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로마아(5) >
산 중턱에 있는 하얀색 현대식 별장에서는 밤바다가 잘 보였고, 정원의 넓은 수영장에서는 어인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어인이라는 말처럼 물고기 머리를 달고 있어서 그런지, 어떤 자세, 어떤 상태로든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어떤 어인은 해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가장자리로 밀려나곤 했다.
정원에도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 몇 있었다. 곰치 어인이 근처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두목···.”
“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언제까지 천박한 단어나 쓸래?”
전 해적이자 현 사업가인 록피가 부하를 닦달했다. 볼락 어인 특유의 퉁방울 같은 눈으로 노려보자, 곰치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했다.
“쉬어서 좋긴 한데, 언제까지···.”
록피는 대답 없이 주변을 살폈다. 머리가 텅텅 빈 부하 놈들은 좋다고 사방팔방에 늘어져 있었다. 술을 수영장에 쏟아붓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하얀 가루를 뿌리기도 했다.
“아가미 붉은색이 참 마음에 들어.”
“등지느러미 살랑살랑 움직이는 거 보니까 못 참겠네.”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도 여럿 불렀는데, 대부분이 어인이었다. 왜냐하면 해적 구성원 중에 어인 비율이 높아서.
록피는 금붕어 어인에게 휘파람 부는 부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살판났구만.”
그는 모신교의 봉쇄 때문에 자숙하는 중이었다. 직업 특성상 괜히 움직여서 체포의 빌미를 제공할 수는 없으니까.
체류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록피의 속마음은 타들어 갔다.
‘벌기는 힘든데 쓰는 건 이리 쉬우니···.’
봉쇄가 금방 끝날 줄 알고 부하들에게 마음껏 놀라고 호언장담해서 취소할 수도 없었다. 전 해적 두목으로서의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애초에 얕보이면 안 되는 자리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곰치가 저 멀리 있는 항만을 내려다봤다.
“멀리서 불꽃놀이 중입니다. 구경이나 해볼까요?”
“신 따까리랑 주문쟁이가 한 판 붙었겠지. 휘말리면 귀찮으니 괜히 가까이 가지 마라.”
“알겠습니다.”
“밑에 애들도 단속 잘하고.”
“사장님이 잘 해줘서 나갈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록피는 주변을 둘러봤다. 괜히 발정 난 개처럼 돌아다니다가 모신교 측에 걸리느니, 차라리 돈을 좀 쓰는 편이 더 나은 듯했다. 그래도 보고 있으면 속 터지는 꼴이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와인의 향기를 즐기다가, 어느새 술잔이 비었음을 깨달았다. 록피가 술잔을 들고 하인을 찾았다.
“여기 술이나 따라봐라. 뭐야, 어디 갔어?”
자세히 보니 사용인과 매춘부들이 죄다 사라졌고, 수영장과 그 주변에는 취한 부하들만 남아있었다.
록피가 곰치에게 턱짓했다.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부하가 재빨리 일어나려는 순간.
퐁!
수영장에 어떤 물체가 떨어지더니 물방울이 튀었다.
그리고.
빠지직!
푸른 전류가 사방으로 날뛰었다. 원래도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해적들은 전기 찜질로 인해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정원에서 놀던 부하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무언가에 얻어맞고 목이 홱 꺾이더니 기절하고.
“으아아!”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수풀로 끌려가기도 했다. 고양잇과 맹수의 실루엣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명령을 수행하려던 곰치도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쓰러졌다. 록피는 발밑에 데굴데굴 굴러온 물체를 집어 들었다.
“고무탄?”
비살상 제압을 목적으로 만든 탄이나, 룬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제법 살벌하게 느껴졌다. 고작 몇 초 만에 조용해진 정원. 별장의 불도 툭 꺼졌다.
록피는 일단 자리에 앉아있었다. 상대의 목적은 알 수 없어도, 고무탄을 보면 일단 살상은 아니었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나? 장부와 재물 때문에 일단은 살려두겠군.’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정문 쪽에서 파워슈트를 입은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좋은 밤이네요.”
“···.”
파워슈트는 맞은편 의자에 반쯤 걸쳐진 부하를 발로 밀어내고 앉았다.
“누가 시켰지?”
“그게 무슨 말이죠?”
“누가 날 죽이라고 했냐고. 약속한 금액의 2배, 아니, 3배를 줄 테니 역으로 내가 고용하지.”
