에 끓어오르던 마력이 차갑게 식었다.
“저 아래에서 무슨 연구를 하셨죠?”
“···.”
“비밀인가요? 그럼 도시는 왜 이렇게 만드셨나요? 그쪽이 벌인 일 때문에 많이 죽고 다쳤어요. 집을 잃기도 했죠.”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인가? 어차피 사람은 또 태어나. 금방 바글바글해지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투.
앨런의 어투도 변했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놈의 사람. 지겹게도 찾는군. 너는 왠지 모르게 우리와 비슷한 부류 같은···.”
엘프는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등장한 붉은 섬광이 몸을 관통하고 지면까지 닿았다.
굵기를 엄청나게 줄인 대신 사거리와 관통력을 증가시킨 열선이었다. 저격수는 근처 빌라 안에 숨어있던 표범.
“하···.”
엘프는 죽지 않았다. 분명 심장이 파괴되었는데도 멀쩡히 움직였다.
“내가 죽으면 목적은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그래서 머리는 놔뒀잖아.”
뇌 확장 장치는 저장소 역할도 해서, 주인이 사망해도 기억 일부가 남았다. 뇌 자체에서 정보를 뽑는 수법도 있지만, 그건 앨런의 영역 밖에 있었다.
“협조가 없어도 물어볼 방법은 많아.”
“하하. 내가 똑같다고 말했지?”
“···.”
앨런은 침묵했다. 엘프의 몸이 사라져서, 그의 위치를 찾느라 말할 여유도 없었다.
“정신 없이도 뛰어다니네. 특이한 은신 수법도 있고. 저러다가 공간이동으로 뿅하고 사라지진 않겠지?”
“공간이동 장치는 지반이 붕괴하며 망가져서 그러진 않을 겁니다.”
바닥을 강하게 밟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앨런의 왼쪽 눈은 소리의 진원지와 흙먼지에 남는 발자국을 계속 쫓았다. 물론 본다고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엘프가 손을 곧게 펴더니 손가락으로 앨런을 겨눴다. 무슨 마법을 부리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정작 발사된 물체는 손톱이었다.
발사한 순간에 가시로 변한 손톱이 방어막을 다시 두들겼다. 바닥에 떨어진 가시에는 불길한 액체가 묻어있었다.
“독입니다. 조심하세요.”
“독은 신체 한쪽으로 밀어내면 돼. 시바에게 해독 성법 써달라고 해도 되고.”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집중했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의 마법사는 화력이 강한 대신 느렸지만, 직접 본 마법사들은 죄다 날쌨다.
먼저 테일러가 나섰다. 리플렉스 액셀로 몸을 가속, 엘프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가루가 흩뿌려졌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엘프처럼 투명화하는 적에게 달라붙어서 위치를 드러내게 하는 물질이었다.
곧 가루가 뭉치더니 사람의 형태를 이뤘다. 위치가 드러난 엘프가 투명화를 해제했다. 테일러는 왼손에 든 샷건으로 적을 겨눴다.
쾅쾅쾅!
반자동 샷건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만큼 위력도 엄청나서, 탄환이 두들기는 곳은 벌집을 뛰어넘어서 가루로 변했다.
테일러는 탄환에 얻어맞은 엘프의 다리가 빠르게 재생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동시에 그의 손이 길쭉하게 변하더니 채찍처럼 휘어졌다.
마나소드와 채찍이 충돌하며 파문을 만들었다.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나며 다리 근처에 머물렀다.
“너도 키메라구나!”
“이건 진화라고 하는 거다.”
엘프의 손이었던 채찍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삐죽삐죽 솟은 가시는 독액을 줄줄 흘렸다.
“그게 진화면 난 퇴화하겠어.”
테일러의 말과 달리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채찍은 속도가 엄청 빠르면서도, 의지를 지녔는지 각각 다른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인조 피부가 점점 긁히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는 근육과 피 대신, 금속과 기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통이 없더라도 고장은 나는 법. 벌써 관절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엘프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마법사라더니 속도만 단련한 전사처럼 빠르기도 했다.
그때 테일러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테일러는 기술을 준비하는 시바를 목격하자마자, 날아드는 채찍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왼손이 거의 망가졌지만, 엘프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둘 순 있었다.
동시에 엘프를 향해 떨어지는 하얀 유성. 드워프 특유의 단단함을 믿고 낙하하는 기술, 추락하는 샛별이었다.
쿠웅!
흙먼지가 묵직하게 솟아올랐다. 그 속에서 시바의 몸이 튕겨져 나왔다. 찢어진 옷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반대로 테일러의 몸은 안쪽으로 당겨졌다. 덕분에 엘프의 모습이 잘 보였다. 한쪽 손을 거북이 등딱지처럼 변화시킨 상태였는데, 표면에 뾰족한 돌기가 가득했다.
엘프는 끌려온 테일러를 향해 등딱지를 휘둘렀다. 시바의 피로 붉게 채색된 돌기는 윤활유까지 발라져서 더욱 빛났다.
날아간 테일러는 시바의 근처에 착지했다. 먼지 속에서 엘프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겨우 이 정도인가?”
“그거 아나? 원래 전위는 마법사가 묘기를 부릴 시간만 벌어주면 돼.”
동시에 다시 날아든 붉은 섬광. 아까와 다른 위치에서 쏘아진 치명적인 광선이 엘프의 양다리를 꿰뚫었다.
