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4) >
시온의 활약에도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영락하고, 그 상태에서 폭발에 휘말렸어도 드래곤은 드래곤. 스러져가는 모습이어도 일반적인 몬스터와 같은 선상에 놓긴 곤란했다.
또한, 지성 대부분이 박살 나서 주둥이로는 으르렁거리기만 해도, 다른 짐승과 비교하면 영특했다.
드래곤은 아래로 내려온 테일러를 보더니, 잡기 어려운 시온을 무시하며 달려들었다. 대형 버스에 버금가는 덩치가 화염까지 입으니, 그 기세가 사뭇 대단했다.
테일러는 리플렉스 액셀을 가동했다. 타고난 신체 기관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의지를 받아들였다.
반사 신경이 극도로 빨라지고, 사지로 뻗어 나가는 신호 또한 증폭되었다. 테일러가 빨라진 만큼 세상은 느려졌다.
뜨거운 화염이 테일러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을 지져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크레이터 위까지 솟아오른다.
테일러는 후끈함을 느꼈지만, 그런 느낌은 곧 잦아들었다. 반응성 인조 피부 덕분이었다. 열기를 감지하자마자, 피부의 기능을 재정렬해서 내열 및 내화 성능을 갖춘 것이다.
덕분에 나무를 바로 숯으로 만들어버릴 뜨거운 열풍이 들이닥쳐도 버틸 만했다.
“이게 마법공학이다. 덜 떨어진 파충···.”
물론 말을 끝까지 내뱉을 여유는 없었다. 드래곤의 크기는 어마어마해서 살짝만 움직여도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쳤으니까.
테일러는 바로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사실 말만 샷건이지 슬러그탄 발사기라고 해도 좋았다. 미궁의 괴물들은 워낙 단단해서 자잘하게 흩어지는 탄으로는 타격을 주기 힘들었으니까.
탄 자체가 지닌 위력, 거기에 마법공학이 더해주는 운동에너지까지 더해지니 파괴력이 굉장했다.
그러나 드래곤은 파괴력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 이마에 탄을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비늘만 좀 찌그러졌다.
그 사이, 테일러는 반동까지 이용해서 뒤로 몸을 뺐으니,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결과였다.
드래곤은 테일러에게 집중하느라 시온에게 뒤를 내준 꼴이 되었고,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공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불길하게 보일 정도로 짙어진 회색 검기가 굵은 꼬리를 난도질했다. 나름 꼬리를 휘둘러서 회피 및 견제하려 해도, 시온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드드드득!
마치 발골 작업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뼈와 살이 분리되진 않았지만, 비늘이 후드득 떨어졌다.
점점 누더기가 되어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드래곤이 짜증 섞인 울음과 함께 몸을 돌렸다.
잠깐의 여유를 찾은 테일러는 몸에 달라붙는 거미에게 몸을 맡겼다.
[천천히 내려가지 그러셨어요.]
[실전에서 조율하면 돼. 내 몸에 달린 센서로 실시간 파악하고 있잖아. 그치?]
[네.]
앨런은 데이터에, 테일러는 드래곤에게 집중한 채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 거미가 꽁무니를 바삐 움직였다. 원래는 실이 나올 구멍에서 마력회로를 구성하는 혼합물이 나왔다. 거미는 배를 바삐 움직이며 테일러의 장비와 피부에 룬문자를 그렸다.
[내화], [내열]로 충분히 보강한 테일러가 다시 드래곤에게 달라붙었다. 집요하게 뒷다리 사이만 노렸다. 당사자에게 지성이 남아있다면 비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일단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사치였다.
앨런은 거미를 크레이터 곳곳에 배치하면서 옆에 있는 시바를 바라봤다. 그는 오랜만에 치료사 및 버퍼의 본분에만 충실했다.
“왠지 어색하네요.”
“마음 같아서는 저도 내려가고 싶은데 적의 덩치가 너무 크군요. 주먹으로 몇 때 때려도 아파할 것 같진 않습니다.”
시온과 테일러의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를 때마다 하얀 기운을 다트처럼 던졌다. 치료 성법은 빗나가는 일 없이 두 명의 몸을 계속 회복시켰다.
드래곤이 조금만 생각할 능력이 있었으면, 바로 이쪽으로 향했으리라. 원래 전투가 벌어지면 치료사는 최우선 척결 대상이었으니까.
그래도 상대는 드래곤이니 무시할 순 없었다. 다 죽어가는 꼴이어도 근본은 초월적인 존재였다.
자잘한 공격에 상처 입는 듯해도, 완전히 끝장내려면 보다 강력한 일격이 필요했다.
