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3) >
앨런은 우물 벽면의 홈을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위에 도달해서 머리를 쏙 내밀자, 이쪽을 보고 있던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뒤에 서 있는 테일러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공간간섭]이 알려질까 봐 걱정하는 모양새였지만, 앨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브레이커라면 더 많은 신비를 알고 있을 테니까.
시온이 앨런의 손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파워슈트 때문에 200kg을 가볍게 넘는데도 거뜬해 보였다.
“어떻게 들어갔어?”
“아이스헨지에서 얻은 룬문자 덕분에 안개를 무시할 수 있었어요.”
“그래? 다행이다.”
추궁은 그게 끝이었다. 잘 됐다는 듯 고개도 살짝 끄덕여줬다.
시온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신체 강화를 그냥 알려준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앨런은 알고 있다. 시온의 친절은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탐험가 사이를 걷는 그녀는 냉혹한 칼날 그 자체였다.
어쨌든 해결책이 생겼으니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얼음 문은 아직도 없나요?”
“바스코가 정신 차리고 확인하고 왔는데 허탕이라더라.”
“없으면 만들어야죠.”
그 말에 테일러가 마나소드를 들고 건물을 죽 그었다. 험악하게 빛나는 칼날은 표면을 파고들기는커녕 죽 미끄러졌다.
“앨런, 여긴 미궁이야. 너도 대리석에 흠집 하나 못 낸다는 걸 봤잖니.”
삐!
맞장구인지 아닌지, 상자의 기계음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저 아래에 봉인 당한 존재가 있어요. 카탄이 직접 새긴 마법진이 있으니, 그걸 사용할 계획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았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갇혀서 흐른 세월 때문에 약해진 존재. 자신이 카탄인지 아닌지도 못 알아채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믿고 따라와 주세요.”
“그러지 뭐. 그런데 뭔가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요?”
“좋게 말하면 그건데 나쁘게 말하면 행동이 가벼워졌다고 해야 하나.”
앨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테일러의 말을 일정 부분 수용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물 밑에 새겨진 마법진의 정체를 파악하는 시간이 좀 짧았다. 물론 1시간이 그리 짧지는 않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한 자신이라면 3~4시간은 족히 필요했다.
‘아이스헨지에서 만난 카탄 덕분인가?’
어쩌면 그때 흩어졌다고 생각한 의지가 조금은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눈을 문지르다 보니 어느새 중앙 신전, 용암 수영장이 있던 방에 도착했다. 텅 빈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어서 영혼이 알려준 대로 바닥을 매만지니 덜컹 소리가 들렸다.
앨런이 소리의 발생지를 찾기도 전에, 허공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서 '톡' 소리를 냈다.
상자가 집게발로 정육면체 형태의 물체를 집어 들고, 테일러가 옆에서 지켜봤다.
“이거 마정석이잖아. 잠깐···, 보라색!?”
은은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마정석. 그러니까 7급 마정석은 최소 가격이 2천억부터 시작했다. 같은 7급 마석과 비교하면 2배 비쌌다.
톡!톡!
똑같은 마정석이 또 떨어졌다. 3개의 마정석을 본 테일러가 입을 떡 벌렸다. 물욕에 초탈한 듯한 시바도 이번만큼은 시선이 고정되었다. 엄청나게 놀랐는지 입술 사이로 어머님이 자꾸 튀어나왔다.
시온은 마정석을 발끝으로 쳐올려서 손으로 잡아챘다.
“왜 그리 놀라?”
“야, 야, 야! 조심해서 다뤄라.”
“이 정도로는 안 부서져.”
“너는 왜 이리 무심하니. 이걸 팔면 평생 놀고먹어도 못 쓸 돈이 계좌에 꽂혀.”
“돈은 그냥 돈이지. 그리고 후배가 말 못 한 설명에 마정석도 포함이지 않을까?”
평소에는 맹한 시온이 보기 드물게 날카로움을 뽐냈다. 테일러가 눈동자만 움직여서 앨런을 쳐다봤다.
