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1) >
카미로 사태는 결국 국민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마법사 몇 명이 난리를 부렸다고 하기엔 많은 도시가 참혹한 피해를 겪었고, 때문에 나라의 모든 분노가 일렉토 카르텔에게 향했다.
국민은 그동안 카르텔의 억압을 받았으나 숫자로 따지면 상대를 압도했다. 진노가 공포를 짓누르자 순식간에 들고 일어나서 카르텔을 습격했다.
모신교 추적자들을 피해서 뿔뿔이 흩어져있던 조직원들은 금방 잡혔고, 시민들은 공권력이 나서기도 전에 현장 재판으로 처리했다.
광기에 물든 모습은 생각보다 쉽게 잠잠해졌다. 살인에 대한 부담감을 모두가 나눠 받았기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다.
앨런은 삼라만상에서 그 뉴스를 접했다.
“공동체와 개인을 분리해서 생각했군요. 결국, 마법사들과 카르텔의 간부들을 우리가 처리해서 가능한 일이겠죠.”
“아니었으면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을걸. 그나저나 각 도시의 자경단은 어떻게 되려나.”
“리더가 괜찮은 인물이라면 해산, 꿍꿍이가 있다면 카르텔의 자리를 차지하겠죠. 옛날부터 목적 잃은 조직은 쉽게 부패했으니까요.”
테일러가 너무 억측 아니냐고 하기에는 유사한 사례가 매우 많았다. 어떤 대륙 거의 전역에서는 독재, 쿠데타의 반복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재봉사가 조용해서 다행이야.”
“기억을 읽었을 때, 그녀는 진짜로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제자들을 통해 자신이 지닌 마법이 새어나갈 수도 있잖아.”
“비밀까지 전수한 제자라면 풀어주지도 않았을걸요. 원조를 대가로 마법사의 신병을 요구하는 나라나 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도 헛수고일 거예요.”
“그건 어떻게 알았니?”
“대니 사제님과 이야기하다가요.”
“너를 믿나 보다. 생긴 것처럼 좋은 말 많이 해주대?”
“신앙을 가져볼 생각 있냐고 묻더군요.”
“음흉한 영감이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앨런은 다시 뉴스에 집중했다. 재봉사가 신경도 안 쓰는 제자들이 만든 참상치고는 규모가 너무 컸다. 반푼이 같은 마법사들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집가, 파괴자, 재봉사 등이 진심을 내면 무시무시하겠네요.”
“너 그때 제이크랑 수집가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고 했지?”
“수집가는 미궁을 빠져나오더니 바로 사라졌죠.”
“그래, 그 끔찍한 반지를 사용해서.”
수집가의 반지에는 특이하거나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의 압축된 뇌가 보석처럼 달려있었다. 뇌와 능력 자체는 살아있지만, 자아는 붕괴한 상태로.
그래서 수집가라는 이명이 붙었고, 산드라와 달리 거의 전 세계에서 수배령을 내렸다. 물론 워낙 강력한 범죄자라 진심으로 붙잡고자 하는 사냥꾼은 없었다.
테일러는 그때 찍은 사진을 허공에 띄웠다.
“그놈에게 싸울 생각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저도 예측 방송 봤어요. 서로 진심이었다면 일대가 붕괴했을 거라더군요. 직접 봤으면 더 확실히 알았을 텐데···.”
“어허, 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듣기보다 직접적인 경험이 훨씬 좋죠.”
진짜로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지금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현재 심도 4.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7까지는 겨우 3개의 계단만 남았다고 말하겠지만, 글쎄.
계단의 높이가 점점 위로 치솟았다. 1~3까지는 동네 뒷산, 3~4는 좀 높다고 자랑해도 되는 산이었지만 4~5는 갑자기 세계의 최고봉이 튀어나왔다.
그 위는? 생각해봐야 열량 낭비였다.
“심도 7은 사람이 아니에요. 태풍, 지진, 화산이 사람의 형태로 걸어 다니는 것 같아요.”
“너도 그렇게 되어야지.”
“네? 별로 관심 없는데요.”
“미궁의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리될 거다.”
이제 남은 일은 카미로의 몫, 앨런 일행은 메이즈시티로 복귀했다. 앨런은 비행기에서 삼라만상에 접속했다.
언론이나 각계 인사는 산드라에 대해 성토만 할 뿐, 그 고귀한 몸은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카탄과 똑같은 육체를 만드느라 누가 떠들어도 관심조차 없으리라.
