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보라(3) >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흩날리는 눈발, 온통 새하얀 세상. 앨런이 보는 광경이었다. 가끔 괴물과 싸우면 주변이 붉게 물들긴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하얗게 변했다,
앞을 막는 장애물을 치우고 다시 달리니, 썰매 뒷좌석에 탑승한 테일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이제는 지겹다.]
[크으흐···.]
이상한 숨소리도 함께 들렸다. 테일러가 몸을 돌리고, 서리가 껴있는 시바의 고글을 닦으니 눈을 감은 모습이 보였다.
[얘도 지루한지 아예 자고 있네. 차라리 통신이라도 끄고 코를 골든가.]
[···안 잡니다.]
[내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려고 하면 아버지도 소파에 누워서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지. 자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채널이나 비활성화해둬.]
앨런은 둘의 대화를 듣다가 옆을 슬쩍 봤다. 시온은 얼굴을 꽁꽁 싸매고, 고글까지 쓰고 있었다. 표정을 알아보긴 힘들어도, 자세에서 찌뿌둥함이 느껴졌다.
“잠시 쉬었다 가죠.”
앨런의 목소리가 눈송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뒷좌석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 말이 그렇게 반가웠는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발생하는 소리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그나마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울퉁불퉁한 지형을 발견, 평탄화 작업을 빠르게 마치고 큰 텐트를 설치했다.
겉으로 보면 그냥 천막 같아도 천과 폴대에 룬문자와 마력회로가 세밀하게 새겨져 있었다.
[방풍]과 [강화] 덕분에 눈보라에도 든든하게 버티고, [방열]은 위에 쌓이는 눈을 빠르게 녹였다. 가끔 마력을 충전하거나 마석을 갈아 끼우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앨런이 있으니 마석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장비에 묻은 눈이 녹으며 만들어낸 습기가 빠져나가고, 대신 따뜻한 음료의 훈훈함을 즐기는 도중, 테일러가 말을 꺼냈다.
“오늘 며칠째지?”
“3일, 시간으로 계산하면 60시간이요.”
“썰매 덕분에 두 바퀴는 돈 것 같은데 유적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
스노모빌을 이용하는 탐험가 파티를 한 번 발견했다. 그 외에는 눈 밑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물만 일행을 반겼다.
“눈보라 때문에 지형이나 하늘도 안 보여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위치를 파악하려고 표지판 세우기도 곤란했다. 탐험가가 근처에 없으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미궁의 성질 때문에.
“운에 맡겨야 하나? 앨런, 네 눈에도 안 보이니?”
테일러가 언급한 눈은 당연히 인공 안구.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네.”
“아이스헨지에서처럼 무슨 단서라도 발견할 줄 알았더니···.”
“아이스헨지?”
“아, 깜짝아.”
시온이 없는 사람처럼 기척을 죽이고 있다가 입을 열자, 테일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노인네 심장 떨어지게 하려고. 구석에 있지 말고 너도 이리 와.”
“거긴 왜? 무슨 일 있었어?”
“남자의 비밀을 함부로 캐려고 하지 마라.”
“룬문자 찾으러 갔죠. 운이 좋아서 괜찮은 룬문자를 하나 획득했고요.”
“후배가 착해.”
시온이 앨런을 보며 살짝 웃더니, 테일러에게는 뚱한 표정만 보여줬다. 테일러는 얄미운 도발을 대충 넘겼다.
“예전처럼 쥐어박을 수도 없고···. 너도 숨겨놓은 정보 있으면 다 털어놓자.”
“알다시피 그 유적 자체는 크기만 크지 별거 없잖아.”
“하긴, 나도 너한테 안 들었으면 카탄이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은 몰랐겠지. 그런데 거기가 확실하냐?”
“추정이라고 쓰여 있긴 했어.”
“그래도 별 볼 일 없는 유적 빼면 35층에 자주 방문할 이유가 없겠지.”