록피는 갑자기 쳐들어와서 존댓말을 사용하는 미친놈에게 제안했다. 어차피 이런 놈들은 계약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총구를 쉽게 바꾸곤 했다.
앨런은 의기양양한 해적 두목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예전에 봤을 때와 달리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옛날이었어도 똑같은 제안을 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거친 바다를 헤쳐나온 감을 믿고 바로 공격을 퍼부었으리라. 앨런은 실망마저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랑카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인신매매해서 얻은 돈은 더럽기만 했다. 찝찝함만 남은 물건을 뭐하러 손댄단 말인가.
“그럼?”
“인과응보.”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과거의 잘못이 돌아왔다고 생각하세요.”
“사주한 새끼가 내 속도 터치라고 주문했나? 3배가 모자라? 그럼 5배!”
록피는 주절주절 떠들었다.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앨런의 속을 떠보려고 하거나,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 말하며 겁을 주려고 했다.
앨런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시간 끌려는 수작이 보여요. 별장에 대기 중인 부하들을 기다리죠?”
마침 2층 창문이 열렸다. 록피는 총구가 파워슈트를 겨누길 기대했지만, 오히려 꽁꽁 묶인 부하들이 2층에서 내던져졌다.
아래로 뛰어내린 테일러는 끙끙 앓는 해적들을 무시했다. 뒤따라 내려온 시바만 죽었나 살았나 살필 뿐이었다.
록피는 믿을 구석도 사라졌으니 직접 나서려 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서 파워슈트를 향해 돌진했다.
살로 뒤덮였어도 매직웨어의 출력은 똑같았다. 엄청난 속도에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는 순간.
“어?”
점점 시야가 낮아지고, 종국에는 잔디밭에 머리를 처박았다. 쓰러진 상태로 고개를 돌리니, 깔끔하게 잘린 다리 2개가 보였다. 그 너머에는 앞발을 회수하는 기계 맹수도 있었다.
“으으으···.”
“모신교에서 데려갈 거예요. 그분들이 사업체를 정리하고 아직 팔리지 않는 사람들을 구출하겠죠. 당신은 가장 아래에 처박혀서 허우적댈 테고요.”
“어인이니까 하수구 청소할 때 딱 맞겠네. 아가미에 염증 생기겠지만 성직자들이 치료는 해주겠지.”
테일러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해적 두목은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해서, 이죽거림에 대응하지 않았다.
연락받은 성직자들이 아로마아의 경찰들과 함께 몰려왔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놈들이···.”
“형제님, 진짜 모르셨습니까?”
“알았다면 체포했을 겁니다.”
“···믿겠습니다.”
수도승은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 자리에서 충돌할 수는 없으니 일단 넘어갔다. 미리 약속했던 대로 범죄자의 신병은 모신교가 확보했다.
앨런은 끌려가는 해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러 가지 말을 생각해뒀는데, 막상 떠오르질 않네요.”
“저런 것들이랑 말 섞을 필요도 없지. 그런데 생각보다 싱겁게 끝냈구나.”
“싱겁다뇨?”
“피 분수를 만들 줄 알았지.”
“죽인다고 저들이 했던 일이 사라지지도 않잖아요. 차라리 살아서 얼룩을 조금이라도 지우는 게 바르다고 판단했어요.”
모신교에 끌려갔으니 종신형은 거의 확정이었다. 운이 좋더라도 40~50년 후에나 자유를 얻으리라.
어느덧 마지막 해적도 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반항하면 바로 주먹이 날아오니 모두 얌전했다.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하필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쫓기지 않았다면 일부러 암초가 많은 지역으로 항행해서 사고가 일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앨런이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테일러가 어깨, 시바가 허리를 두드려줬다.
오늘의 하늘은 맑은지, 달이 유독 컸다. 서글퍼 보이는 달에게 손을 뻗었으나, 당연히 잡히지 않았다.
*
앨런은 한동안 아로마아에 머물렀다. 재봉사의 제자들에게서 얻은 인공 안구를 조사하고, 약간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엘프 상인도 잡히고, 해적 두목도 끌려가서 조용한 별장. 1층으로 내려간 앨런은 소파에 널브러진 테일러를 바라봤다.
“오늘도 누워계시네요.”
“너도 이 나이 되면 알아. 그냥 누워있는 게 최고야.”
“매직웨어 덕분에 신체 기능은 20대를 웃돌 텐데요.”