“형제님.”
“네.”
앨런은 다음 수를 준비하면서 시바를 바라봤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드래곤은 엄청 거대하지 않습니까? 날개로 성을 뒤덮고, 앞발로 왕궁을 짓밟고. 그런데 저건 좀 작아 보입니다.”
“그 말이 맞아요. 온전한 상태였다면 푸른 귀부인만큼 거대했겠죠.”
150m에 달하는 괴물을 떠올린 시바의 얼굴이 약간 하얗게 질렸다. 아직도 상대할 방법, 아니, 도망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존재였다.
“만약 드래곤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전투는 성립되지 않았을 거예요. 마법 한 번에 쓸려나갔겠죠.”
“현시대에 진정한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적어도 심도 7은 되어야 가능하겠죠. 그럼 짐승 사냥을 슬슬 끝내볼까요.”
앨런은 위치선정을 끝낸 거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인의 명령에 거미의 마력로가 출력을 최고로 끌어올렸고, 크레이터 곳곳에 푸른 발광체가 가득 생겼다.
크륵?
범람하는 마력을 느낀 드래곤이 잠시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여길 봐야지!”
테일러가 쏘아낸 슬러그탄이 눈 주변을 맞추고.
“흡!”
시온의 검격이 관절을 깊게 파고들자, 다시금 자신을 귀찮게 하는 두 날파리에게 집중했다.
물론 그건 실수였고, 지성을 잃어버린 짐승의 한계기도 했다.
푸른 광원이 똑같은 색의 실을 뿜어냈다. 실과 실은 교차하며 크레이터를 뒤덮는, 거미집을 닮은 그물을 만들어냈다. 위에서 보면 크레이터라는 그릇에 푸른 뚜껑이 덮인 모양새이리라.
[천라지망]
앨런이 시동어를 읊자, 바람도 잡아둘 듯한 그물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시온과 테일러의 몸에 닿아도 그냥 무시하며 지나가더니, 드래곤과 접촉하자마자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크아아!
드래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묵직한 질량 자체가 무기던 앞발은 이전만큼의 위용을 뽐내지 못했다.
설령 화염이 그물을 불태우더라도, 그 부분의 실을 조율하던 거미는 재빨리 끊어내고, 새로운 실을 발사했다.
천라지망을 구성하는 룬문자는 [속박], [접착], [쇠약], [둔화], [마비]. 하나같이 상대를 방해하고 귀찮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본래라면 이름 따위 지을 생각이 없었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룬문자의 구조를 보며 생각을 바꿨다.
게다가 하나로 묶어서 명칭을 정하니, 왠지 모르게 연결이 공고해지고, 위력도 강해졌다.
‘명령문의 집합체는 프로그램이지. 별문자도 비슷한 개념이고. 괜히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니었어.’
좀 늦게 깨달은 것 같지만, 이게 마력구조체를 몸속에 만들 수 있는 마법사와 그게 불가능한 마법공학자의 차이였다.
사실 룬문자 4개까지는 개별로 부르나, 하나로 묶어서 지칭하나 차이가 없기도 했다.
높은 지대에서 그 광경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던 시바가 감탄했다.
“마법공학자가 아니라 마법사 같군요.”
“마력 구조체를 못 만드니 마법사는 아니죠.”
안 그래도 마력 때문에 혼란스러운 신체 내부에 구조체를 만들면, 그건 믹서기 날을 몸 안에서 회전시키는 꼴이었다. 앨런은 자신의 몸속을 슬러시처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드래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자, 근접전을 펼치던 두 명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잠깐 시간 끌어줘!”
“오냐.”
테일러는 별말 없이 시온의 부탁을 들어줬다. 샷건의 탄환을 일부러 최루액이 잔뜩 들어있는 녀석으로 바꾸고, 드래곤의 눈과 호흡기만 노렸다.
핏줄 가득한 눈이 더욱 빨개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드래곤은 테일러만 쫓아다녔다.
그 사이, 시온은 검을 검집에 꽂았다. 전장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기도 했다.
거짓말처럼 그녀의 주위만 고요해졌다. 전투 때문에 격렬하게 반응하던 마력도 침착하게 정렬했다.
단 하나, 시온이 양손으로 꾹 잡은 검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조용했다. 미세한 떨림도 드래곤의 무게가 발생시키는 진동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금방 깨졌다. 검 전체가 격렬히 떨리기 시작하더니, 말벌 수십 마리가 귓가에서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를 크레이터 전역에 퍼트렸다.
부우웅!