“저게 사실이니?”
“네.”
“오, 이런···.”
앨런은 테일러의 절박한 시선을 무찌르며 마정석을 챙겼다. 상자가 저항하긴 했지만, 카메라 아이를 슥 쳐다보니 집게발에서 힘을 뺐다.
앨런은 막대한 힘이 느껴지는 마정석을 내려다봤다.
“이것 하나만 있으면 최고등급의 타이탄 엔진과 도시를 초토화할 마력 분열탄도 쉽게 만들 수 있죠.”
“도시 초토화는 왜 들어가니?”
“가난한 랑카 출신이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사고관이 마음에 드네요.”
“···.”
“농담이에요.”
앨런은 마정석을 손에서 굴렸다. 마법진의 축은 3개, 마정석도 마침 3개.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했다.
분명 카탄은 모든 준비를 끝내놨다.
그런데 왜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까?
‘여긴 유적이라 누가 방해할 사람도 없···. 방해? 설마, 누군가가 카탄을 제거하려고 했나?’
하지만 앨런이 알기론 카탄은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백 살이 넘었기에 당연하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고.
다시 원형 건물로 돌아가서 우물을 응시했다. 검은 안개가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하나는 확실했다. [공간간섭]의 본래 사용처는 이곳이라는 사실이. 해킹 시도는 정신을 지배해서라도 못다 한 일을 끝내려는 카탄의 의지일 수도 있었다.
앨런은 마정석을 가지고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카탄이 그린 룬문자와 회로마법이 여전히 반짝거렸다. 아직 손에 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해하기보다는 일단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문 근처에 도달해도 용 혹은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존재는 침묵을 유지했다.
앨런 역시 묵묵히 준비를 마쳤다. 축에 끼운 마정석이 빛을 잃고, 대신 마법진이 강렬한 광휘를 품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우렁차게 기지개를 켰다. 앨런은 마력의 격류에 휩쓸리기 전에 우물을 빠져나갔고, 일행과 함께 유적 외곽으로 대피했다.
“무슨 일이지?”
시바를 통해 미리 이야기를 듣고 대피해있던 바스코가 질문을 던져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저 멀리에서 발생하는 마력의 팽창은 무시무시했다.
둥!
한차례 묵직한 진동이 유적 전체로 퍼져나가고, 빛의 기둥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태양 같던 기둥은 곧 사라지고, 그 부분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얼음 문은 자취를 감춘 상황. 다시 한번 폭발의 근원지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앨런 일행은 재차 유적으로 향했다.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바스코 일행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거리를 걷던 앨런의 발에 작은 파편이 밟혔다. 어떤 수를 써도 부서지지 않던 대리석이 조각의 형태로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우물이 있던 건물 근처에 접근할수록 점점 많아졌다.
먼지가 걷힌 장소에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크레이터가 있었다. 당연히 건물과 우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피부가 저릿한데.”
테일러가 마나소드를 뽑아 들었다. 등에 멘 샷건도 왼손으로 옮겨갔다. 짙은 마력 농도 안에 숨겨진 미세한 살의. 그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크레이터 중심부가 들썩이더니 도마뱀 다리를 닮은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허공에서 몇 번 휘적거리다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돌조각이 물처럼 쏟아져 내리며, 붉은 비늘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벽지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몸 곳곳이 검게 물들어있었다.
위용과 몸집도 기대에 못 미쳤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잘 쳐줘야 대형 버스 길이였고, 날개도 없었다. 심지어 몸의 윤곽이 흐릿하기도 했다.
“스스로 영락했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었네요. 뿔도 전부 파괴되었군요.”
“저거랑 대화했어?”
“네.”
앨런은 시온에게 답변하며 드래곤이 이전처럼 말을 걸어주길 기대했으나.
크르르!
입에서는 짐승의 으르렁거림만 빠져나왔다. 기회가 있다면 마력을 끌어올려서 혹시 기억나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른 듯했다.
