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령(6) >
말리면 싸우고, 부추기면 눈치만 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카탄과 드래곤은 상대를 무조건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맞부딪쳤다.
정신과 정신의 싸움이라 현실의 전투 양상과는 많이 달랐다.
드래곤이 갑자기 잽을 날리고, 카탄이 입을 크게 벌려서 꼬리를 깨물고, 몸이 길쭉해지더니 뱀처럼 서로의 몸을 옥죄기도 했다.
앨런도 책에 집중하다가 둘이 보여주는 기괴한 모습에 몇 번 정신을 빼앗겼다.
원래부터 흐렸던 둘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졌다. 가까이에서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까 걱정할 정도였다.
슬슬 붙잡아둘 시간이었다. 앨런은 책을 읽는 척하며 속박할 방법을 연구했다.
‘예전에 카탄이 침입했을 때 방화벽인 성벽은 못 뚫었지.’
앨런의 뇌가 반쯤 깨어났다. 본래는 자각몽 속에 있었지만, 드래곤과 카탄이 등장한 후로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벽과 똑같은 기운과 구조의 방화벽이 불쑥 일어났다. 철창으로 변하더니, 카탄과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열심히 치고받느라 진이 빠진 둘은 쉽게 잡혔다. 반항할 기운도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름난 존재들이 그러고 있으니 동네 할아버지와 동물원 몬스터 같긴 했다.
앨런은 카탄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분신이죠? 강렬한 의지가 담긴.”
[그래. □□□]
카탄은 바로 입을 열었지만, 긍정의 대답까지만 들리고 뒤에 덧붙인 말에는 심한 노이즈가 꼈다. 심지어 입 모양조차도 알아볼 수 없게 얼굴 형상이 뒤틀렸다.
잠깐 기다리니 마구 주물러진 찰흙 같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탄의 분신은 예상했다는 듯 차분했다.
“미궁의 간섭인가요?”
카탄은 비밀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더욱 빠르게 흐려졌다.
앨런은 재빨리 질문했다.
“드래곤 때문에 의사를 나눈 건가요? 분신 맞죠?”
[나의 탄생 목적은 그게 맞다. 저것이 사람들에게 마수를 뻗지 못하게 막는 역할이었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초반부터 일이 더럽게 꼬이긴 했는데, 어쨌든 결과는 만족스럽군.]
앨런의 예상대로 카탄이 남긴 의지는 드래곤을 완전히 끝장내기 위한 것이었다. 반대편 철창에 갇힌 드래곤을 가리켰다.
“혹시 저것도 분신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파편이 남긴 찌꺼기지.]
“드래곤 하트에 깃든 잔류 사념에 불과하군요.”
[이해가 빠르군.]
“그냥 놔둬도 별문제는 없었겠네요.”
그 정도면 상자가 몰래 챙겼어도 ‘내 보물!’이라고 소리치며 미쳐버릴 염려는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손에 들어왔으니 만약의 미래도 차단되었다.
앨런은 드래곤이 갇힌 철장을 바라봤다. 드래곤은 황소 크기로 줄어든 상태였다. 지금도 사람에 비하면 크지만, 얼마 전과 비교하면 귀여울 지경이었다.
작아진 드래곤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흘렸다.
크르르!
“정신줄을 이렇게 놓아버리면 곤란한데···.”
왜 싸우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러면 사로잡은 보람이 없었다.
크앙!
아까는 카탄을 보며 배신자라고 하더니 이제는 말문이 완전히 막힌 듯했다.
‘배신자라···.’
탈출을 대가로 지식을 전수해줬는데 먹튀 당했으니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앨런은 다시 카탄을 보며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미궁은 뭐죠?”
[과거 그리고 □□□]
“뭐라고요?”
[못 들었으면 어쩔 수 없다. 그 누구도 미궁의 법칙에 거역할 수 없어. 다만, 하나는 알려줄 수 있지. 미궁을 파악하려면 아래로 내려가라. 그리고 아무도 믿지 마라.]
카탄 역시 파괴자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와 동시에 몸 곳곳에 균열이 생겼다. 대화 자체가 존재력을 깎아 먹는 행위이리라.
하반신이 거의 다 사라졌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카탄의 분신은 앨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나하트 때문에 발생하는 몸의 증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나?]
“마력과다증 말인가요?”
[그래. 나는 □□□라고 부르지.]
