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88화 (188/193)

< 망령(2) >

잠에서 깨어난 앨런은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둑한 텐트 안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귀가 아니라 뇌세포에 직접 의사를 때려 박은 것처럼 또렷했다.

‘약속? 의무?’

정체불명의 존재가 언급한 단어는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그것은 왜 카탄을 기다렸으며, 자신을 카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앨런은 왼쪽 눈 근처를 매만졌다.

‘인공 안구 때문인가. 그렇다면 카탄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매직웨어를 착용한 탐험가가 이곳에 왔어도 똑같은 경험을 했으려나?’

그런 소문의 조각조차 접하지 못했고, 브레이커의 비밀문서에도 그런 내용이 없으니 아닐 확률이 높았다.

앨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설을 하나 세웠다.

‘아이스헨지에서 봤던 카탄의 의지 때문이겠지.’

무심한 표정의 노인은 앨런의 방화벽을 뚫으려다가 실패했다. 환상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긴 마력이 아직도 묻어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꿈속의 존재는 무엇일까. 기억의 바닷속에서 헤매던 앨런은 빠르게 불빛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예전에 테일러와 나눴던 대화였다.

[카탄이 별문자를 해독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몰랐죠.]

[카탄 본인의 능력으로 해독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용의 도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직접 만났다기보다는 그들이 남긴 물건을 통해서요.]

앨런은 거의 뛰어오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상자와 표범이 깜짝 놀라고, 갑작스러운 기척에 테일러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용인가?’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앨런의 몸은 주인도 모르게 어느새 텐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앨런, 어디 가니?”

테일러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일행이 있으니 넓은 유적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행위는 자제해야 했다. 사실 미궁에서의 단독 행동은 미친 짓이기도 했고.

앨런은 아침 식사 시간에 꿈과 가설에 관해 설명했다. 테일러와 시바의 숟가락이 멈췄고, 그릇을 크게 기울여서 수프를 마시던 시온은 한쪽 눈으로만 쳐다봤다.

“용? 내 귀가 이상한 건가?”

“형제님, 저도 분명 들었습니다.”

“음으으음?”

“삼키고 말해.”

테일러가 시온을 타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방문했던 원형 건물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기다렸다는 말이지? 카탄이 지식을 얻기 위해 맹세를 했는데 어겼거나, 아니면 죽어서 이행할 수 없게 되었거나.”

“일단은 그 2가지일 확률이 높죠.”

“그런데 용의 맹세가 그렇게 허술한가? 내가 용이라면 사기꾼 새끼의 영혼을 파괴해버렸을 텐데.”

“여기는 미궁이잖아요.”

“하긴, 분명 막힌 길 같아도 자세히 찾아보면 탈출구가 있긴 하지.”

“아니면 용이 남긴 찌꺼기나, 영락한 다른 존재일 수도 있죠.”

게다가 그 대단한 카탄이 아니던가. 그라면 용처럼 초월적인 존재와 맹약을 했더라도 우회할 방법 하나쯤은 마련해놨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시바가 수염에 묻은 음식을 깨끗하게 닦고 말했다.

“그럼 서방 대륙 탐험가 형제님들이 앓아누운 이유가 그 존재 때문일까요? 정신력을 흡수당했다면 납득되긴 합니다.”

“원형 건물 근처만 이상하게 온도가 좀 낮았잖아. 앨런도 목덜미가 갑자기 서늘했다고 했고.”

“얼음 문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매우 수상합니다.”

시바와 테일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앨런은 길쭉한 쇠꼬챙이로 그림자를 푹 찔렀다. 그리고 시온의 그림자를 찌르려 하니.

“뭐해?”

음식에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던 시온은 너무나 간단히 피해버렸다. 무술에 대해 모르는 앨런이 봐도 굉장히 깔끔한 동작이라 감탄하고 있으니.

“심심해?”

시온은 장난하는 줄 알고 씩 웃으며 앨런의 그림자를 밟았다. 당연히 앨런이라면 피할 수 없지만, 파워슈트는 주인과 달랐다.

저절로 움직여서 시온의 발놀림을 요리조리 피하려고 했다. 탭댄스를 추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테일러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들이 탐험은 안 하고 연애를 하고 있네.”

“풋풋하군요.”

“확실히. 미궁에 미쳐 살아서 그런지 이쪽으로는 아직 애네. 지하에 갇혀있다는 생각, 위기의 상황에 고개를 치켜드는 종족 유지 본능 때문에 탐험가들은 장난 아니거든.”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젊었을 때는 야영지에서 눈만 마주치면 으슥한 곳으로 가서 서로의 뜨거운 숨결과 눈빛을 교환하고, 답답하게 몸을 가린 옷가지를···.”

