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로마아(1) >
앨런은 깨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여니 바다 특유의 냄새를 담은 바람이 안쪽으로 훅 들어왔다.
아로마아는 산이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며, 바다와 가까운 곳은 평지, 나머지는 경사진 지형이었다.
산비탈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건물을 지었기에, 대부분 집에서 바다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항구. 드나드는 배와 차가 활기를 불어넣었다. 아로마아의 시민들은 유유자적함을 사랑했지만, 항구에서만은 달랐다.
아로마아는 항구 도시이며,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대양과 인접했기에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돈이 오가면 사람이 몰려들기에 피스토와 아바로를 합친 것보다 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이 새끼들 도대체 어디에 숨었냐. 분명 여기에 있는데 도시가 너무 넓어.”
막 잠에서 깨어난 테일러가 앨런과 같은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로마아에 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마법사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래도 테일러가 확신하는 이유는 있었다. 모신교는 도시를 봉쇄했다. 해군의 협력을 받아서 바다를 틀어막았고, 개인 항공기를 가진 부자들도 협조했다.
공간 학파의 마법사까지 데려와서 혹시 모를 사태까지 미리 방지했으니, 적들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장거리 공간문이 그리 쉬운 마법도 아니고, 오히려 이쪽의 성능이 더 좋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문제는 아바라처럼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데, 사실 그러면 죽겠다는 소리죠.”
“그래도 진행하면?”
“아바라가 작은 도시여도 그런 짓을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훨씬 거대한 아로마아는 말할 것도 없죠.”
추적자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약간의 이상만 생겨도 바로 알아챌 가능성이 컸다.
“모신교의 영향력이 참 강해.”
“의료 자체가 힘이죠. 그 부분이 신에 대한 믿음보다 강하지 않을까요?”
“하긴, 부자들도 몸에 뭔 일이 생겼을 때 친한 치료사나 의사가 곁에 있으면 좋지. 성직자도 사람이니 기왕이면 그런 사람을 먼저 치료해줄 거고.”
“크흠!”
침대에 누워있던 시바가 일부러 기침했으나, 그도 공감하는 사실이라 뭐라고 하진 않았다.
앨런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늘은 다른 곳에 들려볼까 해요. 그동안 모신교를 위해 일했으니, 잠깐 정도는 내 시간을 가져도 괜찮겠죠?”
“어차피 안 보이는 놈들 죽어라 찾기보다 방향 전환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저도 찬성입니다.”
일행이 동의하자 바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방문한 장소는 산비탈 중간, 노박 클리닉이 있는 위치였다.
멀리에서 봐도 버려진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담은 넝쿨로 뒤덮여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공터에는 풀이 무성했다. 깨진 유리 안쪽에도 녹색이 언뜻언뜻 보였다.
“여기냐?”
“네.”
“네가 이룩한 결과물을 본 감상이 어때?”
“아주 좋네요.”
파워슈트를 입은 사람, 덩치 큰 노인, 단단하게 생긴 드워프가 모여 있으니 시민들이 슬그머니 피해 다녔다. 물론 그중에서도 오지랖 넓은 사람은 있었다.
근처 건물의 2층 유리창이 열리더니 어떤 아저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매직웨어 수리하러 온 사람?”
“네. 지도를 보고 찾아왔는데 가게가 없네요.”
“누가 옛날 정보를 팔았나 보네. 거기 망한 지 꽤 됐어. 어느 날 밤에 폭음이 들리더니 일하는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라고. 노박 사장도 그 후론 안 보이니 분명 죽었을 거야. 싸게 수리해주던 사람이었는데 안타깝게 됐지.”
아저씨는 죽은 노박을 딱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면 값싼 수리점을 잃은 자신을 연민할 수도 있고.
옆 창문이 열리더니 족제비 라이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앨런과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뒤가 구리다는 말이 있던데.”
“직접 봤어?”
“깡패랑 이야기하는 건 봤지. 분명 거래 관계일 거야. 조수를 그렇게 많이 데리고 있던 것도 수상하잖아.”
“죽은 사람 일이라고 섣불리 짐작하지 마. 카르텔이 협박했을 수도 있어.”
친구 관계로 보이는 둘이 갑론을박하는 사이, 앨런은 클리닉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앨런은 굳이 노박의 진실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초면인 사람이 말한다고 믿어주기나 할까. 어쨌든 다른 조수나 아이들이 무사히 탈출했다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애초에 노박은 자신을 쫓느라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빈사 상태가 되어서 더욱 그랬고.