집으로 쓰는 창고로 향하면서도 삼라만상을 계속 뒤져봤다.
“카탄이 자주 방문하던 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네요.”
“지식 공유는 곧잘 했는데,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용한 양반이었어.”
“아저씨는 모르시나요? 요원이었다면서요.”
“재능의 한계를 느끼고 후학 양성으로 빠졌다고 했잖니. 네 해킹 실력은 웬만한 다이버 뺨을 후리고도 남으니 기업의 데이터베이스를 슬쩍 살펴보는 게 어떠니?”
“그건 좀···.”
앨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바가 언성을 높였다.
“앨런 형제님 말이 맞습니다. 테일러 형제님, 그건 범죄입니다. 연장자로서 옳은 길을 제시하기는커녕 범법을 가까이하라고 하다뇨.”
“네가 앨런을 몰라서 그래.”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걸리면 귀찮아지잖아요.”
“아···. 그쪽이었군요.”
시바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멀리 떨어졌다. 마치 다른 일행처럼 보이게.
“진짜 해킹할 생각은 없어요.”
“다행입니다.”
“아직은 위험하니 나중에?”
“···.”
다시 나란히 걷던 시바가 이전보다 훨씬 멀어졌다.
어두운 밤, 도시의 불빛으로도 가릴 수 없는 은은한 달빛이 골목길을 비췄다.
원래는 밤이 되면 집에만 있는 게 상식이다. 어두운 골목길이나 외진 구역에는 절대 발을 디디면 안 됐다.
하지만 앨런 일행이 보통 사람이던가. 당당하게 골목을 걸었다.
테일러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평소에는 불순한 시선이 느껴지던데 오늘은 조용하잖아.”
“이런 날도 있겠죠.”
저 멀리, 집이 보였다. 마침 입을 열었던 앨런이 계속 말을 이었다.
“카탄의 행적에 대해 선배한테 물어볼까요?”
“시온? 걔는 왜?”
“싫으세요?”
“뭔가 좀 그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함이랄까. 음···.”
입매를 이상하게 만든 테일러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참 신기해. 시온이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 너는 살갑게 대한단 말이지.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네?”
“너랑 시온은 좋게 말하면 개성 있고, 나쁘게 표현하면 뒤틀려있어. 너는 자신도 잘 알 테니 입 아프게 말할 필요 없고, 시온은 사람을 사람으로···.”
테일러의 말이 잠시 멈췄다. 전봇대 뒤에 회색 비단이 너울거렸다. 바람에 흔들리다가 잘게 쪼개지기도 했다.
“왜 골목길이 깨끗한가 했더니 청소부가 있었네. 스토커야? 거기서 뭐 해?”
“뒤에서 남을 씹는 사람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전봇대 뒤에서 시온이 슬쩍 걸어 나왔다. 가로등과 달이 쏘아낸 빛 덕분에 회색 머리카락이 거의 은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녀의 몸은 어둠을 휘감은 듯했다.
그녀가 평소처럼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으니, 테일러가 손을 휘휘 저었다.
“왜 왔냐? 빨리 사라져.”
“나도 이 근처에 사니까.”
“이 근방으로 이사 왔다고?”
“우리는 이제 이웃사촌이야.”
“제이크가 시켰구나”
“······아닌데.”
부정의 대답을 너무 늦게 내뱉었다. 시온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으니, 브레이커의 회장도 걸리리라 예상하고 보냈으리라.
사실 앨런 일행에게도 나쁠 건 없었다. 그녀는 뒷골목 양아치에게는 사신 같은 존재지만, 앨런에게는 ‘동네 사람1’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무해했다.
테일러의 반응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아니긴 뭘. 앨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봤나?”
“형제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이크는 미궁 돌파에 목숨을 걸었거든. 브레이커가 다른 탐험가조합보다 선량한 기업인 이유도 거기에 있어. 후학을 제대로 양성하면, 어떤 식으로든 나중에 도움이 되니까. 자신의 탐험이 막혔으니, 다른 방식으로 돌파할 방법을 찾고 있겠지.”
“그럼 앨런 형제님 말고도 사람을 붙이겠군요.”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쪽을 선호하겠지만, 앨런이 거부해서 이런 방법을 쓰는 거지. 앨런이 거절할 때 나도 옆에서 제이크의 얼굴을 봐야 했는데.”