마침 저쪽 건물 모퉁이에서 바스코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쪽을 보고 있던 테일러가 입을 다물었다.

바스코는 쓰러진 동료들 때문에 애가 타는 상황.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 이른 시간에 마중 왔으리라.

앨런은 시온의 발놀림을 차분하게 분석하다가 멈췄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한 명이 더 쓰러져서···. 어제 얼음 문이 사라졌다고 알려준 친구네.”

“원형 건물이 점점 더 수상해지네요. 그런데 함께 갔던 바스코 씨는 멀쩡하군요.”

“사실 나도 좀 피곤한 상태다. 마력이나 육체는 평소랑 같은데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해야 할까.”

앨런 일행은 다시 바스코의 캠프로 가서, 이번에 생긴 환자를 살폈다. 다른 동료와 마찬가지로 정신에 문제가 있는 듯했다.

앨런이 매직웨어에 자극을 줘도, 시바가 신성력으로 보듬어줘도 일어나지 못하니, 남은 해결책은 제일 수상한 원형 건물 조사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원형 건물 근처에 도착하자 서늘함이 엄습했다. 온도가 1~2도 정도가 낮으니 당연한 현상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난번과 다른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테일러가 심정을 간단히 줄였다.

“어린 시절, 불 꺼진 침대 밑에 무언가가 있는 기분이야.”

“그게 무서워? 때려잡으면 되잖아.”

“전 어릴 때 침대를 안 써봐서 잘 모르겠어요.”

“토 달지 말고 얼른 조사 시작해.”

테일러가 앨런의 등을 두드렸다. 나머지는 근처를 돌며 어제와 달리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앨런은 건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원통형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기둥들을 지나치자, 오싹함이 한층 짙어졌다.

‘이런 느낌을 언제 겪어봤더라···.’

카사라,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아이스틸 결정 안에 있는 도시, 그 중심에 있던 푸른 수정 근처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푸른 귀부인을 보고도 몸이 굳어서 옴짝달싹 못 할 때.

‘유령인가?’

앨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내부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 구조는 굉장히 단순했다. 원형 벽과 높은 천장 그리고 중앙에 있는 우물 비슷한 구조물.

앨런은 바로 우물을 향해 다가갔다. 분명 어제는 우물이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시커먼 안개가 가득했다. 뚫려있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빛도 안개를 밀어내지 못했다.

“밖은 비슷한데, 어?”

마침 내부로 들어오던 테일러가 후다닥 달려왔다. 우물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속을 살폈다.

“직접 들어갈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이번에도 대답이 늦어.”

앨런이 손가락으로 우물을 가리키자, 어깨에 매달려있던 거미 하나가 훌쩍 뛰어내렸다. 우물 벽을 타고 다각다각 내려갔는데, 안개에 닿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당연히 연결도 끊겨버렸고.

이번에는 상자가 건네준 길쭉한 막대기를 들이밀었는데, 안개에 닿은 부분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뭐해?”

“선배, 도와주세요.”

“좋아.”

시온의 오러로 보호받는 막대기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내부를 관찰할 수 있어야 어떠한 계획이라도 세울 텐데, 처음부터 이렇게 콱 막혀버리면 곤란했다.

마침 들어온 바스코가 우물 곁으로 왔다가.

“갑자기 우물이 생겼···, 히익!”

아래를 내려다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시바가 진정 성법을 걸어주고 나서야 거친 숨결이 규칙적인 박자를 되찾았다.

바스코는 우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시바가 건네주는 성수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분명 꿈에서 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거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죠?”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데, 우물이 갑자기 나타나고. 내가 점점 그쪽으로 가더니. 아니, 우물이 다가왔나?”

“그리고 어떻게 됐죠?”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서 내 목을···. 잠깐, 다음은 내 차례야?”

바스코가 밖으로 뛰쳐나갔고, 시바가 그 뒤를 따랐다. 테일러의 눈짓에 시온도 합류했다.

테일러가 우물 쪽에 턱짓하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저 아래로 내려갈 방법을 찾아야죠. 마침 선배도 나갔으니···.”

앨런은 막대기를 들었다. 다시 우물 속으로 집어넣었는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막대기가 멀쩡했다.

“그거지?”

“[공간간섭]이 정답이었네요.”

“내려갈 거냐?”

