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80화 (180/193)

< 아로마아(2) >

가야 할 위치를 묻는 통신구, 눈과 입을 닫은 엘프 노예상인. 이쪽의 대답이 없으니, 저쪽에서 채근했다.

[이봐. 또 딴짓하나? 그냥 시술받으라니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빨리 말해.]

“···.”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테일러가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뽑아버리겠다는 듯이.

“윽···.”

[오래 본 관계니 한마디 하지. 그러다 뼈 삭으니 적당히 해라.]

고통 때문에 낸 소리를 다른 신음으로 해석한 걸 보면, 엘프의 평소 행실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3번 위치로 와라. 친구와 약속한 시각은 3일 후 새벽 1시다.”

[친구에게 대금은 치렀나?]

“당연하지. 그 새끼들이 어떤 새끼들인데.”

[알았다. 적어도 자정까지는 도착해라.]

그 말을 끝으로 통신구의 빛이 꺼졌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으나, 모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당연히 추궁이었다. 엘프는 순수 육체를 지녀서 해킹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앨런은 엘프의 몸에 구속구를 채웠고, 테일러는 어디에서 가져온 쇠꼬챙이를 구부려서 갈고리로 만들었다. 시바는 모르는 척하며 기도를 드렸다.

순식간에 의자에 고정 당한 엘프가 앨런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 묻지도 않고 고문하려고?!”

“동업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뭐?”

앨런은 엘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상자의 서랍에서 쇠막대기 2개를 꺼내서 그의 허벅지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아래를 향해 당겼다.

“악!”

바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함께 주리를 틀던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댔다.

“맛보기인데 벌써 이러면 나중에는 어떻게 참으려고? 지금은 허벅지에 해서 근육만 아프지? 이걸 정강이 부분에 하면 어떻게 될까?”

“···.”

“자, 보여줄게.”

테일러는 삼라만상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진 사진들을 찾은 후, 허공에 띄웠다. 유혈이 낭자한 모습에 시바의 기도 소리가 절로 커졌다.

엘프는 노예상인이라 이 정도 장면에는 익숙한 듯했지만, 동공이 살짝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악!”

테일러가 막대기를 아래로 누르자, 다시 엘프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가 있다는 말도 없이 3번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는 협력할 의사가 있어 보이는데 왜 이리 버틸까?”

“먼저 질문을 해야 말을 하지!”

“아, 그랬나?”

앨런은 테일러의 시선을 받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괴롭히려고 왔으니 일단 고통을 먼저 맛보게 한 것이다. 앨런이 쇠막대기에서 손을 놨다.

“통신한 사람, 그쪽이 언급한 친구의 정체, 3번 위치, 손님. 4가지에 대해 말하세요.”

“그럼 풀어줄 건가?”

“아뇨.”

앨런의 대답에 엘프가 인상을 썼다. 뱃살이 푸들푸들 떨리는 모습은 덤이었다.

“그럼 내가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통 속의 뇌가 되는 것보단 나을걸요.”

통 속의 뇌. 보통은 우리가 진짜 혹은 가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형벌로 존재했다.

강력한 범죄자의 뇌와 몸을 분리해서 따로 보관했다. 차라리 사형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워낙 잔혹한 형벌이라 사라지는 추세였다.

앨런의 말을 들은 엘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낄낄댔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너, 내 상품이었구나? 모신교의 일로 쳐들어온 것까지는 이해한다지만, 그 후로도 이어지는 비합리적인 태도가 계속 거슬리긴 했지.”

“···.”

“헬멧 때문에 표정이 안 보여서 아쉽네. 어디 마음대로 해봐. 내가 입을 여나.”

처음에 보였던 약한 태도가 거짓말이라는 듯 태도를 싹 바꿨다. 이것이 엘프의 진짜 모습이리라. 엄연히 불법적인 일로 먹고사는 조직의 수장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까 뚫린 입이라고···.”

“손만 더러워지니 하지 마세요.”

테일러가 상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이빨부터 뽑으려 했지만, 앨런이 제지했다.

“왜?”

“정화봉사단에서 열심히 일하려면 밥을 잘 먹어야 하잖아요.”