시온의 주변에 쌓여있던 먼지와 돌가루들이 원형을 그리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온이 지닌 무술의 근원은 파동. 검집 내부에서 진동이 중첩 또 중첩되며 계속 위력을 증폭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짐승이라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력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테일러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드래곤.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침묵하는 시온.
불과 5m의 거리에서 시온이 손목을 비틀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검은 이미 검집을 빠져나와 있었다. 비스듬히 뽑힌 검이 하늘을 가리켰다.
드래곤의 가슴에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깔끔하게 잘린 뼈를 넘어서 펄떡펄떡 뛰는 심장까지 보였다.
비늘과 함께 붉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양은 점점 많아졌고, 그럴수록 드래곤의 모습이 더욱 빠르게 흐려졌다.
쿵!
높이 들려있던 앞발이 땅을 찍었다. 본의가 아니라 상처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에서도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그 어느 때보다 세찬 화염이 목구멍 속에서 이글거렸다. 당연히 목표는 시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참격을 뿜어냈던 검은 여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잘게 바스러졌다.
이글거리는 화염은 점점 부피를 키우더니 드래곤의 입 밖까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꼬리 쪽에 있던 테일러는 시온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고, 시바는 빠르게 보호의 성법을 외웠다.
그리고 앨런은.
“발사.”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기다란 꼬챙이가 드래곤의 아가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펑!
덩치를 부풀리던 화염이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드래곤의 머리를 뒤덮고 위로 솟구쳤다.
어느새 아래까지 내려간 표범이 시온의 옷을 물고 뒤로 후퇴했고, 테일러도 그 모습을 보고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쿵! 쿵!
드래곤이 쓰러졌다. 기다란 목도 아래로 꺾이며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그리고 분해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붉은 비늘이 벗겨졌다. 그다음은 살점이 흩날렸다. 뼈도 가루가 되어 흩뿌려졌다. 마치 강풍에 놀란 꽃나무들이 화들짝 놀란 듯한 장면이었다.
그러다가 작게 폭발했다. 주변에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고, 오직 드래곤의 모습만 사라졌다.
그렇게 현장에는 앨런 일행만 남았다. 앨런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까맣게 변한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끝이겠지?”
펑!
마침 저 멀리서 폭죽이 터졌다. 얼음 문이 생기면 터트리라고 전해줬던 신호탄이었다.
“확실하네요.”
앨런은 드래곤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 재빨리 다가가려다가 발을 멈췄다. 일단 시선은 그쪽에 고정한 채로 물었다.
“몸은 괜찮나요?”
“당연···.”
“멀쩡해!”
시온의 목소리가 테일러의 말을 끊었다.
“니가 아니라 내 안부를 물은 거다.”
“어른이 속 좁게 그러면 안 돼.”
“저거, 저거. 도대체 누가 저렇게 키웠는지···.”
테일러가 이마를 '탁' 치는 사이, 앨런은 폭발 장소에 다가갔다. 안타깝게도 드래곤의 시체는 없었다.
그래도 수확이 있긴 했다. 검게 변한 비늘 몇 조각, 골다공증 걸린 듯한 뼈 몇 개. 드래곤의 몸뚱이를 온전히 얻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앨런이 온몸으로 실망을 뿜어내고 있으니, 테일러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니. 미궁이 허락한 게 이것뿐인 것을.”
“미궁이요?”
“그녀는 매력 넘치지만, 매우 변덕스럽기도 하지. 여자들은 ‘그’라고 표현하기도 해.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는 거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카탄의 마법진을 가동하면 드래곤이 아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이거라도 얻었으니 예상외의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전투를 겪었으니 휴식과 정비가 필요했다. 테일러와 시온의 겉은 멀쩡해도 속은 만신창이이리라.
캠프로 가는 도중 테일러가 시온을 타박했다.
“누가 그렇게 큰 공격을 함부로 쓰래?”
“나 혼자 있을 땐 안 써. 동료가 있으니까 사용했지. 그러려고 함께 다니는 거잖아. 아냐?”
“어, 어. 그게 맞지.”
그러려다가 실패하긴 했지만.
테일러와 시온이 깊이 잠들어도 앨런은 드래곤이 남긴 물건을 조사했다. 외형은 누가 먹다 버린 것 같아도 마력 전도율은 굉장히 높았다.
그러다가 등을 돌리고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원래는 저런 아이가 아니었다. 조용히 다가가니, 집게발로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게 뭐야? 이리 줘.”
상자가 집게발을 내리며 카메라 아이만 빙글빙글 돌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행동이었다.
“스읍!”
앨런이 눈을 가늘게 뜨자, 순순히 집게발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아주 작은 붉은 조각이 있었다.
< 망령(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