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2) >
평화적인 방법으로 합류가 결정되자, 시온은 회사에 방문했다. 외부에서는 보안등급이 높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미궁의 문 근처에 있는 공간문 관리소로 향했다. 에셀 마탑의 마법사들이 탐험가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앨런은 예전보다 길어진 줄을 바라봤다.
“사람이 더 많아졌네요. 공간문을 불안해하던 탐험가들도 추이를 지켜보다가 이상이 없으니 사용하기 시작했겠죠.”
“형제님, 원시림을 탐험할 정도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많았습니까?”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매직웨어 그리고 마법 사용을 도와주는 에비가 있으니, 투자하면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모이면 돈이 흐르고, 그 돈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합니다. 저 앞, 금 장신구를 잔뜩 착용한 오크가 탐험가로 보이시나요?”
“옷이 굉장히 얇고, 전체적으로 화려한 인상입니다. 아, 사업 때문이겠군요.”
공간문이 있는 유적에 탐험가만 모인다면 그냥 거쳐 가는 야영지1일 뿐이다. 하지만 온갖 시설과 사람이 합쳐지면, 부가가치를 계속 창조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 된다.
공간문을 넘어가자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유적이 보였다. 마치 도심 한복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유적의 한계 때문에 고층 빌딩은 없었다.
탐험가들은 유적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안개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바삐 움직였다.
앨런 역시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27층이 이렇게 활성화되었으니, 23층에 몰려있는 기업들의 기지에 타격이 좀 있겠네요.”
“일 줄었다고 좋아하던데.”
“아,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견해 차이가 있겠네요.”
앨런 역시 한때 강제적으로 그런 처지였기에 시온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일은 적어지고 월급이 똑같으면 아무래도 좋아할 수밖에.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문을 통과하니, 원시림의 녹음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이 순식간에 편해졌다.
시바가 문 근처에도 바글거리는 탐험가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도 사람이 많군요. 오 저건···.”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까지 안내하는 가이드가 있었다. 나침반에 마석을 거의 한계까지 흡수시킨 후, 탐험가들을 모아서 일종의 버스를 운행했다. 몸은 스스로 지키기에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다.
덕분에 남들을 믿지 않는 미궁에서 탐험가들이 쉬이 뭉치는 모습이 자주 보였고, 유명한 조직의 마크를 달고 있는 가이드일수록 손님이 많았다.
앨런은 시온에게 물었다.
“브레이커도 가이드를 운영하나요?”
“우리도 해. 장사 목적은 아니고 직장 동료가 편히 내려가게 도와주는 정도?”
“형제님, 차라리 저럴 거면 공중에 무언가를 띄워서 문의 위치를 표시하면 안 됩니까? 나무 때문에 하늘이 안 보이겠지만, 나무 정도야 쉽게 오를 수 있고.”
“얘 좀 봐. 나랑 앨런이 있다고 아예 공부를 안 하네. 이러니까 경전을 못 외워서, 성법도 대충 말하지.”
“그건 긴급 상황이라 축약해서···.”
시바와 테일러가 격렬한 의사 표현을 하는 사이, 앨런은 위를 쳐다봤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에 만들어진 실금을 통해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였다.
시바의 말대로 연이나 드론을 띄우면 문의 위치를 파악하기 쉬워지나,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문은 가끔 순간이동을 하는데, 근처에 사람이 있으면 그 빈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탐험가들이 좋은 마도구를 두고 괜히 나침반을 사용하겠는가.
몸을 풀고, 새로이 룬문자를 새긴 장비도 테스트할 겸 무작정 걸었다. 다이어울프와 공포새 무리를 처치했을 때, 앨런이 시온을 쳐다봤다.
“슬슬 정보 공유해주세요. 우리가 갈 곳은 몇 층이죠?”
“안 돼. 비밀 보관실 직원이 알려줬는데 여자가 너무 퍼주면 남자는 도망간대.”
“네?”
드물게 앨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직도 시바와 언쟁을 하던 테일러도 무슨 일인가 하며 이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여자는 비밀이 많을수록 좋대.”
“도대체 누가 그렇게 말했어? 애한테 이상한 걸 가르치네.”
“형제님도 어린 자매님 앞에서 비속어로 랩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야!”