말을 마친 앨런은 방에서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분명 어딘가에 장부가 있을 거란 말이죠. 책상 위의 단말기나 디스플레이 장치에는 외설물만 가득하고···.”

그렇다고 머릿속에 전부 저장해두는 건 말이 안 됐다. 심지어 상인은 뇌 확장 시술도 안 받은 몸뚱이였다.

앨런의 발걸음이 책장 앞에서 멈췄다. 패션, 경제, 성인 잡지가 가득했다. 상인은 최대한 그쪽을 안 보려고 했지만, 앨런은 이미 잡지를 하나씩 빼고 있었다.

“기억수정, 뇌 확장 장치. 정말 편리하죠. 하지만 해킹에 취약해요.”

테일러는 ‘너니까 그렇겠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참았다.

“반면에 손글씨는 해킹하기 어렵죠. 이걸 어떻게 해킹하겠어요?”

앨런이 잡지 하나를 펴서 상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표지와 일부 페이지는 진짜 잡지였고, 나머지는 거래 품목이 적힌 장부였다.

“협조할게.”

엘프가 다시 태도를 바꿨지만, 앨런을 무시하며 잡지들을 천천히 넘겼다. 테일러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빨간색 잡지를 챙겼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앨런이 몸을 일으켰다.

“대충 알겠네요. 통신한 사람, 그러니까 잠수함의 주인은 해적, 손님은 마법사들, 친구는 매수당한 해군이겠네요.”

“그래도 3번 위치는 모르겠지? 보아하니 한 번 한 약속은 지킬 것 같은데, 풀어주겠다는 말만 하면 바로 말하겠다.”

“그건 모신교 성직자분들이 알아내실 거예요. 시술을 받으면 말하고 싶어질걸요.”

앨런의 연락을 받은 성직자들이 방문해서 강제 개종을 진행했고, 언제 마법사들이 연락할지 몰라서 일단 상인이 자리를 지키게 했다.

그날 밤, 다른 침대에 누워있던 테일러가 물었다.

“해적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건 지금 일을 끝내고 나중에 해도 돼요. 지금 물어보면 계속 그 생각만 나겠죠.”

“그래. 얼마 안 남으니 일단 무사히 끝내자.”

*

약속한 날이라 엘프 상인을 대동하고 3번 위치로 향했다. 엘프는 브로커라서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한다는 명목이었고, 앨런 일행은 그의 호위로 위장했다.

모신교는 해군에 연락하지 않고 마법사들을 따로 덮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내통자가 있음을 확인했는데, 누굴 믿고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카미로가 부정부패에 찌든 나라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태가 터지고도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은 넓어. 쳐 죽여야 할 미친놈도 많고.”

테일러가 시바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뱉은 말 때문에 위로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3번 위치는 해안 절벽 같은 외진 장소가 아니라 하역장이었다. 컨테이너 하역 크레인에 숫자 3이 적혀있었다.

아직 작업이 진행 중인 1, 2번과 달리 3번은 조용했다. 가끔 지나가는 노동자가 보였지만, 엘프를 보더니 후다닥 사라졌다.

엘프는 그 모습을 보고 회한을 느끼는 듯했다. 과거의 영광은 이제 가루로 변했고, 남은 일생은.

“시발. 내가 따까리라니.”

시바는 욕설 대신 사랑과 평화라는 단어를 내뱉게 만들 수 있었지만, 가만히 놔뒀다. 거래 상대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니까.

쌀쌀한 바닷바람이 앨런을 감싸고 지나갔다. 파워슈트 덕분에 바람과 직접 닿진 않았지만, 그런 느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랑카 그리고 아로마아에서 살았으니까.

쓸데없는 감상을 털어내고자 시간을 확인하니 밤 11시 30분. 아직 마법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은 언제 오죠?”

“벌써 와야 했는데···. 이 새끼들이 설마?”

엘프가 눈썹을 찌푸리며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앨런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브로커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거래하려는 거죠?”

“씹새끼들. 감히 뒤통수를 쳐?”

“통수에 통수지. 말은 똑바로 해.”

테일러가 엘프 상인의 말을 정정했다.

