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1) >
거울, 복도, 조각상, 광활한 방 그리고 원형의 구덩이. 이곳저곳 깨지고 부서지긴 했어도 꿈에서 봤던 공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미궁이 만들어낸 진짜 같은 환상인가, 아니면 꿈을 가장한 현실인가.’
앨런은 미궁의 창조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꼭 보고 싶었다. 탐험가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웠냐고 묻고 싶었다.
약간의 스트레스가 생기긴 했지만, 이것 또한 탐구를 향한 길이라 앨런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결과를 얻는 과정이 어려울수록 느끼는 보람도 커질 테니까.
앨런은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5m 정도의 깊이도 파워슈트가 있으니 거뜬했다.
일단 구덩이라는 표현을 하긴 했으나, 재질을 알 수 없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표면은 매끈했다. 사실 수영장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았다.
‘이 안에 들어있던 용암을 못 봤다면 나도 그렇게 판단했겠지.’
펄펄 끓는 액체와 태연하게 몸을 담그고 있던 사람.
‘아니, 용인가?’
남자의 몸 곳곳에 달라붙어 있던 비늘을 보면 그게 맞으리라. 추측이 틀렸더라도 용의 혈통 정도는 될 것이다.
“뭐해?”
앨런은 위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시온이 머리만 쏙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닿는 머리카락이 이번에는 뺨 아래로 치렁치렁 늘어졌다.
앨런은 시온이 보는 방향을 따라 눈을 내렸다. 저도 모르게 손이 수챗구멍을 매만지고 있었다.
‘용암도 수챗구멍이 필요하나?’
그런 생각은 옆으로 밀어내고, 시온에게 답변했다.
“이 안에 뭐라도 있나 조사 중이에요.”
앨런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용의 비늘이라도 떨어졌나 찾으려 했다는 것을.
못 건지면 어쩔 수 없지만, 찾으면 큰 이득이었다. 용 혹은 드래곤의 신체로 만든 물건은 지금도 굉장한 보물이었으니까. 그들이 존재했다고 확신하는 이유기도 했다.
“위는 어때요?”
“예전에 왔을 때랑 똑같아. 깨끗해. 여기가 유적 중앙이고, 형태를 보면 중요한 의식을 수행하는 장소 같은데 텅텅 비었잖아.”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란 말이죠?”
“응.”
시온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회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앨런도 건질 물건이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온 이유는 전리품 때문이 아니라, 카탄이 남겼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카탄이 뭐라도 남겼을까?”
“글쎄요.”
시온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사실 그녀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모를 법도 하지만, 앨런의 요구를 들은 브레이커의 누군가가 귀띔해줬을 확률이 높았다.
주변을 탐색하던 테일러와 시바도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빈손이야.”
“보물이 가끔 튀어나온 이야기는 들었는데, 오늘은 그때가 아닌가 봅니다.”
앨런이 배수구 안으로 밀어 넣은 거미도 비늘 한 조각 못 찾은 상황. 그래도 유적을 찾았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고대 신전에서 빠져나온 일행은 근처 건물에 캠프를 차렸다. 그곳을 중심으로 유적 전체를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다음 날부터 어그러졌다. 앨런은 시바와 함께 아침 음식을 준비하다가 인기척을 느꼈다.
“형제님, 어제 봤던 탐험가 무리입니다.”
“네, 일부러 소리를 내며 오고 있네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듯 무언가를 두드리며 접근했다. 곧 그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선두에 선 드워프가 백기를 들고 있었다.
“대화하자는 신호 맞죠?”
“네.”
드워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혼자서 천천히 다가왔다. 양날 도끼를 등에 메고 있었는데, 머리 부분만 따져도 자신의 몸통보다 훨씬 컸다.
앨런은 마법공학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는 도끼를 유심히 살폈다. 메이즈시티의 탐험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칠성이나 헥스테크의 물건이 아니었다.
“서방대륙에서 왔군요?”
“눈썰미가 좋은 탐험가군.”
앨런의 예상이 맞다며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가 딱딱한 까닭은 기억수정을 사용해서 솔도스의 언어를 뇌에 때려 박았기 때문이리라.
잠깐의 침묵. 테일러가 텐트에서 나오며 통신을 보냈다.