앨런은 시온을 지나쳐서 정문을 열었다. 곳곳에 설치한 기관 포탑이 주인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집 안은 깨끗했다. 비토와 앨런이 남겨놓고 간 청소 거미들이 열심히 돌본 덕분이리라. 비토가 마나배터리를 최근에 갈아 끼웠는지 따로 충전할 필요도 없었다.
앨런이 집에 이상이 있는지 둘러보는 사이, 따라 들어온 시온이 구석의 소파에 앉았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너, 동작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
“못 들은 척하기는.”
“손님이 왔는데 음료랑 과자는 없어?”
“뻔뻔하긴. 무단 침입은 아닌 것 같고···. 비토가 관리하러 들어올 때 따라 왔구나. 비토 이놈 자식. 동네 똥개도 아니고 아무나 집에 들여?”
테일러가 비토에게 통화를 시도하는 사이, 시바가 시온의 주문대로 음식을 내왔다.
“고마워.”
“그건 제 성수입니다. 자매님의 음료는 옆에 있습니다.”
앨런도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는 작업을 마치고 다가왔다. 시온은 3인용 소파를 독차지하다가 슬쩍 자리를 내줬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여긴 우리 집이야.”
테일러가 앨런의 말을 정정해주더니, 다시 비토 닦달에 집중했다.
“선배.”
“왜?”
“카탄이 자주 방문했던 계층이 어딘지 아세요?”
“알고 싶어? 그런데 우리는 일행이 아니잖아.”
“그럼 같이 다니죠.”
“파티가 아니면 알려주지 않을···. 어?”
앨런은 시온을 가만히 쳐다봤다. 제이크 마셜 회장이 그녀를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크레바스의 얼음 미로 돌파 그리고 로렌조 씨를 도와서 공간문을 열었던 게 인상 깊었겠지.’
공간문 자체만으로도 혁신이었다. 덕분에 은퇴하고 다른 일을 찾은 탐험가들도 메이즈시티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미궁 탐험으로 얻는 전리품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관련 사업이 커지고, 사업의 성장으로 돈이 모이니 사람 또한 몰려들었다.
탐험가가 많아지면 더 많은 비밀이 밝혀질 테고, 그러면 저 아래로 내려갈 길도 열리는 법이다.
회장은 시온이 들킬 것을 알면서도 보냈을 테니, 대놓고 지원해주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은 좀 공유해야겠지만, 브레이커가 백 년 넘게 쌓은 노하우를 접한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애초에 소원의 조각도 회장이 층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얻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회장의 목적은 소원의 조각이 아니었나?’
오로스 교수의 사무실에서 회장과 통화할 때, 분명 판매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사용 결과에 대해서만 물어봤다.
앨런은 세상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무상의 선의로 보여도 거기에는 대가가 존재한다. 베푸는 자는 물질적인 보상 대신 보람이라는 정신적 이득을 얻는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회장은 그때 어떤 이득을 취했는가.
‘아저씨의 말대로 후학을 양성해서 돕게 만들려는 투자?’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는 있었다. 공간 확장 덕분에 앨런 일행의 탐험은 편해졌고,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당연히 성장 속도도 빨라졌다.
앨런이 시온을 빤히 보고 있으니, 그녀가 손으로 뺨을 가렸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
“네?”
말과 달리 그녀의 뺨에는 홍조가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시온의 행동은 앨런도 예측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엉뚱한 듯 보이는 무언가라고나 할까.
시온은 잠시 장난을 치는가 싶더니 태도를 싹 바꿨다.
“그럼 같이 내려가는 거지? 구두 계약도 효력이 있어.”
앨런은 시온이 삼라만상에 접속했음을 알았다. 말하는 내용을 들으니 계약에 대해 검색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하죠. 예전에는 실력 차이가 워낙 커서 꺼렸지만, 지금은 격차가 많이 줄었으니까요.”
여전히 차이가 벌어져 있음을 안다. 하지만 발목을 잡을 일은 없다.
앨런의 말을 들은 시온이 눈을 빛냈다.
“그럼 위험한 곳에 가도 괜찮겠네.”
“저야 좋죠.”
미궁에서의 위험은 큰 지식과 동의어였다. 앨런이 거부할 리 없었다.
비토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던 테일러가 뒤늦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내 의견은?”
“기권표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비토 괴롭히지 말고 대화에 참여하셨어야죠.”
< 눈보라(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