시민들의 입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들리자, 시바가 중얼거렸다.
“의외로 평이 괜찮았군요.”
“내 일이 아니면 관심 가지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삼라만상이라 불리는 가상공간의 등장으로 세계는 더 넓어졌지만, 시야는 이상하게도 좁아졌죠.”
“삼라만상에서 만나는 사람은 어차피 금방 헤어질 테니 아무런 부담도 없지만, 현실의 사람은 다릅니다. 예절, 상대의 호오, 평판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형제님, 그럼 다음은 어디로?”
“거기지?”
테일러가 알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예. 노예상인을 보러 갈 거예요.”
“노예···.”
시바가 말끝을 흐렸다. 노예제도가 사라진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분명히 존재했다. 말만 시민이지 노예처럼 사는 사람도 꽤 있고.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사실 겸사겸사 가는 거라 아직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모신교도 정화봉사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성직자고, 올곧음을 좇는 사람들이다 보니 행동에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노예상인은 그늘에서 살기에 표면적으로 접하기 힘든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테일러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뒤집어엎으면 참 편해. 알아서 하나둘 기어 나오기 마련이거든. 그중에는 마법사들의 소재를 아는 놈도 있겠지.”
앨런은 항구 근처의 상점 거리에 있는 무기상으로 들어갔다. 리볼버, 검, 폭탄 등 온갖 마나웨펀이 가득했다. 제 몸을 지킬 무기 하나 정도는 갖추는 게 상식이라, 힘쓰는 일과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손님도 있었다.
주변을 쓱 둘러보고, 마석을 닦는 점원에게 다가갔다. 앨런이 앞에 오자 직원이 씩 미소 지었다. 금이빨이 반짝였다.
“파워슈트라. 무장 수준이 상당하시군요. 그래도 여기에는 손님을 만족시킬만한 상품이 있습니다. 지금 없더라도 요청하면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표적지를 사고 싶은데요.”
“마침 가게 지하에 연습장이 있습니다. 표적지도 있고, 날붙이를 위한 허수아비도 마련되어있죠.”
“생동감 넘치는 표적은 없나요?”
“어떤 종류를 원하시는지···.”
“아침에만 네 발로 걷는 게 좋겠네요.”
“아~. 그거라면 저를 따라오시죠.”
직원이 마석을 내려놓더니 구석진 곳으로 앨런 일행을 안내했다. 방검복 등의 의류를 갈아입을 수 있는 탈의실이 있었다.
먼저 안쪽에 들어간 직원이 손짓하자, 테일러가 통신을 걸었다.
[방금 그건 암호니?]
[네. 저건 탈의실이면서 엘리베이터기도 해요. 이곳의 지하는 항구와 이어져 있어요.]
[노예상인은 지하에 있겠구나.]
원래 비밀스러운 일은 지하에서 하기 좋았고, 그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힘 있는 자들은 공공연하게 노예를 부린다지만, 일단 불법적인 일이긴 했다. 기왕이면 눈에 안 띄는 편이 좋았다.
마침내 탈의실의 모습을 빌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짙은 회색으로 칠해진 통로가 앞에 나타났다.
“제가 먼저 가서 문을 열겠습니다.”
직원이 후다닥 뛰어가더니 엘리베이터와 마주 보고 있는 문을 개방했다. 그런데 기다리기는커녕 안으로 쏙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암호가 틀렸나 보네.]
[바뀌었나 봐요.]
추측이 맞았는지, 스피커를 통해 직원의 음성이 들렸다.
“뭐 하는 놈들이냐?”
“당연히 거래하러 왔죠.”
“지랄하지 마. 옛날 암호 말하면 내가 ‘다음부터는 주의하세요.’하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나 본데···.”
기이잉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과 벽면에서 자동 포탑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포구를 앨런에게 겨누었다.
“이젠 말할 생각이 들어? 잠깐. 너희 혹시 모신교 따까리냐? 그 새끼들이 들쑤시고 다녀서 장사하기도 어려운데 마침 잘됐어. 일단 조져놓고 물어보면 되겠지.”
“저랑 비슷한 생각이네요.”
“미친놈. 지금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거···.”
직원의 말이 끊겼다. 분명 저들을 겨누고 있어야 할 포탑이 포구를 문 쪽으로 돌렸다. 문이 아무리 튼튼해도 포격을 맞는다면 뚫리기 마련.
직원은 뒷걸음질 치려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어, 어?!”
크르르
나지막한 으르렁거림에 직원의 몸이 굳었다. 실제로 음성에 담긴 마력이 근육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웬 거대한 기계 표범이 눈앞에 나타났다. 평소와 똑같은 풍경 속에서 갑자기.