[거기 사람들이 벌써 여기까지 내려왔구나.]
[공간문만 못 쓰지 두 발로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죠. 그 제한도 한 달 정도 지나면 풀리니 더 많아질걸요.]
앨런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드워프가 미간을 주무르다가 말을 꺼냈다.
“우선 내 이름은 바스코다.”
“앨런입니다. 그래서 바스코 씨. 용건이 뭐죠? 아니면 서방대륙의 미궁에서는 탐험가끼리 만나면 살갑게 인사 나누는 예절이라도 있나요?”
“혹시 비꼬는 건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도 여기랑 똑같다. 본론을 말하지. 내가 온 이유는 치료사가 있으면 도움을 받고 싶어서다.”
치료사. 미궁에 깊이 들어갈수록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직종이었다. 물론 여건상 약만 챙기는 파티도 있지만, 좋은 약도 치료사의 적절한 처방이 있다면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공학자와 더불어서 희귀한 인력이기도 했다. 실력 있는 마법공학자와 치료사는 굳이 미궁에 들어갈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위험한 장소에 뭐하러 다가가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고행을 위해 미궁에 뛰어드는 수도승이나 수녀는 누구나 찾는 인재였다.
“치료사요? 그쪽에는 치료 담당이 없나요?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까지 내려오려면 약품을 충분히 챙겨야 할 텐데···.”
“약이 안 통하니 문제다. 게다가 앓아누운 동료 중에 치료사가 포함되어 있다.”
바스코의 얼굴은 동료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굉장히 굳어 있었다. 깊은 이마 주름이 근심의 정도를 표현해줬다.
시바가 앨런의 허리춤을 두드렸다.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는 성직자답게 가고 싶다는 의미였다.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나설 때는 좀 멋있었는데, 아쉬운 얼굴로 성수병을 품에 집어넣는 모습을 보자 환상이 달아나긴 했다.
“수도승 시바라고 합니다.”
“동족을 만나서 반가운데 성직자이기까지. 그럼 갑시다.”
바스코가 선뜻 등을 보였다. 그만큼 이쪽의 도움이 절실하고, 모신교의 수도승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그들 역시 빈 건물을 캠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천막으로 환자들이 누워있는 공간을 나눠놨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3명이 끙끙 앓고 있었다.
동료들을 물린 바스코만 혼자 남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쭉 이 상태더군.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처럼.”
“얼마나 되었습니까?”
“2일이 지났지. 환자를 챙기며 지상까지 무사히 간다는 보장이 없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마침 도움의 손길을 받았군.”
“어디 한 번 봅시다.”
시바가 무릎을 꿇고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손을 얹거나 몸을 주물러 보기도 하고, 신성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환자를 돌보던 시바가 뒤를 쳐다보자, 바스코가 물었다.
“원인을 찾았나?”
“사람은 생명력, 마력, 정신력으로 움직입니다. 앞의 두 개가 멀쩡하니, 정신의 문제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허어···.”
“전투가 너무 격렬해서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도달했습니까? 아니면 이들의 가정에 우환이라도.”
바스코가 고개를 저었다.
“3명이 동시에 이러니 좀 수상하긴 하군요. 혹시 평소에 우울함의 징조가 있었습니까?”
“쾌활한 친구들이었다. 꽁해있어도 술 한잔이면 금방 잊곤 했지.”
“그렇다면 미궁의 신비, 이 경우에는 저주라고 판단해야겠군요. 어떤 물건이나 특이한 장소를 경험했습니까?”
“안내하지.”
바스코가 건물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유적 탐험으로 얻은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평범한 식기, 목제 의자, 작은 장신구 등 일단 외형은 평범해 보였다.
시바가 품에 손을 넣더니 성수병을 꺼냈다. 휴대용 술병과 비슷한 모습에 바스코가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시바가 성수를 한 모금 머금더니.
푸!
분무기처럼 뿌려댔다. 바스코의 코가 실룩거렸다.
“알코올 냄새? 혹시 그거 술인가?”
“제조 과정에 곡물이 들어가긴 했으나 어쨌든 성수입니다. 축성까지 마쳐서 효과는 확실합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뿌려진 성수가 물건에 닿자마자 하얀빛을 뿜어냈으니까. 입으로 뿜어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때 묻지 않은 색채였다.
