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5) >
앨런은 붉은 조각에 시선을 빼앗겼다. 항상 머릿속을 뛰놀던 생각들이 잠시 멈출 정도로 매혹적인 빛과 분위기를 내뿜었다.
오래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이건 드래곤 하트의 파편이었다.
드래곤은 최후를 맞이하며 작게 폭발했다. 그때 붉은 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으니, 거기에 숨어서 날아갔으리라.
“어떻게 찾았지?”
비빅···
앨런의 물음에 상자가 힘 빠지는 소리를 냈다. 카메라 아이와 집게발이 축 늘어진 모양새를 보니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 힘들어 보였다.
상자의 영혼석은 사실 까마귀 오토마톤의 것이었다. 앨런은 그걸 포맷하고, 별문자를 새로 입력해서 상자를 일으켰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물체를 좋아한다지. 이전 별문자를 깨끗하게 지웠어도 그 여파가 남아있나?’
영혼석이 이름처럼 영혼을 담는 돌이라면, 포맷 이전의 별문자는 전생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장면이었다.
앨런은 문뜩 떠오른 흥미 본위의 잡생각을 흩어버리고, 드래곤 하트를 제대로 조사하려다가 상자를 쳐다봤다.
‘칭찬은 누구나 좋아하지.’
기특한 일을 했으니 긍정적인 피드백이 필요했다. 그래야 나중에 똑같이 행동할 테고, 유대감 형성에도 좋다고 들었다.
앨런도 어릴 때 익히 경험한 바였다. 쓰레기장에서 구한 부품으로 간단한 물건을 만들어도 부모님은 잘했다고 등과 엉덩이를 토닥여줬었다. 그 따뜻함이 좋아서 자신이 봐도 별 효용 없는 물품을 자꾸 만들곤 했다.
“잘했어.”
삐릭!?
상자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멀리 달아났다. 그러다가 표범과 부딪쳤는데, 표범은 냥냥 펀치를 날리기는커녕 주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건 생소한 반응이라 앨런은 흥미를 느꼈다.
“칭찬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면 ‘잘했다.’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 입력을 실수했나? 이리와. 문제가 있으면 살펴봐야지.”
사람으로 치면 두개골을 열어봤다가 닫겠다는 뜻이라, 둘은 안 오려고 했다. 꾸준히 별문자를 업그레이드 해주면서도 느꼈는데, 왜 싫어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강해지면 너희도 좋잖아.”
삑!
“싫어? 알았으니까 망이나 잘 봐.”
그러자 안심하는 상자와 표범. 목욕할 뻔했다가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풀려난 개처럼 신이 난듯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주인은 다시 샤워실에서 개들을 부른다. 아니면 안아서 강제로 데리고 가거나.
마침 시바도 복귀했다. 바스코 파티가 바로 옆 건물에 캠프를 차려서 오가기 쉬웠다.
“그쪽은 어떤가요?”
“혼수상태에 빠졌던 형제자매님들이 다시 눈을 떴습니다. 정신력을 흡수당해서 불안 증세를 보이긴 하는데, 며칠 잘 먹고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잘됐네요. 유적은 원래 괴물이 없는 곳이라 마음 편히 쉬겠군요.”
“아, 그리고.”
시바가 장신구를 건넸다. 앨런이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작은 로켓이었다.
“이건 왜?”
“바스코 형제님이 고맙다고 이걸 건네줬습니다. 그 건물에 접근한 사람 중에 자신만 멀쩡히 버틴 이유가 그 장신구 같다면서요. 흠, 앨런 형제님이 살피고 있는 조각은?”
시바가 이번에는 붉은 파편에 관심을 가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새끼손톱을 작게 깎은 듯한 크기의 조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요사스러운 빛을 뿜어냈다.
“드래곤 하트 같습니다.”
“네···?”
굉장한 보물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시바의 말문이 막혔다. 드래곤의 삭은 비늘이나 구멍 뚫린 뼈를 좀 챙겼지만, 하트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니, 충격이었다.