둘의 말이 맞았다. 유적에 우연히 발을 들였던 탐험가들은 고대 신전을 닮은 건축물을 목격하긴 했지만, 그 웅장함과 다르게 가방을 조금만 채울 수 있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황금잔이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이었으니, 차라리 유적을 찾을 시간에 괴물을 하나라도 더 잡아서 마석과 영혼석을 캐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휴식 시간. 골치 아픈 주제를 잠시 내려놓고 침묵 상태에 돌입했다. 테일러는 자는 시바 옆에 누웠고, 시온은 길쭉한 가방에서 꺼낸 검들을 손질했다.
앨런은 시온 옆에서 룬펜을 꺼냈다. 상자가 건네주는 기본 마탄에 룬문자를 새기며, 머리 한구석에서는 유적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까지 발견한 수상한 문구가 발견의 단서가 될까 해서 속으로 되뇌었다.
[광휘를 가릴 장막을 내려주소서]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
35층은 눈보라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문구에 따르면 눈보라 자체가 장막일 수도 있고, 없애려면 등불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떠올린 문구가 상황에 들어맞는다면,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
‘눈보라를 어떻게 없애지? 등불은 어디에서 구하고?’
몸을 일으킨 앨런은 텐트 입구로 다가갔다. 밖을 볼 수 있는 투명한 비닐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자, 달라붙어 있던 눈이 떨어졌다.
눈보라가 너무 심하니 시야가 온통 하얬다. 과도해지면 태양마저 가리고 어둠이 짙게 깔리기도 했다. 지평선의 경계가 사라지니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균형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때도 있었다.
갑자기 저 먼 곳의 하늘이 잠시 파랗게 물들더니.
으르릉!
하늘이 낮은 울음을 터트렸다.
“여기는 가끔 번개가 치네요.”
“눈보라도 결국 구름이 있어야 하고 구름은 번개를 발생시키지. 보기 드문 현상이야.”
앨런은 테일러의 말을 들으면서도 정신 일부는 단서를 쫓았다. 어둠을 한순간에 몰아내는 푸른 빛.
‘빛? 구름을 장막이라고 가정하면, 번개는 빛, 그러니까 등불?’
번개가 친 위치를 대략 가늠하며 시온에게 물었다.
“선배, 여기는 번개가 얼마나 자주 치나요?”
“잠깐만.”
시온의 목덜미 근처에서 마력 신호가 느껴졌다. 기억수정에 담아온 정보를 읽는 모양이었다. 10초 정도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35층에서는 생각보다 드문 현상이 아니야. 하루에 3번, 시간은 무작위.”
“번개를 따라가 보죠.”
앨런의 말에 시바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고, 테일러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밖으로 나갔다. 텐트를 열자마자 눈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행은 다시 썰매에 탑승했다. 쉬는 동안 얼어붙은 드릴지렁이는 폐차하고, 자체 동력으로 움직였다.
예상 지점에 도착하니 오목하게 파인 지형을 다수 관측할 수 있었다. 번개가 만들어낸 구멍에 눈이 쌓인 것이리라.
앨런이 눈을 걷어내니, 구멍은 벌써 얼음으로 채워지고 있었고, 번개가 만들어낸 나뭇가지 형태의 흔적도 점점 희미해지는 도중이었다.
그러나 유적 없었다.
‘착각인가?’
아직 속단은 금물.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번개가 치면, 그 장소를 찾아 헤맸다.
“여기도 깨끗하네요.”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앨런을 반기는 물체는 오직 눈뿐이었다. 앨런은 지나왔던 곳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벼락이 떨어지는 위치는 정삼각형의 꼭짓점 같은데···. 혹시 중앙에?’
예상한 지점에 가도 깨끗했다. 앨런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테일러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12시 넘었으니 자고 일어나서 찾아보자.]
“유적은 이동한다고 했죠?”
[그래. 혹시 뭔가 떠올랐니?]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잠에서 깨어난 앨런은 다시 번개를 기다렸다. 어제 했던 대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낙하지점을 찾았다.
오늘은 깨어있는 시바가 통신을 보냈다.
[이제 3번째 번개를 찾으러 갈 시간이군요.]
[오늘은 안 자?]
[어머님이 그만 오라고 하셔서···.]
[핑계는. 너무 많이 자서 안 졸리겠지.]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볼게요. 그러니 말다툼은 탑승하고 하세요.”