어쨌든 계획이 뒤틀렸으니 이쪽도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아직 봉쇄는 건재했고, 부패한 해군과 엘프가 약속한 시각은 새벽이었다.

해적과 마법사들의 접선 지점은 몰라도 그때 그곳을 통과하리란 사실은 알았다.

테일러가 엘프를 나무랐다.

“그러니 잔금을 나중에 치렀어야지.”

“잠수함 타고 있는데 그럴 시간이 어딨다고. 그리고 해군 놈들이 얼마나 욕심 가득한 줄 아쇼?”

그때, 시바가 자신이 듣고 있는 통신을 외부로 돌렸다.

[30번 크레인 근방에서 수상한 차량 발견. 마력 파장 분석 결과, 마법사일 확률 높음.]

잡으려면 해저보다는 지상이 나았다. 괜히 탈출할 여지를 주면 되겠는가.

[우리가 먼저 진입하겠다.]

정화봉사단을 이끄는 알라나 수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후, 저 멀리에서 화염이 솟아올랐다.

앨런 일행 역시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사람을 벗어난 존재들의 충돌에 항만이 엉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침 아바라에서 봤던 살점 거인이 튀어나와 경로를 막아섰다. 보통은 차가 돌진하면 피하기 마련이나, 5m에 달하는 존재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거인은 자세를 낮추고 돌진했다. 앨런은 선택해야 했다. 오히려 액셀을 강하게 밟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안쪽까지 들렸다.

“내리세요.”

앨런은 액셀을 고정하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파워슈트가 노면에 갈릴 때마다 푸른 마력 장벽이 번쩍거렸다.

테일러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앨런의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무사···. 엘프는?”

쿠웅!

차가 찌그러졌다. 거인은 엄청난 충격에 무릎을 꿇긴 했지만, 멀쩡하게 일어났다.

크워어어!

화가 났다는 듯 고함을 지르고, 이쪽을 향해 차를 던졌다. 공중에 붕 떴던 차가 데굴데굴 굴렀다.

테일러는 차를 슥 피하며 내부를 살폈다. 참혹한 꼴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엘프 상인은 살아있었다. 부러진 곳이 보이고, 정신도 잃었지만 죽은 상태보다는 멀쩡했다.

“너, 일부러 그랬지?”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행동했습니다.”

“이걸 뒤끝이 심하다고 해야 할지, 정당한 복수라고 해야 할지···.”

테일러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살점 거인에게 무기를 겨눴다.

“아바라에서 봤던 놈과 똑같이 생겼네.”

“조종사가 없으니 상대하긴 쉬울 겁니다.”

“내구도나 힘은?”

“똑같겠죠.”

“···.”

테일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시간도 없었다. 거인의 손바닥이 머리를 노렸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굽히며 피했지만, 어마어마한 풍압이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 사이, 시바는 거인의 등 쪽에 있는 돌기를 밟고 위로 솟구쳤다. 모기처럼 거인을 귀찮게 하며 테일러가 몸을 피할 시간을 벌어줬다.

바닥을 빠르게 굴러서 빠져나온 테일러는 바닥에 그려진 빨간 화살표를 발견했다. 원래 그려져 있던 도형이 아니라, 앨런의 간섭에 의한 현상이었다.

[유인하세요.]

그게 맞는지 위의 문구도 시야 한쪽에 떠올랐다. 그건 시바 역시 마찬가지. 둘은 최대한 거인의 심경을 거슬리게 하며 화살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눈앞에 생겨난 해골표시.

[회피!]

그 장소에서 최대한 몸을 날리자마자.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그에 어울리는 진동 또한 느껴졌다. 몸을 일으킨 테일러는 컨테이너에 깔린 거인을 발견했다. 부서진 컨테이너도 직물 원단을 울컥울컥 토해냈다. 하필 붉은색이었다.

그래도 거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묵직한 컨테이너가 그 위로 또 떨어졌다. 컨테이너로 작은 동산을 만들고 나서야 거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모습이 마치 무덤 같았다.

“굳이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힘 뺄 필요 없겠죠.”

앨런이 전투 현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 위에서 컨테이너를 매달고 있는 크레인이 그 뒤를 쫓았다.

< 아로마아(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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