“어허. 어른이 말하면 ‘네.’하고 대답해야지.”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앞의 탁자에는 해룡이 새겨진 펜던트가 있었다. 드래곤의 형태와 비슷했는데, 날개는 오징어의 지느러미 같았고, 발에는 물갈퀴가 있었다.
시바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해적이 신을 믿는 거요?”
“맞습니다. 바다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답게 해룡을 믿는군요. 듣자 하니 인신 공양도 수차례 했다고 합니다.”
“용이면 충분히 신으로 모실 만하죠. 그리고 신에게 사람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요?”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테일러는 김이 팍 샌 표정을 지었다. 언어로 행해지는 성전을 기대했는데, 시바가 쉽게 수긍해서 개전조차 안 했다.
앨런은 펜던트를 조용히 쳐다봤다. 해룡은 미지의 존재였다. 수많은 학자가 해룡 해협과 바다뱀 군도를 조사했으나,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밝혀지지 않았기에, 불가사의한 존재기에 오히려 신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체가 불명확할수록 상상은 계속해서 확장하는 법이니까.
어쨌든 해룡 신앙은 해룡 해협 근처의 나라에 퍼져있었고, 특히 뱃사람들이 많이 믿었다.
테일러가 시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옛날의 모신교였다면 이단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겠지?”
“아, 형제님.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시바가 드물게 뾰족한 소리를 냈다. 테일러가 낄낄 웃다가 앨런을 불렀다.
“그래서 성과는 있니?”
“네.”
앨런이 파워슈트의 가슴 장갑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형상변환 합금으로 만들어진 룬캔버스가 있었는데, 금속이 꾸물거리더니 5개의 룬문자로 바뀌었다.
“실력이 더 늘었구나. 축하한다.”
“앨런 형제님은 나날이 성장하는군요. 혹시 어머님의 가르침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원래는 안 되지만 제가 성법을 몰래 가르쳐드릴 수도···.”
“오.”
앨런이 혹한 표정을 짓자, 테일러가 팔꿈치로 시바를 밀었다.
“야, 그래도 돼?”
“당연히 안 되니 ‘몰래’라고 했잖습니까.”
“그거 말고. 너 지금 성법 알려주고 코 꿰려는 거잖아.”
“아닙니다.”
“아니긴 잠깐 기다려봐.”
테일러가 눈을 감더니 시바처럼 기도하는 자세를 잡았다. 잠시 후.
“어머님께 물어봤는데 내 말이 맞대.”
“불경합니다! 어머님의 뜻을 사사로이 사용하시다뇨!”
“니가 평소에 하는 짓이잖아. 기도하는 척하면서 맨날 잠이나 자고!”
“어쩔 수 없이 비밀을 알려드려야겠군요. 저는 꿈의 세상에서 신성력을 일으켜봅니다. 하얀색이면 제가 가는 길이 옳다는 증거, 아니라면 검은색으로 바뀝니다.”
“신성력은 원래 하얀색인데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검은색으로 바뀐 적이 있기나 해?”
“···없습니다.”
테일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실댔고, 시바가 어깨를 푸들푸들 떨었다.
앨런은 평소의 일상을 감상하다가 평화로운 연못에 돌을 던졌다.
“아이스헨지에서 제가 봤던, 카탄을 닮은 방화벽 기억하시죠?”
“그게 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앨런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카탄 본인이 설치한 게 맞는 것 같아요. 음, 말이 좀 잘못됐네요. 카탄을 닮은 방화벽이 아니라, 방화벽의 형상을 빌린 카탄의 의지입니다.”
“형제님, 잠깐만요. 만약에 그의 침입을 허락했으면?”
“그가 남긴 뜻대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뇌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미친···.”
앨런은 욕설을 내뱉는 테일러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저는 뇌 확장 장치가 없어서 괜찮았을 거예요. 덕분에 카탄의 의지도 많이 깎인 상태여서 쉽게 물리치기도 했죠.”
“그럴 확률은 있었다는 뜻이잖아.”
상체를 앞으로 숙인 테일러가 테이블을 손가락을 마구 두드렸다. 격한 심정에 호응한 마력 때문에 표면이 마구 깨졌다.
“그래서. 정신을 왜 지배하려고 했는데?”
“글쎄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적의가 조금이나마 느껴지네요.”
“아낌없이 지식을 베풀던 양반이 누군가를 적대한다고?”
“그걸 알려면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겠죠. 카탄이 자주 방문했던 계층이 어딘지 알아봐야겠어요.”
< 아로마아(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