이번에도 말이 잘렸다. 카탄도 인지했는지 미간을 찌푸렸으나,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 하트를 얻었으니 크게 호전시킬 방법이 있다.]
“어떤 방법이죠?”
앨런의 목소리에 흥분이 깃들었다. 테일러가 들었다면 어디 아프냐고 물을 정도로 어조가 높아졌다.
[아쉽게도 나에겐 없는 기억이군. 본체는 알고 있겠지.]
“하지만 본체는 땅에 묻혔어요.”
[삼가 조의를 표하지.]
이럴 거면 왜 말했냐고 따지고 싶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드래곤 하트를 연구하면 된다는 뜻이라 좋게 넘어갔다.
[이제 끝이군. 목적을 달성했으니 여한이 없도다.]
“치료에 대한 단서는 왜 알려준 거죠?”
[선택 잘하라고. 보상 없이 감정에만 호소하는 시대는 예전에 지났잖나.]
그 말을 끝으로 카탄의 분신이 사라졌다. 혹시 저번처럼 몸을 숨겼나 샅샅이 조사했지만,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 버티고 있는 드래곤이 철창에 머리를 바짝 붙이고 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라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앨런은 멀뚱히 구경만 했다.
무슨 수를 준비해뒀을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한단 말인가. 카탄이 있을 때 일부러 짐승 소리를 내던 것도 수상했다.
“저리 가세요.”
앨런이 손을 휘젓자, 드래곤은 크르릉 소리 내더니 진짜 사라졌다. 귓가에 속삭임 하나를 남기긴 했다.
[발버둥은 무의미하니,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하라.]
도무지 뜻을 알기 어려운 말이었다. 사실 카탄처럼 순순히 말해주는 쪽이 더 수상했다. 어쩌면 그의 말도 100퍼센트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카탄의 의지가 미궁에 의해 변질되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속이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니까.
앨런은 눈을 뜨자마자 로켓을 열어봤다. 얌전히 있는 빨간 하트 조각은 시바가 언급했던 요사스러운 빛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1급 마석이나 깨진 루비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앨런은 고개를 돌렸다. 침낭 애벌레가 된 시온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있으세요?”
“아니.”
맛있는 냄새를 쫓아 눈동자를 굴리니,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인 테일러와 시바가 보였다.
‘강력한 정신방화벽이 필요해.’
카탄과 드래곤의 정신 침투. 아래로 내려가면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발생할 수 있었다. 미궁이 험난해지는 만큼 더욱 강력한 파편이 기다릴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둘이 아니더라도 다른 미궁의 존재에 의해 정신을 지배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 상태로 지상을 활보하고 있겠지.
뇌 확장 장치는 삶의 질을 끌어올렸고 전투에도 큰 도움이 되지만, 악독한 마음을 먹은 누군가에게는 출입구를 달아준 것과 똑같았다.
어떤 기술이나 마법에도 일장일단은 있으니, 뇌 확장 장치만 탓할 수는 없었다.
*
지상으로 돌아온 앨런은 바로 드래곤 하트 연구에 착수했다. 하트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는 수준이라, 처음부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했다.
유명한 연구기관이나 학자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면 엎드려서 제발 와달라고 청하겠지만, 일단 외부에 알리는 것 자체가 별로였다. 앨런에게도 독점욕이 존재하기도 했고.
‘드래곤 하트···.’
놀라울 정도로 마력 흡수율과 속도가 뛰어났다. 새끼손톱을 깎은 듯한 크기임에도 용량 또한 어마어마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진 1급 마석 같은데, 간단히 실험해본 결과 3급 마석을 가볍게 웃돌았다.
더 놀라운 점은.
‘살아있는 것 같아.’
앨런의 착각이 아니라면 조각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정도는 아니고, 충전 속도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의미였다.
일주일 전에 완충까지 10시간이 걸렸다면, 오늘은 9시간 59분 50초. 이런 식으로 말이다.
드래곤 하트는 매우 게걸스러웠다. 성장에 마력을 소모하는지, 계속 마력을 탐했다. 아다만티움으로 도금된 로켓이 아니었다면 창고 내부의 마력 밀도가 낮아질 정도였다.
‘마력과다증은 이름 그대로의 병이지.’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는데, 통제가 안 되는 마력이라 거칠기까지 했다. 굳이 따지자면 강 주변을 초토화하는 홍수와 비슷했다.