앨런은 두 개의 번개가 친 지점을 정삼각형의 한 변이라고 가정하고, 세 번째 번개를 쫓는 대신, 삼각형의 중심이 되는 곳을 향해 전진했다.
“이쯤일 텐데···.”
허허벌판, 오직 눈만 가득한 설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실은 설원 대신 눈송이만 잔뜩 보였지만.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근처에 나타난 아치 형태의 얼음 문. 그 너머에는 눈으로 뒤덮인 벌판 대신,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대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바의 놀란 음성이 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형제님,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정삼각형의 중앙인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봐도 모르겠던데.]
10m의 오차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어떠한 표식도 없이 눈대중만으로 한 변의 길이가 수십 킬로나 되는 정삼각형을 머릿속에서 작도했으니까.
공간지각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그러니 눈을 가리고도 로렌조의 유적이 27층에 있음을 알았으리라.
먼저 얼음 문 안으로 들어간 시바가 발라클라바를 벗어던졌다. 눈보라가 없으니 마력 통신도 필요 없었다.
“드디어 답답함에서 해방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인 줄 알았습니까?”
“예전에 찾았던 글귀에 우리가 처한 상황을 대입했어요.”
“글귀? 무슨 글귀 말인가요?”
“등불, 장막···.”
“아, 기억났습니다.”
“나도 알려줘.”
“안 돼.”
시온이 대화에 끼어들려고 하니, 테일러가 어깃장을 놨다.
“왜?”
“약간의 비밀은 남자에게 매력을 더해주거든.”
시온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언짢은 심정이 느껴졌다.
“너도 우리 심정 알겠지? 그러니까 어디에서 이상한 거 배워와서 써먹지 마라.”
시온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테일러에게서 멀어졌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앨런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고민이 남았니?”
“왜 이곳을 발견하는 방법을 몰랐을까요? 브레이커 정도면 알만 한데 뭔가 이상하네요.”
“이 광활한 설원에서 무작위로 치는 번개가 정삼각형 형태로 내려꽂히는 걸 누가 알겠니.”
“조금만 생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조금? 지형이라도 제대로 보이면 모르겠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극히 제한되는데 그걸 어떻게 파악하니? 사실 가능하다고 해도 돈이 안 되니, 시간을 투자할 가치를 못 느꼈겠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잊고, 유적에 집중하자.”
앨런은 그 말에 따랐다. 정면을 바라보자 웅장한 유적이 보였다. 일단 부지가 굉장히 넓었고, 중앙의 높은 지대에 세워진 고대 신전은 푸른 귀부인이 마음껏 놀아도 될 만큼 넓어 보였다.
신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듯했다. 바닥, 굵은 기둥, 지붕 등의 요소가 모두 매끈하고 하얗게 빛났다.
상자는 반짝임이 마음에 드는지 집게발로 뜯어내려고 했지만, 대리석은 요지부동이었다.
삐이!
화가 나도 어쩌겠는가. 아무래도 밖의 미궁처럼 파괴 불가의 신비가 이곳에도 적용되는 듯했다.
그때 시온이 앨런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보여?”
“네.”
중앙의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건물. 그중 저 멀리 있는 지붕에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탐험가였다.
저쪽도 이쪽을 발견했다. 탐험가들이 지붕 위에 올라선 미어캣처럼 앨런 일행을 주시했다.
공간문 때문에 다른 파티가 협력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해도, 여전히 타인은 주의해야 했다. 어떤 보물을 발견할지 모르는 유적에서라면 특히.
앨런 일행과 저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누군가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그 근처로는 절대 다가가지 않았다.
주변을 대강 살피며 바로 중앙의 신전으로 이동했다. 발을 들인 앨런은 뭔가 익숙함을 느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
고개를 좀 돌리니 복도가 보였다. 양옆에는 파손된 조각상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앨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복도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푸른 귀부인이 잠을 자도 넉넉할 크기였다. 중앙에는 원형의 구덩이가 있었는데, 안이 텅 비어있었다.
‘꿈에서는 용암으로 가득했지.’
이곳은 공간문이 있는 유적에서 봤던, 정확히 말하면 꿈속에서 방문했던 장소였다.
< 눈보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