성수를 마시고, 어머님께 기도하고, 다시 성수를 머금으며 뺨을 툭툭 두드렸다. 다시 맑은 눈으로 구경했다.
“대단하군요. 그런데 이름난 마도구에 들어있는 드래곤 하트는 적어도 엄지손톱 크기인데, 이건 좀, 많이 작습니다.”
“저도 그 점은 안타까운데,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 조각을 지닌 드래곤은 얼마나 강했을까요?”
“이번에 싸운 드래곤은 생각보다 쉽게 잡지 않았습니까?”
“시온 선배의 존재 그리고 공간문 덕분에 준비한 전투 물자를 적게 소비한 덕분입니다. 아낀 마석을 이번에 몽땅 투입한 셈이죠.”
시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거미 하나에 100만 코인짜리 마석이 하나씩 들어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거미를 수십 마리 뿌렸으니, 얼마를 썼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드래곤이라고 불러도 될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약하기도 했고요.”
“그건 맞습니다. 그 조각, 왠지 불길해 보이는데 잠깐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시바는 조각을 받자마자 두 손으로 감싸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어도 반응이 없으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려줬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귀물은 사람을 홀리기도 하니까요. 악마의 계략에 빠진 사람도 당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모릅니다.”
“네.”
시바는 신성력을 채운다고 기도를 올렸다. 사실은 기도 자체가 마력 순환의 과정이었다.
앨런은 조사하기 까다로운 하트를 밀어두고 로켓을 살폈다. 갑을 열어봐도 그 안은 깨끗했다.
육안으로는 충분히 살폈으니 다음 방법을 동원할 차례. 인공 안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안구는 원래부터 투시, 검류계, 감별 등 마법공학자용 고급 기능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는데, 앨런의 개조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다.
로켓을 주시하자마자 엑스레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내외부가 동시에 보이고, 표면 및 내부에 미세하게 흐르는 마력의 흐름도 감지되었다.
‘내부의 흐름은 잘 안 보이네. 부도체로 만들었나?’
갑을 다시 열고 내부를 살피자, 새까만 광택이 번뜩였다.
‘아다만티움에 이것저것 섞었나 보네···.’
아다만티움은 마력을 차단하는 성질이 있어서 무언가를 보관하거나 숨기는 목적으로 쓰기 알맞았다.
마침 이 안에 담기 좋은 물건이 있었다. 드래곤 하트가 뿜어내는 마력을 막을 테니, 누군가가 불시에 스캔한다 해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사실 드래곤 하트를 알아볼지도 의문이었다. 드래곤은 현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하트가 담긴 마도구는 실력자들이 애지중지했으니까.
조사에 힘쓰던 앨런의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질 무렵,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테일러는 일어나서 뭔가를 먹고 있었고, 시온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테일러가 에너지바를 우물거리며 다가왔다.
“별일 없지?”
“드래곤 하트예요.”
앨런이 선홍색 조각을 보여주자, 테일러가 헉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한쪽 눈만 뜨고 앨런을 올려다봤다.
“아니, 사람이 쓰러졌으면 괜찮냐고 물어봐야지.”
“바이탈 신호가 정상이라 장난인 줄 알고 있었죠.”
“그래···, 장난이긴 했지···.”
“나도 하트는 처음 봐.”
시온이 테일러를 밀어내며 앞에 자리 잡았다. 회색 눈동자가 드래곤 하트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로네. 너무 작고, 품은 마력도 쪼끄매.”
“그래도 쓸모는 있을 거예요.”
앨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일러와 시온도 깨어났으니, 아직 안 돌아다닌 곳을 죄다 방문할 생각이었다.
앨런이 짐을 놔두고 나서니, 테일러가 따라붙었다.
“다른 파티도 있는데 걱정 안 되니?”
“어차피 중요한 건 상자 안에 있고, 저라면 거기 놔둔 짐을 건들지 않을 거예요.”
“부비트랩이라도 설치해놨어?”
“차라리 그거면 편히 갈 수 있죠.”
“더 심한 게 있다고?”
앨런은 어깨 으쓱거렸고, 테일러는 굳이 묻지 않았다.