시바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여기 있는 물건들은 수상한 점이 없습니다. 혹시 따로 챙겨둔 보물이 있습니까?”
“우리도 환자들의 몸이나 짐을 살펴봤으나 숨겨둔 물품은 없더군. 그럼 우리가 방문했던 건물을 차례대로 안내하지.”
동료들은 캠프에 남기고, 바스코 혼자만 앨런 일행을 안내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내부가 텅 빈 건물들을 지나치고, 식물 하나 없는 화단을 따라 걸었다.
“잠깐만요.”
그러다가 시바의 발걸음이 원통을 닮은 건물 앞에서 멈췄다. 대리석 기둥 역시 건물 외부를 따라 원형으로 세워져 있었다.
“왠지 이곳 기온만 좀 낮은 것 같군요.”
앨런은 바이저의 HMD를 슬쩍 살폈다. 시바의 말대로 다른 곳보다 1~2도 정도 낮았다.
당연히 수색 대상. 하지만 온도가 낮다는 점 외에는 특이사항이 없었다. 땅을 파거나 건물을 부술 수 있다면 조사가 진척되었을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건물의 대리석이나 바닥을 포장은 돌은 파괴 불가능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바스코의 동료 하나가 달려왔다.
“□□□!”
“□□□?”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던 바스코가 상황을 설명해줬다.
“밖으로 나가는 얼음 문이 사라졌다는군.”
이 유적의 입구는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반대로 탈출하려면 그냥 얼음 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됐다. 그러면 35층 어딘가로 이동했다.
일단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사가 흐지부지하게 됐다. 환자를 고쳐도 빠져나갈 문이 사라지면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앨런은 원형 건물과 얼음 문이 있는 방향을 번갈아 쳐다봤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해산하고 내일 일찍 조사하기로 하죠. 음?”
“왜 그러니?”
“목덜미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요.”
“문이 사라져서 걱정되나 보다.”
테일러가 이제야 그 나이대의 청년 같다며 앨런의 등을 두드렸다.
캠프로 돌아온 앨런은 상자의 서랍에서 고열량 압축 비스킷을 꺼냈다. 사실 비스킷의 형태를 띤 영양소 덩어리에 불과했다.
테일러가 인상을 찌푸리고, 시바는 못 본 척하고, 시온은 작은 조각을 하나 챙겼다.
“그건 왜 꺼내니?”
“얼마나 있나 다시 확인하려고요.”
“그거 맛있다고 하는 놈은 사람이 아냐.”
“난 괜찮은데.”
시온이 비스킷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시바가 감탄했다.
“자매님 입맛이 특이하군요.”
“어릴 때 누군가가 독초랑 독버섯을 먹여서 그래. 한동안 혀랑 코가 마비되어서 맛도 못 느꼈어. 힘들었어···”
시온이 말한 누군가의 정체는 뻔했다. 앨런이 테일러를 슬쩍 바라봤다.
“아저씨?”
“내 독단이 아니라 훈련과정이야. 당연히 절차대로 해독약이랑 치료제도 다 챙겨갔지. 너, 자꾸 오해할 만한 발언 할래?”
테일러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양은 적당해?”
“일반 보존식 빼고, 비스킷만으로도 3달을 버틸 수 있어요.”
“그 정도면 적당하네.”
“저쪽 사람들에게 나눠줘도 3달이요.”
“뭘 그리 많이 챙겼니?”
“다다익선이죠. 모자라서 쫄쫄 굶은 것보다 차라리 몽땅 챙기는 편이 낫죠. 음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날 밤, 앨런은 꿈을 꾸었다. 공간 감각을 잃을 정도로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몸은 제대로 보였다.
‘원래라면 꿈의 도서관이어야 했을 텐데.’
바꾸려 해도 검은 공간은 그대로였다. 그때, 저 멀리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제야 왔느냐? 우리의 약속을 잊어버렸느냐?]
이건 미궁의 언어였다. 그 목소리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앨런이 잠에서 깨기 직전, 다른 말을 내뱉었다.
[카탄. 의무를 이행하라.]
< 망령(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