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78화 (178/193)

< 키메라(6) >

폭파로 인해 오목하게 변한 지반에 5m 크기의 생체 갑옷이 누워있었다. 위협적인 모습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이제는 숯으로 변한 육체에서 엘프를 끄집어냈다,

갑옷 덕분에 형체는 보존했지만, 끔찍한 화상의 흔적들과 충격파로 인해 박살 난 부분들이 공존했다. 골렘 5형제가 피워낸 마지막 불꽃을 들이켰는지 호흡도 굉장히 불안정했다.

“금방 죽겠는데.”

“제가 살짝만 치료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도 앨런은 푸른 귀화를 눈에서 뿜어내며 엘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는 시바의 말을 듣고 혀를 깨물려고 턱을 움찔거렸으나, 앨런의 해킹 때문에 제지당했다. 사실 해킹이 아니더라도 빈사 상태라 그럴 힘조차 없어 보였다.

“어서, 죽여···.”

“그건 나중에. 먼저 알아볼 게 있어.”

엘프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말투를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앨런도 일단 말은 저렇게 했지만, 함부로 건들 순 없었다. 치료 전문 수녀들이 일렉토의 지부장을 강제 개종하려다가 터진 토마토로 만들지 않았던가.

고민하고 있으니 시바가 도시 밖, 주둔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신할 때 뿜어지는 푸른 안광은 앨런의 개조로 인해 사라졌지만, 특유의 마력 신호가 미세하게 퍼졌다.

1분 정도 흐르자 시바가 입을 열었다.

“형제님, 통신이 재개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길 박살 내서 그래. 보람찬 하루였다.”

“어머님 대신 제가 칭찬하겠습니다. 대니 사제님도 시민들을 이끌고 무사히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남아있는 시민들은? 더 있을 것 같은데.”

“키메라들이 목적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격성도 낮아졌다고 합니다.”

“보이면 쫓지만, 굳이 찾아가진 않는다는 말이지? 안전하게 숨은 시민만 살아남았을 테니, 한동안 버틸 순 있겠네. 군대도 눈치가 있으면 정리하러 들어오겠지.”

“네. 날이 밝으면 진입한다고 합니다. 금방이겠군요.”

테일러는 앨런 옆으로 다가가다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바이저 안쪽에서 푸른 귀화가 꿈틀거렸다.

“고민은 끝났어?”

“장치와 뇌 사이의 신호를 속이면 될듯합니다. 제가 중계기 역할을 맡은 사이, 수녀님들이 장치를 꺼내면 되겠죠.”

“그냥 여기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니니? 아, 아니구나. 아직 죽이면 안 되지.”

오래 살며 쌓인 경험 덕분에 앨런의 속내를 바로 눈치챘다.

장치에 기억이나 정보가 남아있겠지만,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서 마냥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살려두고 장치에서 빼낸 정보의 진위를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세밀하게 조사할 필요도 없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어떻게?”

“신체의 반응과 마력의 변화가 알려주겠죠.”

엘프 마법사에겐 속일 능력이 있으나, 지금은 빈사 상태라 그럴 수 없었다. 은근슬쩍 떠보기만 해도 심장이 펄떡펄떡 뛰리라.

주둔지로 복귀하는 도중 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군대는 햇빛을 등지고 천천히 진입하는 중이었다.

큰 소음에 이끌린 키메라들이 하수구, 폐건물, 골목길 등에서 튀어나왔으나, 사령탑을 잃어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대니 사제는 앨런의 이야기를 듣더니 성직자들을 끌어모았다. 치료실로 쓰는 텐트 하나에서 수술을 시작했다.

머리 폭발을 막으려면 뇌와 장치를 속일 필요가 있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신호를 계속 전달해야 해서, 거미들이 엘프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장치를 읽어내기 전에 성직자 몇 명이 엘프를 둘러싸고, 또 다른 이들이 둥글게 모여서 허공에 하얀 구체를 띄웠다. 구체는 똑같은 색의 실을 뽑아내서 엘프의 머리에 접촉했다.

앨런이 그쪽으로 시선을 주니, 시바가 말했다.