이걸 막으려면 제대로 된 댐을 건축하거나, 다른 곳으로 물길을 만들어서 수위를 낮춰야 했다.
‘드래곤 하트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앨런은 고민하기보다 행동했다. 마력 투석에 사용하는 장비 일부를 구해서 바로 분해했다. 몸에 꽂는 케이블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원형 장치를 마석등에 비췄다.
투명하고 미세한 바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몸에 꽂으면 케이블을 통해 마력을 빨아들였다. 마치 거머리처럼.
지금은 케이블을 뚝 떼어낸 상태. 앨런은 미리 준비해뒀던 드래곤 하트와 원형 장치를 결합했다.
‘아저씨는 웨스턴스카이에 갔고, 시바 씨는 병원에 봉사 활동하러 갔지.’
시온은 다른 집에 살았다. 따라서 눈치 볼 사람이 없었다.
숨을 몇 차례 내쉬고, 바로 팔뚝에 장치를 붙였다. 무언가가 파고든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바늘이 워낙 작아서 통증은 없었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마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드래곤 하트가 먼저 움직였다. 자연의 마력을 탐하던 녀석은 훨씬 밀도가 높은 에너지원을 발견했다. 그건 앨런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었다.
탐욕스러운 조각이 손을 뻗어서 마력을 마구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앨런이 따로 통제하지 않으니, 마력이 계속 빠져나갔다.
“음···.”
앨런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마력이 급격히 움직이면서 생긴 마찰이 마력 회로를 괴롭힌 탓이었다. 너덜너덜한 도로 위로 과적한 트럭이 지나가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다음에는 마나하트가 반응했다. 마력 포화도가 낮아지니 바삐 움직이며 마력을 뿜어냈다.
‘좀 게을러도 될 텐데 누굴 닮아서 이리 부지런한지···.’
앨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전신의 마력이 빠르게 흐르니 통증이 몇 배로 불어났다. 평소에는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장침으로 푹푹 찌르고 있었다.
주인이 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으니, 옆에서 지켜보던 상자가 수건으로 이마를 정성스레 닦았다.
‘기특해.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업그레이드해줘야겠어.’
물론 상자나 표범이 들었다면 까무러칠만한 생각이었다.
한동안 고통을 참고 있으니, 드래곤 하트의 흡수 속도가 점점 더뎌졌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소득은 없나···.’
앨런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드래곤 하트가 삼켰던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앨런의 몸이었다.
마력이 너무 많아서 괴로운데, 거기에 추가로 마력을 투입한다? 그건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었다.
앨런은 바로 떼려고 장치에 손을 얹었다가, 그 자세로 멈췄다. 생각보다 고통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편했다.
드래곤 하트의 마력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앨런의 마력이 잠잠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그리고 얌전하게 움직였다.
마치 목양견과 양 떼를 연상케 했다. 양이 워낙 많아서 통제를 벗어나는 개체가 수두룩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테일러 수련법과 드래곤 하트는 생각보다 궁합이 좋았다. 어쩌면 드래곤 하트 자체가 모든 마력 작용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만 돌려주는 것일 수도 있고.
‘괜히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게 아니었어. 이게 카탄의 분신이 말했던 치료법일까? 아니지 호전이라고 했지.’
일단 몸이 매우 가벼웠다. 항상 지금만 같으면 통증 때문에 빈번하게 잠에서 깰 일도 없을 듯했다. 자각몽을 통한 공부도 사실은 통증을 잊으려는 방편이었다.
‘마력투석보다 이쪽이 훨씬 뛰어나.’
사실 마력투석은 그 후의 과정 때문에 번거로운 치료기도 했다. 마력을 빨아들일 때 손상입는 마력회로도 회복시켜야 하니까.
하지만 마석 대신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니 그런 절차를 아예 생략해도 됐다.
‘약화된 드래곤 더 없나? 몇 마리만 더 잡으면 딱 좋겠는데.’
앨런의 정신이 점점 가라앉았다. 오늘은 왠지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피살이꽃 씨앗을 받으러 간다는 핑계로 웨스턴스카이에 갔던 테일러가 집에 돌아왔다.
“또 의자에서 자고 있네.”
테일러는 앨런을 옮기려다가 그만뒀다. 오늘따라 표정이 굉장히 평온해 보인 까닭이었다.
< 망령(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