균형이 무너진 순간, 어딘가에서 마탄 세례가 날아들었다. 지금까지 몸만 움직였던 엘프는 마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마탄은 폭발하지 않고, 작은 스파크만 뿜어냈다. 불발로 느껴질 만한 모습이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마탄은 [침투], [혼란], [차단] 등의 룬문자로 무장하고 있었고, 그건 마법사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이쯤에서 항복했겠지만, 엘프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체까지 변형한 술사라 마력 좀 흔들린다고 무너지지 않았다.
엘프의 이마에 촉각이 솟아올랐다. 촉각이 빠르게 꿈틀거리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구나.”
엘프는 잔해 속에 몸을 숨긴 앨런의 위치를 찾아냈다. 두드려봐야 별 이득도 없는 전위를 상대하는 것보다 마법사 하나를 끝장내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앨런까지 도달하는 길을 빠르게 계산하고 다리를 변형했다. 역관절로 꺾인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비스듬하게 세워진 잔해를 향해 이동하려는 순간, 엘프의 눈앞에 동그란 무언가가 떠올랐다.
펑!
도약 및 추적 기능이 있는 지뢰였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엘프의 이동 경로마다 깔려있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엘프의 몸이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끊임없이 재생했지만, 그보다 파괴가 더 빨랐다.
물론 엘프는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돌파해서 잔재주를 부리는 마법사를 끝장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점프하는 지뢰를 그냥 몸으로 받아냈다.
“어?”
원래 계획이라면 그랬다. 허공에 떠오른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끈적한 마력의 실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앨런은 [속박], [접착], [쇠약], [둔화]의 룬문자를 새긴 끈끈이 지뢰도 배치했고, 엘프는 훌륭하게 걸려들었다. 괜히 받아낼 수 있을 만큼의 폭발력만 지닌 지뢰만 배치했겠는가. 전부 엘프가 방심하게 만들려는 노림수였다.
그렇게 거미줄에 걸려든 엘프의 주위로 거미들이 몰려들었다. 배 부분에서 푸른 빛이 줄줄 흘러나왔다. 거미들은 먹잇감에게 날카로운 이빨 대신 폭발을 선사했다.
콰아앙!
앨런은 [공간간섭]으로 개입, 폭발의 충격파를 계속 내부로 돌렸다. 덕분에 엘프의 몸은 태풍 속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폭발이 끝나자 철퍽 소리와 함께 엘프가 바닥에 쓰러졌다. 피 투성이가 된 엘프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징그러운 생명력이었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붕괴한 지면이 들썩이더니 빨간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흐물흐물한 근육을 닮은 부정형의 키메라가 엘프의 몸에 달라붙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의 덩치가 빠르게 커졌다. 근육 일부가 두꺼운 갑각으로 변했고. 그건 마탄이나 샷건도 가볍게 방어했다. 철갑탄은 안쪽으로 뚫고 들어갔으나 덩치를 생각하면 큰 피해가 아니었다.
탄약 낭비라고 생각한 테일러가 샷건을 등에 멨다.
“왠지 쉽다 했어. 큰 화력이 아니면 힘들겠는데.”
“아깝게···.”
앨런의 말과 거의 동시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일러는 교차로 모서리에서 나타난 골렘 5형제를 목격했다.
“쟤들은 안 터트렸구나.”
“네. 그럴 생각이었죠.”
“뭐?”
심상치 않은 말에 골렘을 다시 살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무언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전부 마석 폭탄과 어딘가에서 떼온 마력로였다.
골렘이 갑각 근처에 접근하자, 변신이 끝난 엘프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5m가 넘는 근육질로 변했는데, 머리 크기는 똑같아서 승모근 사이에 파묻힌 형태였다.
비슷한 덩치의 골렘 5형제가 엘프를 꽉 붙잡았다.
“뭐, 뭐냐?”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 파동.
“설마?”
엘프는 앨런이 있는 곳을 봤지만 이미 자리에 없었다.
콰르릉!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테일러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강렬한 충격파 때문에 근처의 유리창이 모두 터져나갔고, 지진에도 버틴 건물이 깨지며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졌다.
“돈이 좋긴 좋아. 마석을 좀 넣었, 아니지 죄다 쏟아부어서 이런 위력이 나온 건가?”
테일러는 가만히 있는 앨런을 바라봤다. 어깨에 내려앉은 흙먼지를 털어줄 겸 살살 두드렸다.
“마석이 아니라 골렘 때문에 속이 쓰리지? 너무 상심하지 마라.”
“또 만들면 되죠.”
테일러는 앨런의 뒤를 따르는 상자와 표범을 슬쩍 쳐다봤다. 평소에는 사이가 안 좋은데, 비 맞은 강아지들처럼 딱 붙어있었다.
다시 전투현장에 도착한 앨런은 커다란 숯덩이를 목격했다. 대폭발 속에서도 원형을 유지했으니, 엘프의 마지막 수를 직접 상대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견적이 나왔다.
“큭!”
근육 속에 부속품처럼 끼워져있던 엘프가 기침을 토했다. 금방 죽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아직 살아있긴 했다.
“가···까이···.”
그가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앨런을 바라봤다.
앨런은 엘프의 소원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지자 엘프는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자폭이라도 하게? 하려면 방화벽이 약해지기 전에 했어야지.”
왼쪽 눈이 바이저를 뚫을 정도로 강한 빛을 머금었다. 엘프는 맹수 앞의 초식동물처럼 몸이 굳었다. 실제로 통제권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 키메라(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