조사하고, 허탕 치고, 탐색하고, 작은 소득을 얻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얼핏 따분해 보였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것이 미궁 탐험가의 본질이자 본업이니까. 전투보다 평화로운 탐색이 훨씬 편하기도 했다.
앨런은 남들보다 훨씬 바빴다. 낮에는 유적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꿈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때문이었다.
그게 너무 즐거워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자각몽 안에서는 테일러가 얼른 자라고 방해할 일도 없으니, 마음 편히 지냈다.
하트 발견으로부터 며칠 후, 평소처럼 책장 속에 파묻혀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덜컹덜컹 흔들리더니 가지런히 꽂혀있던 책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지진?’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여기는 앨런의 자각몽.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는 첨가하지도 않았다.
‘꿈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는 몽마나 정신침투 혹은 뇌 확장 장치 해킹 등등.’
앨런은 가장 가능성 큰 추측 몇 개를 골랐다. 인공 안구에 문제가 생겼거나, 아직도 드래곤의 정신이 남아있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있던 책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도서관 벽면을 향해 다가가니, 여태껏 없던 창문이 나타났다.
앨런은 투명한 유리창에 얼굴을 딱 붙였다. 높은 첨탑에 서 있는 자신, 발밑에 깔린 평평하고 텅 빈 지대, 그곳을 감싸고 있는 성벽.
문제는 외부에서 발생했다. 정신방벽 및 방화벽을 형상화한 성벽 밖에서 무언가가 충돌하고 있었다.
저곳을 보고자 하니, 시야가 확대되었다. 그곳에는 익숙한 존재가 둘이나 있었다.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반투명한 유령 같은 모양새의 드래곤.
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카탄.
그때 흩어진 줄 알았더니 아직 남아있었다. 앨런은 저 양반이 어디에 숨어있었나 고민했다.
‘인공 안구 영혼석의 배드섹터.’
우주를 닮은 별문자 입력창에는 아직도 앨런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이 남아있었다. 까맣게만 보이는 구역이라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관측이 힘들었다.
자신의 기술로 만든 인공 안구니, 그곳에 숨기도 어렵진 않았으리라.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든 공간이거나.
둘은 앨런이 보거나 말거나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혀를 잡아당기고, 눈을 찌르고, 뒤엉켜서 데굴데굴 구르고. 나름 위대한 존재들의 개싸움을 보고 있으니, 환상이 살짝 깨졌다.
[□□ 배신자 □□□!]
[마땅한 주인□□ 속죄□□!]
서로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앨런에게는 단어 일부만 들렸다.
앨런은 지난번에 테일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궁의 허락.’ 미궁이 자신에게 승인한 정보가 딱 저 정도라는 의미였다.
그 외의 정보는 드래곤과 카탄, 둘 다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진짜가 남겨놓은, 혹은 미궁에 의해 강제로 복사된 파편에 불과했다.
앨런의 몸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꿈속이라 그건 자신의 마음대로였다.
성벽 위에 우뚝 서자, 치열하게 싸우던 드래곤과 카탄이 동시에 이쪽을 쳐다봤다. 둘의 정신은 연리지처럼 이어져 있었다.
앨런은 둘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들은 앨런이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카사라에서 만난 파괴자는 앨런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아래로, 선택, 조심.]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이 선택의 순간일 수도 있었다. 카탄의 손을 잡느냐, 아니면 드래곤의 요구를 듣느냐.
예전의 앨런이었다면 바로 카탄의 손을 들어줬겠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마음대로 남의 정신에 침투하려고 한 사람을 도와야 할까? 심지어 지배 및 세뇌 목적이 농후하기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의식을 건드렸으리라.
“책 읽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고 둘이 싸우세요.”
앨런이 성벽 난간에 걸터앉으니, 둘은 다시 맞붙었다. 성문이 공격받거나 둘 중 하나가 사라지려고 하면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면 됐다.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앨런은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둘의 정신이 많이 깎여나가면, 그때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원래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양쪽의 이야기를 골고루 들어야 했다.
관건은 파편에 불과한 저들이 미궁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 망령(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