“옛날에 이단심문관이 사용하던 수법입니다.”

“성법이 아니라 수법이요?”

“실토하게 하는 과정에서 뇌가 망가집니다. 잊고 싶은 그림자지만, 효용은 인정해서 아직 남겨두고 있습니다.”

모신교의 구성원도 사람이다 보니 잊고 싶은 역사가 존재했다. 예를 들면 이단 심문과 무차별 화형.

물론 지금 세상에 이단 심문으로 누군가를 불태우면 대서특필된다.

사실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꼴을 보면 정신 지배는 특별하지도 않겠지만, 원래 사람들은 고고한 누군가에게 때가 묻으면 더욱 관심을 가지는 법이었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미를 통해 증폭된 신호가 서서히 엘프의 머릿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조작된 신호가 본래의 것을 치우며 빈자리를 채웠다.

단편적인 장면 혹은 문구가 앨런에게 전달되었다. 정상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지, 작은 조각마저 빠르게 사라졌다.

달빛조차 없는 밤에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다치고, 집중하지 않으면 길을 잃었다. 자연스레 집중력이 빠른 속도로 깎여나갔다.

앨런은 최대한 노력했다. 접속한 지 겨우 5분이 지났는데 땀이 뻘뻘 났다. 그 와중에도 조각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자유를···.]

[우리가 거래할 입장이던가?]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하겠습니다. 그 결과는 스승님께 바치겠습니다. 대상은 카미로···.]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시간을 내달라고 했니? 그따위 일은 하나하나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해.]

[금제는···.]

[성공해서 결과물을 들고 오면 풀어줄게. 성공할 수 있다면. 아, 괜히 내 이름 대지 말고. 방해받기 싫으니까.]

기억 속의 재봉사, 얼굴이 흐릿한 그녀는 무언가에 열중해서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듯이 손을 휘젓기만 했다.

정보 몇 개를 건져내고 눈을 뜨니, 대니 사제와 알라나 수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어린 형제님, 무언가를 알아냈는가?”

“좋은 소식이 있어요. 재봉사는 카미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정말인가?”

“엘프 마법사와 제자 몇몇이 이번 사태의 주동자예요. 이들은 어떤 실험으로 성과를 얻고, 그 결실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려고 해요.”

“재봉사에게서 벗어나겠다? 거래하려면 상대방도 알고 있어야 하니 재봉사도 인식하고 있단 말이로군. 제자들이 실패해도 가만히 있겠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가웠어요. 그 안에는 기대의 조각조차 찾기 힘들었죠.”

“후···.”

대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피해가 재봉사 본인도 아니고 제자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 탓이다.

“도대체 어떤 실험이기에 나라 하나를···.”

카미로가 작은 나라긴 해도, 나라는 나라. 감히 소수의 인원이 도전할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력과 신비가 존재하는 세상이라,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혹시 그것도 알고 있는가?”

“아뇨. 거기까지는···.”

“그 정도도 충분하니 자책하지 말아라. 아직 엘프가 남아있으니 그에게 물으마.”

앨런은 얻은 정보를 풀어냈다. 엘프의 동료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무슨 꿍꿍이인지,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말을 마치자 대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럼 이제는 엘프에게 물어볼 차례구나.”

“끄억!”

대니가 말을 끝내자마자 엘프가 비명을 질렀다. 단말마가 소리로 표현된 것이다.

성직자들이 얼른 달라붙어서 살려보려 했지만, 신성력을 퍼붓는다고 시체가 살아나겠는가.

조사가 대충 일단락되고, 고생한 사람들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앨런과 테일러는 텐트로 돌아왔고, 시바는 다친 시민들과 군인들을 치료한다고 모신교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다.

샤워를 마치고 야전 침상에 앉자, 테일러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몰라?”

“네.”

“그거 아니? 너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이지만, 거짓말할 때의 버릇이 있어. 나 정도가 아니면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마라.”

테일러와 함께 지낸 지 1년. 얼굴만 본 게 아니라 동고동락했으니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아니에요.”

“아님 말고.”