“그래야겠죠. 바스코 씨의 파티가 전멸하면 다음은 누가 쓰러질까요?”

“···우리겠지.”

테일러의 말투에는 불편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에 대한 짜증과 앨런에게 위험한 일을 맡겨야 한다는 거북스러움의 혼재였다.

“차라리 내가 내려가마.”

“타인에게 적용하기엔 마력 소모도 크고, 너무 불안정해서요.”

“다른 이유도 있지? 바이저 위로 올려봐라. 방독마스크도 벗고. 둘 다 쓰면 안 불편하니?”

“요화 사장님이 마스크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여줘서 괜찮아요. 그런데 마스크는 왜요?”

테일러는 앨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새하얀 뺨에 약간의 핏기가 돌았다. 기대감으로 인한 흥분이 분명했다. 눈에서도 진짜 빛이 뿜어지는 듯했다.

이쯤 되면 말리기 어려웠다.

“좋아. 대신에 안전검증을 하자.”

앨런은 테일러의 말대로 [공간간섭]을 적용한 거미를 몇 차례 내려보냈다. 금방 연결이 끊기긴 했어도, 안개가 없는 바닥과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통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제 팔은 그만 놔주세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위험하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깊이가 10m 정도 되는 우물이라 파워슈트의 충격 분산장치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착지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복도를 바라봤다. 평범하게 어두운 통로 끝에는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서 복도 끝에 도착하니, 꿈속에서 들려왔던 목소리가 이번에도 뇌리를 울렸다.

[카탄, 약속을 지켜라.]

“전 카탄이 아닙니다.”

[또 나를 속이려 드느냐. 내 비록 영락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알아볼 힘이 남아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특유의 냄새가 난다.]

형태 없는 서늘함이 앨런의 왼쪽 눈을 어루만졌다.

“문은 왜 없앴죠?”

[믿음에는 믿음으로, 거짓에는 거짓으로. 이 문이 열린다면, 그 문도 열릴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어둡던 복도에 빛이 생겼다. 매끈하던 복도 표면은 사라지고, 음각된 문자들이 떠올랐다. 룬문자와 회로마법이 어두운 밤의 은하수처럼 빛났다.

새긴 문자가 얼마나 많은지, 한눈에 담으려던 앨런도 잠깐 현기증을 느꼈다.

앨런은 먼저 룬문자에 집중했다. [파괴], [약화], [분쇄], [삭제], [절단] 등 무언가를 제거하는 일에 특화된 룬문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룬문자들을 연결한 마력회로의 끝은 문과 맞닿아있었다.

‘이것을 완성하면 문이 열리는구나. 전부 카탄이 새겼겠지.’

이 문을 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리 생각해도, 본능적으로도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되었다.

‘카탄이 미완성으로 놔둔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저것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얼음 문도 영영 나타나지 않으리라. 앨런은 숨을 깊이 내쉬고, 이번에는 회로마법을 살폈다.

회로마법 역시 문을 부수는 방향으로 설계했는데, 보면 볼수록 앨런의 고개가 크게 기울어졌다.

‘비효율의 극치잖아.’

마력은 마력대로 소모하고, 왜 쓸데없는 회로가 가득하며, 중복되는 문구는 왜 저리 많은가. 카탄은 바보가 아니니,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 믿었다.

문 근처에 있던 앨런은 복도의 시작점, 그러니까 우물 바닥 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복도를 살폈다. 그제야 무언가가 보였다.

작게 새겨진 룬문자들이 이어진 선으로 보였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회로마법을 크게 보니 하나의 문자 같았다.

새롭게 해석하니, 그 뜻이 완전히 달라졌다. 문 쪽에서 살필 때는 봉인의 파괴가 목적 같았으나, 이쪽에서 조사하니 파괴를 위한 힘은 문 내부로 집중되었다.

‘카탄은 저것을 없애려고 했구나.’

저것은 문이 열리면 탈출구도 나타난다고 했다.

이곳을 통째로 날려버리면, 그것도 일종의 개방이 아닐까. 앨런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것이 다시 말을 걸었다.

[카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작업을 마치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데, 보관해둔 마석이나 마정석이 있나요?”

[···.]

앨런은 진실만을 말했다. 카탄이 만든 마법진을 가동하려면 매우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나의 거처로 가라. 거기에서···.]

방법을 들은 앨런은 바로 우물을 빠져나갔다. 저것이 말하는 거처는 유적 중앙에 있는 고대 신전이리라.

< 망령(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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