다시 2차전이 시작되고, 애초에 그쪽에 관심도 없던 시온은 해체용 칼을 깨끗이 닦아서 허리춤에 꽂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약간만 알려줄게.”
시온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뇌 확장 장치를 통한 정보 전달이나, 앨런에겐 장치가 없었다. 신호를 보내던 시온이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아···.”
“괜찮아요. 그냥 전해주세요.”
앨런은 마력 신호를 잡아채서 그대로 읽어냈다. 정확히 말하면 앨런이 입력한 별문자를 토대로 눈이 동작, 신호를 잡아채서 알아볼 수 있게 변환했다.
정보가 눈앞에 문서 형태로 떠올랐다. 눈보라가 치는 짧은 영상 옆에 글이 주르륵 적혔다.
뇌 확장 장치가 있다면 정보를 받자마자 습득하겠지만, 앨런은 읽을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 시간은 장치가 있는 사람과 거의 비슷했다.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35층. 거기 어딘가에 숨겨진 유적이 있군요.”
“아, 거기?”
휴전에 돌입한 테일러가 아는 듯한 티를 냈다.
“알면서 왜 안 알려주셨어요?”
“목적지가 거긴지 몰랐지. 근데 거기 들어가려면 고생 좀 해야 해. 유적이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거든. 위치도 계속 바뀌고.”
시온의 정보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유적의 출현 조건은 불명이었다. 운이 좋다면 이번 탐험에 발견할 테고, 아니라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
“카탄이 35층 유적에 자주 방문한 이유는 뭘까요?”
“그걸 알면 우리가 올 필요도 없었겠지. 자, 가자.”
앨런은 테일러의 뒤를 따라 문을 통과했다. 34층에서 35층으로. 고작 문 하나를 지나갔을 뿐인데 주변의 풍경이 너무 심하게 바뀌었다.
얼어붙을 듯 시리게 청명한 하늘은 사라지고, 설원 계층에서 경험했던 그 어떤 눈보라보다 강한 녀석이 손님을 맞이했다.
바이저의 HMD에 온도가 떠올랐는데.
외부온도 : -33℃
지금까지 경험한 설원의 다른 층보다 추웠다. 바람까지 심하게 부니 체감 온도는 훨씬 낮으리라.
심지어 눈발도 워낙 굵어서 잠깐 서 있으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의 몸이 거의 눈으로 뒤덮였다. 그러니 시야는 얼마나 제한되겠는가.
“···.”
온몸을 꽁꽁 싸맨 테일러가 뭐라고 소리쳤으나 바람이 워낙 거세서 들리지 않았다. 앨런이 고개를 흔들자 통신을 걸어왔다.
[나도 파워□트 입을 걸 그랬□?]
[꽉 끼는 옷은 불편하다고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보다 눈보라에 흐르는 마력 때문에 통신이 불안정하네요.]
[제□랄! 대충 알아들□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자.]
[이런 상황에서 유적을 찾아야 하군요.]
[거긴 눈□라가 없어서 탐□하기 좋아! 찾을 □ 있다면!]
가까이 있는데도 이 정도니 거리가 벌어지면, 통신이 아예 끊길 위험이 있었다. 가시거리도 아주 짧으니 미아가 되기 싫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탐험의 방해물에는 자연환경 같은 간접적인 요소와 직접적인 요소가 존재했다. 직접적이라는 표현은 무언가가 자신의 의지로 신체에 해를 끼친다는 의미였다.
지금처럼.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지면이 드드드 울렸다.
[온다!]
통신으로 테일러의 커다란 목소리가 전달되기 무섭게 얼음을 뚫고 뾰족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눈보라 때문에 자세한 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실루엣은 굵은 통나무와 비슷했다.
기이이이잉!
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강렬한 소음. 앨런은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눈발을 헤치고 원뿔 형태의 무언가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드릴이었다. 그 뒤에는 비늘지렁이와 닮은 길쭉한 몸체가 달려있었다.
[드릴지□이다!]
비늘지렁이의 근연종에 가까운 녀석으로 원형으로 나 있는 빼꼭한 이빨 대신, 머리 부분에 드릴을 달고 있는 괴물이었다. 당연히 사이보그였다.