앨런의 예상대로 테일러의 떠보기였다. 버릇?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있더라도 자신이 먼저 알았으리라.

“그럼 목적이 뭐지?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하기에 이 지랄를 벌여놨는지···.”

“사실 알아요.”

“모른다며.”

“거짓말이죠.”

“······.”

앨런은 테일러의 주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알아낸 정보를 말했다.

“이들은 육체를 만들고 싶어 해요.”

“사람을 그리 갈아 넣었으니 평범한 몸뚱이는 아니겠구나.”

“카탄과 똑같은 몸이요.”

“뭐?”

테일러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갑작스레 거물의 이름이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카탄이 죽고 나서 시체는 사라졌지. 일각에서는 덩치 큰 조직들이 나눠 가져갔다는 속설이 있는데, 재봉사도 일부를 챙겼나?”

“그건 사실 같아요.”

세상은 그를 위대한 마법공학자라고 부르나, 사실 그런 별명을 획득할 정도면 마법사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존재의 육체가 주인을 잃었는데 누가 마다할까.

카탄은 제자를 키우긴 했으나, 깊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와 비슷하게 가족이나 친한 조직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몸을 거둬줄 사람이 있겠는가.

“도덕을 제쳐두고 생각하면, 여기저기서 군침 흘릴 만해. 재봉사도 마찬가지였겠지.”

이명이나 키메라 사태만 봐도 그녀가 어떤 마법을 파고들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생명 마법이 그녀의 전공이리라.

“잠깐. 챙겼으면 거기에서 뽑아낸 유전자로 만들면 되잖아. 그녀의 마법이라면 쉬울 텐데. 뭐, 안되니 제자들을 부추긴 것 같다만.”

“카탄의 몸에는 수인, 라이칸, 인간, 오크, 고블린, 드워프, 엘프 등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종족의 유전자가 조금씩 들어가 있대요.”

“뭐?! 난 여태 그가 인간인 줄 알았는데···. 너도 사진 봐서 알겠지만, 다른 종족의 특징 자체가 아예 없어.”

“그건 저도 알죠. 하지만 이상하게 안 만들어진대요. 그래서 실험이 필요했고, 카미로의 시민들이 희생됐죠. 모신교는 걸림돌이니 치우려고 했고요.”

“역시 주문쟁이들 머리에는 도끼를 박아줘야 해.”

“갑자기 도끼는 왜요?”

“옛날에 서방 대륙의 추운 곳에서 온 전사가 그런 말을 했거든. 마법사 혐오자였지.”

주제를 벗어난 대화는 금방 끊어지고,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카탄, 그 양반. 자기 몸에다 이것저것 실험해서 유전자가 섞였나? 그쯤 되는 사람이면 상식으로 재단하기 어렵긴 하지. 나사가 빠져있다고 해야 하나.”

테일러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더니 앨런을 가만히 지켜봤다. 점점 부담스럽게 변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만 자자.”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며칠이 지나자 시바가 텐트로 돌아왔다.

“슬프지만, 차근차근 해결되고 있으니 기쁘기도 합니다.”

“놈들도 모신교가 이리 빨리 대응할 줄 몰랐겠지. 아니면 후딱 해치우고 튀려고 했는데, 일이 지지부진했든가. 다음은 어디로?”

“앨런 형제님 덕분에 형제자매님들이 적을 추적 중입니다. 예상 경로는···.”

시바의 눈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평평한 지도가 떠올랐다. 카미로의 지형과 속해 있는 도시가 표시되었다. 카미로 각지에서 움직인 화살표는 항구도시 아로마아로 향했다.

“배 타고 도망갈 생각인가? 금제는 어떻게 하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앨런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엘프의 인공 안구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눈과 공명할 만한 물체는 이것 말고는 없었다. 비록 지금은 폭발 때문에 망가졌지만.

다른 제자도 동류니 비슷한 매직웨어나 마도구를 지니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전부 인공 안구려나?’

모든 마법공학자의 숙원은 만물을 이해한다는 아카샤의 눈이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앨런의 눈은 아로마아에 고정되었다. 노예 상인은 해적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 키메라(6)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