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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9)화 (9/107)

지낭 제갈규 (2)

‘다... 행인가?’

연우혁은 당혹스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당혹스러움은 진법에 쌓인 기운을 멋대로 날려버려서였고, 안도감은 공 총관이 그 사실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공 총관은 연우혁이 해결해줬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그래. 제갈세가의 사람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기겁해서 공 총관의 말에 대답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위험해서였다.

무림인들에게 자존심은 어떻게 보면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스스로의 이름이나 명성이 더럽혀질 바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이들이 흔했다.

실제로 연우혁이 해결한 사건들 중에 무림인과 관련된 사건들은 동기에 명예나 자존심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자신의 무공을 모욕해서, 자신의 별호를 모욕해서, 자신의 실력을 모욕해서, 자신의 사문을 모욕해서...

이런 무림에서 만약 공 총관이 ‘한경의 포쾌 하나가 신통력이 있는데 그 재주가 제갈세가보다 뛰어나다더라’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는가?

공 총관이야 좋은 의도로 말하더라도 제갈세가의 무인들 중 한 명만 발끈해서 찾아오면 그 날로 연우혁은 명포쾌가 아니라 시체 포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 총관은 연우혁의 속마음도 모르고 감탄의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런 젊은이를 본 적이 없는데.’

견문이 넓은 만큼 공 총관은 신통력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을 여럿 봤었다. 대부분은 수상쩍은 사기꾼이었지만 그 중에는 정말 그럴듯한 재주를 갖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오만하고 불손하며 신통력을 가지지 못한 남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공 총관은 그게 신통력을 타고난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었다.

수명이 짧은 만큼 오만하고 불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포쾌는 그들을 압도하는 재주를 보여주면서도 한 점의 오만함도 없었다. 오히려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 총관의 입장에서는 마치 도통(道通)한 신선 같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제 재주를 칭찬해주시는 건 감사한 일입니다만, 너무 거창한 칭찬은 질시를 살까 두렵습니다.”

“아,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포쾌의 말에 공 총관은 쓰게 웃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무림에서만 통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통하는 말이었다.

이 포쾌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노련한 공 총관은 바로 이해했다.

“자네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했군. 이거 미안하네. 이 일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감사합니다.”

“그래. 자네가 재주 있다고, 훔쳐간 은자를 찾아놨다는 이야기 정도만 주변에 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상대는 말이 잘 통했다. 연우혁은 상대의 배려에 감사해하며 몸 안을 점검했다.

다행히 진법의 냉기를 멋대로 조종했다고 내상 같은 건 입지 않았다.

하단전에 내공을 쌓아서 무공을 펼치는 건 심법의 이치를 깊게 이해하고, 온몸에 기를 쌓으며, 소주천으로 단전에 끌어 모은 한 줌의 내공을 전력을 다해 활용해야 하는데 상단전의 신통력은 왜 이리 쉽단 말인가?

‘신통력을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최대한 빨리 무공서를 찾아야한다.’

지금 연우혁에게 필요한 건 신통력을 더욱 갈고 닦는 게 아니라, 무공을 갈고 닦아 하단전을 단련하고 중단전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총관 나으리!”

“무슨 일이냐? 손님이 와있는데.”

하인이 급히 달려오자 공 총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갈세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

“......”

신통력을 굳이 발휘하지 않아도 연우혁은 일이 꼬였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   *

제갈규는 눈을 감고 공 총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피 튀기는 전장도 아닌데, 제갈규는 마치 앞에 상대가 있는 것마냥 적잖게 긴장하고 있었다.

공 총관이 숨겨진 무림의 고수여서도, 혹은 방가전장이 숨겨진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이어서도 아니었다.

제갈규 본인이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당주님.

-스스로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 너는 네가 저지른 잘못을 남에게 넘기는 무인이느냐? 아니면 스스로 수습하는 무인이느냐?

-당연히 후자입니다. 당주님.

-그 의기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겠다. 진법의 빙석을 찾아봐라. 냉기가 날뛴다면 빙석이 그 원인일 테니.

-하지만 당주님. 빙석은 분명 멀쩡...

-다음으로 뱉는 말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대 제갈세가의 무인으로서 하는 말로 평가할 테니까. 자. 말해봐라.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제갈세가는 무림의 명망 높은 오대세가 중 하나이자 인근에 따라올 자가 드문 권세를 자랑하는 호족집단이었으나, 그렇다고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 수는 없었다.

제갈세가의 무인이 설치한 진식(陣式)이 약속한 것과 다르다는 소문이 퍼져나간다면?

오대세가 중 진법으로는 으뜸간다는 명성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이런 명성은 한 번 더럽혀지면 다시 복구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방가전장은 멋대로 무시해도 될 만큼 작은 세력이 아니었다. 진법의 효과가 제대로 작동해서 망정이었지, 진법의 효과마저 작동하지 않았다면 일이 훨씬 커졌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제갈규는 본가의 장로에게 가르침을 듣자마자 서둘러 경장을 꾸려 출발했다. 오래 내버려뒀다가 진법이 예상치 못한 변화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총관께서 늦으시는군.”

“죄송합니다. 대협.”

하인 한 명이 바닥에 엎드릴 것처럼 자세를 낮추며 사죄의 말을 올렸다.

무림인의 성질이 얼마든지 난폭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인들의 표정에는 초조함이나 곤혹스러움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주인이 늦게 오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지?’

제갈규는 인근의 대상(大商)들의 회동에 참가했거나 혹은 고관대작한테 불려갔나 싶었다. 그런 이유라면 하인들이 저렇게 어쩔 수 없어하는 것도 말이 됐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실은 창고에 도둑이 들어서...”

“컥!”

제갈규는 하인들이 내온 찻잔에 담긴 찻물을 뱉어내며 기침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이 제갈규의 심장을 단단히 조였다.