“도대체 어디에서···, 컥!”
직원은 표범의 앞발에 뺨을 얻어맞고는 풀썩 쓰러졌다. 벌린 입 사이로 금이빨이 툭 튀어나왔다.
처치를 끝낸 표범은 꼬리를 단말기에 꽂았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앨런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은 어디에 있죠?”
“···.”
앨런이 눈치를 주자, 금이빨을 줍던 상자가 집게발로 직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높아지며 앨런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잘 알죠. 배 나온 엘프가 운영하는 노예상점.”
“엿이나 먹어. 퉤!”
앨런은 끝까지 충성심을 지키는 직원에게 대가를 선사했다.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더니 인공 안구에서 스파크가 튀고,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죽었니?”
“아뇨. 대신 인공 안구와 뇌 확장 장치를 망가트렸어요.”
“암실에 홀로 갇힌 기분이겠네.”
“일단 가죠.”
앨런 일행이 먼저 움직이고, 직원의 몸을 뒤지던 상자도 얼른 뒤를 따랐다.
계속 비슷한 양상이 이어졌다. 만나는 직원들은 앨런을 제지하려다가 벼락 맞은 새처럼 바닥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방어시설은 오히려 직원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렇게 도착한 사장실. 테일러가 굳게 닫힌 문을 걷어차려다가.
“어, 어?”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앨런, 미리 말이라도 해야지.”
“전 아저씨가 갑자기 나설 줄 몰랐죠.”
“크흠. 사장 얼굴이나 보자.”
배 나온 엘프는 머리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착용하고 무언가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예 푹 빠졌구만. 이러니 밖에서 난리가 나도 모르지.”
테일러가 기기를 강제로 벗기자 엘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시발. 어떤 새끼들이!”
“일단 바지는 입고 말하지.”
테일러의 말에 엘프가 바지춤을 재빨리 추슬렀다. 최대한 태연해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처음에 보인 꼴이 너무 강렬해서 그리 효과적이진 않았다.
노예상인이더라도 일단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라 그런지 갑작스러운 사태에도 금방 감정을 가라앉혔다.
“너희는 처음 보는 얼굴이군. 혹시 모신교가 고용한 용병인가?”
“···.”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필요도 없어. 카르텔은 요즘 설설 기고 있으니, 나대면 분명 그쪽 소속이겠지.”
앨런이 앞으로 나서며 책상에 양손을 얹자, 엘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쪽이 대장이야? 난 저 노인네가 대장인 줄 알았는데. 일단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싫은데요.”
상자가 집게발로 엘프의 입술을 꼬집었다. 꽤 강력하게 짓눌렀는지, 그 부위가 금방 빨개졌다.
이름을 교환하는 행위는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한 통과의례고, 앨런은 노예상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는 싫었다.
[호랑이 용병은?]
[게릭 씨요? 말리기도 전에 내뱉는 바람에 맥이 끊겼죠.]
[원래는 뭐 하려고 했구나.]
[용병은 무슨 매직웨어를 쓰나 뜯어보려고 했어요.]
[오···.]
앨런은 통신을 정리하고 엘프에게 물었다.
“혹시 소문 못 들었나요?”
“무슨 소문”
“이쪽으로 도망쳐온 마법사요.”
“전혀···. 악!”
테일러가 엘프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눈깔 튀어나올 뻔했잖아. 이거 진짜 눈이란 말이다!”
“아, 순수주의자였어? 어쩐지 매직웨어 특유의 신호가 안 느껴지더라니. 일단 모르는 척 그만하고 아는 것 좀 털어놓아 봐.”
테일러가 엘프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옆자리를 차지했다. 앨런도 마찬가지로 옆에 앉았다.
“진짜 몰라! 너희들이 부린 난장판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안 할 테니, 다른 이유 없으면 당장 나가!”
“사실 다른 목적도 있어요.”
“뭔데?”
“괴롭히려고 왔죠.”
“···.”
앨런의 말에 노예상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 못 한 말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통신구가 반짝거렸다. 누군가가 통신을 시도한다는 의미였다. 원래는 엘프의 인증이 있어야겠지만, 지금은 앨런이 옆에 있었다.
해킹당한 통신구가 누군가의 음성을 내뱉었다.
[잠수함 준비는 끝났다. 전에 말했던 손님은 어디로 태우러 가면 되나?]
손님이란 말에 앨런이 엘프를 쳐다봤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아로마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