드릴의 뾰족한 끝이 앨런의 가슴을 찔러왔다. 얼음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니는 녀석이니 그 파괴력만큼은 충분히 검증되었다.
앨런은 침착하게 손을 앞으로 뻗어서 드릴을 막아냈다. 손과 드릴 사이에 존재하는 푸른 안개가 완충재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룬문자 5개를 사용해서 강화한 방어막 생성기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탄력마저 보유했다.
직진밖에 모르는 드릴지렁이는 계속 머리를 들이밀었다. 앨런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렸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다.
앨런은 직접 움직이지 않고, 지렁이의 머리 부분에 붉은 점을 표시했다.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앨런과 연결된 장비를 지녔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른 일행은 함께 나타난 괴물들을 상대하는 상황이라 표범이 재빨리 나섰다.
눈 속에 파묻힌 상태로 잠행하다가 훌쩍 뛰어오르며 앞발에서 발톱 하나를 뽑아냈다. 길쭉하게 솟아오른 마력 칼날에 눈송이가 닿자 잘게 바스러졌다. 강렬한 진동 때문이었다.
표범은 주인이 찍어준 점을 발톱으로 푹 찔렀다. 배운 대로 발톱을 사선으로 비틀면서 뽑아냈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표범이 착지함과 동시에 드릴 지렁이도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많이 쌓여있었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삐!
[그만.]
앨런은 드릴지렁이를 해체하려는 상자를 제지했다.
일행을 보아하니 도울 필요도 없어 보여서, 지렁이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머리를 절개해서 뇌를 꺼내고, 그 자리에 영혼석을 집어넣었다. 평범한 생물이었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행위겠지만, 드릴지렁이는 몸 상당수가 기계로 이루어진 사이보그였다.
작업을 거의 끝내자, 괴물들을 정리한 시온이 다가왔다.
“뭐해?”
그녀는 통신이 아니라 육성을 사용하는데도 말이 제대로 들렸다. 거센 바람 따위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음성에 마력을 담아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우회하고 있구나.’
그것 좀 돌아서 전달해도 목소리는 워낙 빠르기에 전달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정밀한 마력 운용이 필요한 기교였지만, 앨런은 어렵지 않게 시온을 따라 했다.
“눈이 많이 쌓여서 돌아다니기 힘들잖아요. 마침 쓸만한 녀석이 생겼네요.”
[얘네 좀 봐. 자□들만 깨끗한 목소리로 대□하네.]
“아저씨 몸에 신호 증폭기 있어요. 쇄골 중간쯤에요.”
[설치했으면 알려줘야지.]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면 잊을 수도 있죠.”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시온에게 마저 답변했다.
“지렁이 눈썰매에요.”
“재밌겠다.”
시온은 지렁이의 징그러운 모습을 보고도 오히려 눈을 빛냈다. 확실히 평범한 사람과는 감상 자체가 달랐다.
“제대로 동작하면 좋겠네요.”
앨런이 영혼석에 마력을 불어넣자, 지렁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얼음을 스르르 빠져나와서 아예 바닥에 1자로 누웠다.
생체조직은 죽고 기계만으로 움직이는 거라 많이 뻣뻣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썰매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으리라.
삐!
어느새 상자는 썰매 부품을 꺼내서 조립을 마친 상태였다. 앨런은 길쭉한 썰매와 거대한 지렁이를 연결했다.
탑승한 상태로 신호를 보내자, 녀석이 드릴을 이용해서 바닥을 파고들었다. 굵은 줄을 통해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큰 물고기를 낚시하려다가 역으로 끌려다니는 배 같았다.
일행은 바로 썰매에 몸을 얹었다. 유적의 위치를 모르니 일단 아무 곳이나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앨런은 그렇게 설원을 돌아다니다가 새로운 드릴지렁이를 만나면, 기존의 녀석을 폐차하고 바로 갈아탔다.
뇌를 꺼내고 영혼석을 삽입할 때마다 테일러가 몸을 움찔거렸다.
[형제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 편이라 다행이지.]
[음, 그러고 보니 형제님 몸은 거의 다 매직웨어군요.]
시바가 테일러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눈빛이 불손해. 무슨 생각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빨리 말해.]
테일러가 시바의 수염을 잡아채는 모습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 눈보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