“설마... 설마 진법에 문제가 있었는가?”

“죄송합니다. 대협. 어르신의 허락이 없다면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갈규의 눈썹이 노한 성미를 따라 위로 휘었다. 그러나 제갈규는 이런 상황에서 난동을 피울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만약 제갈규가 설치한 진법이 문제가 되어 도둑이 들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마침 총관이 뒤뜰에서 걸어 나왔다. 저번에 봤던 것처럼 매사에 빈틈없고 꼼꼼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는, 누가 봐도 타고난 상인 같은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그 옆에 있는 것은 조금 특이한 사내였다. 훤칠한 체격에, 어딘가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을 주는 인상. 가장 신기한 것은 눈빛이었다. 누군가를 노려보거나 위압하려고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꿰뚫는 듯한 안광이 일렁거렸다.

제갈규는 저런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떠올려보니 놀랍게도 그건 제갈세가를 이끄는 가주가 가문의 무인들 앞에서 보여주던 눈빛이었다.

어떤 불호령이나 꾸지람, 혹은 내공으로 인한 위압 없이도 제갈세가의 가주는 좌중에 앉은 무인들을 눈빛만으로 조용히 제압할 줄 알았다.

‘내가 미쳤나?’

제갈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웬 처음 보는 놈의 눈빛에 제갈세가 가주를 떠올리다니. 초조하고 심란해서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다시 훑어보니 놈은 어디선가 많이 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건 포쾌의 복장이었다.

‘아. 도둑이...’

그제야 제갈규는 포쾌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자 인근의 포두가 포쾌를 보낸 모양이었다.

아마 이런 사건을 해결하지는 못할 테지만, 포쾌라도 보내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건방지거나 주제를 모르는 포두로군. 직접 오지 않고 포쾌 한 명만 달랑 보내다니?’

제갈규는 의아해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갈세가의 명성이었다.

“도둑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협.”

공 총관과 제갈규는 부자(父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나이 차이가 났다. 총관은 나이가 지긋했고 제갈규는 아직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총관은 제갈규를 꼬박꼬박 대협이라고 부르며 공손하게 대했다. 제갈규는 이런 상인이 더 심지가 굳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진법이 기능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대협. 진법은 제대로 기능했습니다. 조금 춥긴 했습니다만...”

제갈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모양이었다.

“그럼 도둑은 그 자리에서 잡혔습니까?”

“아닙니다. 도둑은 은자를 훔쳐서 나갔지만, 여기 이 포쾌 덕분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연우혁은 영 불편했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설마 진법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진 않겠지.’

원래 무공의 수준이 낮은 무인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수준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정신을 집중하자 눈앞에 있는 제갈세가 무인의 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평일원이나 담풍호보다는 훨씬 떨어졌지만 오 포두와 얼추 비슷한, 그보다는 살짝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럼 이류쯤 되는 건가?’

오 포두는 포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갖고 있었고, 또 본인도 꾸준히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이었다. 포두가 이류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뻘 되는 무인을 뛰어넘는 실력을 벌써 가졌다는 점에서 과연 명문세가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 포두는 이류 중입, 이 사람은 이류 말입 정도인가.’

“도둑을 추격해서 잡은 겁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여기 포쾌는 도둑이 지나간 자리만 보고서 어느 놈이 훔쳐갔는지 알아맞혔습니다.”

공 총관은 노련한 상인답게,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각색하여 늘어놓았다.

물론 그것만 해도 제갈규에게는 믿기 힘든 허황된 말이었다. 듣는 동안 제갈규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고, 그 꿈틀거림은 영안으로 제갈규를 관찰하던 연우혁에게 그대로 정보로 변해 들어왔다.

‘믿지 않고 있군.’

사건 현장의 정보를 모으는 것처럼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정보를 모으는 것도 가능했다.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제갈규는 침착하게 총관의 말을 들었다. 믿지는 않았지만 총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생각이지? 나를 망신주려는 건가?’

진법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이고, 제갈규 본인이 진상을 확인하려고 할 수 있으니, 웬 이름 없는 포쾌를 데리고 와서 일을 해결했다고 갖다 붙이는 것일까?

하지만 제갈규는 이게 어떻게 제갈세가의 이름에 모욕이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진법은 제대로 작동했고, 도둑은 총관의 실수에 가깝지 않던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참. 대협. 진법의 문제는 찾아서 해결했습니다.”

“뭐라고요?!”

제갈규는 평정심을 잃고 고함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제갈규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놀라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빙석에 금이 가 있었습니다.”

“!!!”

“그리고 해결은...”

총관은 연우혁에게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저희 전장에 신세를 지신 분 중에 실력이 고명하신 도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께 부탁했습니다.”

‘무당? 화산인가? 이럴 수가...’

“제, 제가 다시 보게 해주십시오.”

“그건 좀...”

총관은 곤란해했다.

도사의 핑계를 댔는데 괜히 제갈규의 진입을 허락해주면, 그 도사의 체면을 무시하는 일이 되는 셈 아닌가.

그러나 연우혁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총관 어르신. 괜찮으시다면 한 번 허락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뛰어난 도사님이라지만, 제갈세가의 신기묘산한 지혜를 따라가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놓친 걸 찾아내주실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진법의 기운만을 날려버리기만 하고 빙석의 금이 간 건 해결하지 못한 만큼, 연우혁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또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제갈세가의 무인을 들여보내야 했다.

그러나 제갈규에게 이 포쾌의 발언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고명한 도사를 두고서도 제갈세가의 이름을 더 높게 평가하다니.

포쾌란 족속이 아첨에 능하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어도 이렇게 겪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제갈규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반드시 후사하겠다.’

‘뭐지? 이상할 정도로 감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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