“정체가 뭐야?”
“드래곤일 걸요.”
“저게? 툭 치면 죽을 것 같은데···.”
드래곤은 괴로운지 침을 질질 흘렸다. 그러다가 몸을 덜덜 떨면 모습이 미세하게 흐려지기도 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를 던졌다.
“중상 입은 도마뱀이잖아.”
크아!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드래곤이 테일러를 향해 돌진했다.
“아니, 갑자기?”
“발작 버튼 눌렀네. 도마뱀. 도마뱀. 도마뱀.”
시온이 무심한 표정으로 계속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그러자 드래곤의 머리가 홱 꺾였다. 흐릿한 눈으로 시온을 노려봤다.
“드래곤이 있다면 한번 썰어보고 싶었어. 원래는 불가능한 꿈이었는데.”
시온이 크레이터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다릿심과 가파른 경사가 만나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화했다.
형체를 잃어가는 드래곤의 송곳니와 사람이 만든 강철의 이빨이 충돌했다. 발생한 충격파가 시온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드래곤이 기둥 같은 팔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아직도 흉흉한 빛을 뿜어내는 발톱이 시온의 심장을 노렸다.
시온은 처음처럼 힘으로 맞부딪치지 않았다. 상대가 자랑하는 특기로 상대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대신 사람에게는 무술이 있었다. 선조의 선조부터 쌓아 올린, 강대한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한 비법.
그녀의 발이 땅속으로 살짝 들어갔다. 주변의 돌조각이 마구 떨렸다. 발이 빠져나오자마자, 몸이 무섭게 가속했다.
“마력의 진동을 통한 폭발. 추진력으로 삼았군요.”
시온의 검에도 마찬가지의 힘이 흘렀다. 멈춰 있는 듯 보여도 검날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뼈까지 덜덜 떨리리라.
시온은 드래곤의 몸체를 따라 움직이며 검으로 사정없이 긁어댔다.
드르륵!
그럴 때마다 붉은 점이 하얀 대리석 파편 위로 떨어졌다. 비늘 조각은 태양 아래의 눈송이처럼 금방 사라졌다.
드래곤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놈의 붉은 눈동자에 분노가 깃들더니, 몸 주변에 화염이 피어올랐다. 거대한 화염 전차가 덩치로 시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진동이 깃든 검으로 화염을 갈라도, 새빨간 혓바닥은 오히려 둘로 나뉘며 시온의 뺨을 핥으려고 했다.
시온은 검을 풍차처럼 휘둘러서 불길을 쳐내고, 화염의 범위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뒤로 날렸다.
펑!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염 분진이 폭발하며 시온의 몸을 뒤덮었다.
앨런은 붉은 장막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시온은 저런 불길에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바이저에 표시된 바이탈 사인은 멀쩡했다. 화가 났는지 맥박이 빨라지긴 했지만.
그 예상대로 회색 검기가 빨간 커튼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시온은 그 속도 그대로 질주했다.
내려찍는 드래곤의 앞발을 발판 삼아 몸을 높이 띄웠다. 핑그르르 회전하는 몸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동했다.
이동 자체가 공격이고, 공격이 이동이었다. 시온은 톱날처럼 드래곤의 등판을 갈아버렸다. 피 대신 비늘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나왔다.
크아아!
지성과 권위를 잃은 짐승과 검 자체를 닮은 무인의 격돌. 테일러는 피가 끓는지 아래로 향했다.
앨런도 당연히 참여할 생각이었다. 보물이 네 발로 걸어 다니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사람, 아니, 마법공학자가 아니었다.
드래곤의 육체가 조금이라도 포함된 마도구는 굉장한 성능을 지녔다. 육체란 비늘 발톱 날개 뼈 등을 지칭하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은 심장이었다.
브레이커의 회장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검에도 드래곤하트 조각이 들어있다고 하니, 추가적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안개처럼 점점 흩어지는 드래곤의 형상을 보면 멀쩡할지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파편만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 망령(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