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낭 제갈규 (3)
두 무인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고민하던 공 총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사님의 체면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갈규는 속으로 공 총관이 모셔 온 도사의 배분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배려해주는 건 감사한데 괜찮은 거 맞나?’
연우혁은 공 총관의 말에 등줄기에 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렇게 못을 박아놓지 않으면 이 제갈세가의 무인이 쓸데없는 고집을 세워서 도사의 신분을 캐묻거나 만나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제갈세가의 무인이 도사의 정체를 우연히 알게 될 경우를 생각하니 땀이 자연스레 솟아나왔다.
그럴 경우 땀방울만이 아니라 붉은 핏방울도 몸에서 새어나올 수 있었으니까.
공 총관이야 전장에서 보호해준다지만 연우혁은 그냥 찌르고 판관한테 은자를 바치면 넘어가줄 가능성이 높았다.
* * *
‘이럴 수가!’
제갈규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창고를 둘러보았다. 옆에 있는 포쾌의 속마음과 달리 제갈세가의 젊은 무인은 누가 도사인지 의심할 여유도 없었다.
정말로 냉기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빙석... 빙석은?’
제갈규는 허겁지겁 진법을 확인했다. 다행히, 세가의 장로가 해준 말이 틀리지 않았다. 빙석 중 하나에 아주 미세한 실금이 가있었다.
“그래도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 빙석에 금이 가있었던 게 원인이었습니다. 이 빙석을 바꾸면 앞으로 냉기가 쌓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공 총관은 어딘가 뚱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제갈규는 아차 싶었다. 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내가 이런 실수를...!’
방금 공 총관이 전장에서 나온 도사의 체면을 존중해달라고 했는데, 도사의 방법을 정면에서 부정한 셈이 됐다.
먼저 도사가 한 일은 쌓인 냉기를 몰아낸 일이고, 그건 대단한 일이 맞지만 이 진법은 제갈세가의 진법이라 아주 사소한 간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빙석에 실금이 가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대뜸 원인을 찾았다고 하면 상대의 체면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빙석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규는 부끄러움과 굴욕감을 참고 빙석을 바꿨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 여기서 화를 내면 세가의 명성에 누를 끼쳤다.
억울하더라도 마무리 짓고 나가야했다.
“훌륭하십니다. 대협!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원인을 찾아내시다니. 언제나 제갈세가의 명성을 흠모해왔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한 번 보게 되니 개안한 기분입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기 있는 포쾌가 아첨에 능하다는 것이었다.
평소 아첨이나 아부만 할 줄 아는 자를 경멸하는 제갈규였지만 오늘만큼은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까 들어갈 때도 도움이 되더니, 창고 안에서도 도움이 됐다.
제갈규는 연우혁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아랫사람으로서 기특한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 꼭 보답하겠다는 눈빛이었다.
“?”
그러나 연우혁 입장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서 아첨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감사하는 반응을 두 번이나 보이다니.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한한 놈이로군. 제갈세가의 무인이면 이 정도 아부는 많이 듣지 않나?’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전갈을 보내주십시오. 제갈세가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공 총관은 예의 바르게 제갈규를 배웅했다. 제갈규도 절도 있게 총관에게 인사했다. 둘은 생각은 다를지언정 겉으로는 완벽한 예의를 지켰다.
“이봐. 따라오게.”
“?!”
연우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제갈규가 자신을 부른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따라오면 알아. 오게.”
제갈규는 둔한 포쾌에게 눈치를 줬다.
보는 사람이 많은 대로에서 은 조각을 고맙다고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머무는 객잔에 가서 쥐어주면 포쾌도 눈치껏 이해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리라.
“...예.”
연우혁은 수많은 생각을 하며 제갈규의 뒤를 쫓았다. 머릿속으로 여기서 도망친다면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지, 혹은 제갈규가 어떤 공격을 해올 것인지 등등을 떠올리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안으로 훑어 본 제갈규의 모습이 매우 평온하고 적개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봤다고 확신할 수 있나?’
연우혁은 상대방의 무공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단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갈세가는 좌도방문의 수법에도 능하지 않은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둘은 객잔 근처에 도착했다. 연우혁은 생각보다 호화롭지 않은 객잔의 모습에 놀랐다. 허름한 객잔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대세가의 무인이 머물 객잔은 또 아니었다.
물론 무림인들이 심심찮게 풍찬노숙하는 자들이라지만 도시에서도 그럴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그게 제갈세가의 무인이라면 더더욱.
제갈규도 신경이 쓰였는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급하게 달려와서 다른 객잔은 방을 구하기 어렵더군.”
‘아하.’
“훌륭하십니다. 허례허식에 집착하지 않는 검소함이라니. 다른 세가는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갈규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이 포쾌는 정말로 아부가 뛰어났다. 아첨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세가의 일꾼으로 부르고 싶을 정도군.’
수입은 포쾌가 많아도 세가의 일꾼은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제갈규는 한 번 권해볼까 생각했다.
“도, 도련님!”
“?”
객잔 안에서 제갈규가 데리고 온 하인이 뛰쳐나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전... 전낭이 사라졌습니다!”
“...!!”
* * *
객잔은 ‘ㅁ’자 형태의 작은 2층 건물이었다. 네모로 배치된 건물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는 오래된 떡갈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2층에는 여행자들이 짐을 풀고 숙박하고 있었었다.
당연히 제갈규가 머무는 곳도 2층의 남는 방 중 하나였다.
하인이 제갈규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 차를 준비하려고 우물에 갔다 온 사이, 누군가 방 안의 전낭을 가져간 것이다.
“당장 불러와라!”
제갈규는 붉어진 얼굴로 객잔주인에게 명령했다. 상대가 제갈세가의 무인이라는 걸 알아챈 객잔주인이 허겁지겁 뚱뚱한 몸을 놀리며 손님들을 불러왔다.
쉬고 있던 사람들은 짜증이나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내려왔다. 그걸 본 제갈규가 물었다.
“사라진 자는?”
“없, 없습니다.”
“다행이군. 1층에 다른 손님은?”
“없었습니다.”
하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1층에서는 점소이가 혼자 졸고 있었을 뿐이었다.
제갈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제갈규가 빨리 돌아온 덕분에 도둑놈이 미처 도망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2층에서 머물던 사람들 중 한 놈이 전낭을 훔쳐간 게 분명했다.
“나는 제갈규다. 여기 있는 누군가가 내가 없는 사이를 틈타 전낭을 훔쳐갔다. 너희의 짐을 확인하려 하는데, 거부할 자가 있으면 나와라.”
검을 찬 무인이, 그것도 제갈세가의 위세를 앞세우며 저렇게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거절하는 순간 사생결단을 하자는 뜻이 되었으니까.
손님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거절하진 못했다.
“샅샅이 뒤져라.”
“예!”
하인은 제갈규의 명령을 받고 손님들의 짐을 뒤지고 방 안을 뒤졌다.
그러나 전낭은 나오지 않았다.
“......”
예상이 빗나간 제갈규의 얼굴이 흐려졌다. 멍청한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훔쳐간 전낭을 숨길 정도의 기지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대협. 저희 중에 훔쳐간 도둑이 있다는 법이 꼭 어디 있습니까? 신투라면 벽을 타고 훌쩍 날아와서 훔쳐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재주를 가진 신투가 할 일이 없어서 이런 객잔을 털겠느냐?”
제갈규는 날카롭게 반론했다. 연우혁은 이 제갈세가의 무인이 대다수의 포쾌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신투가 뭐하러 이런 객잔을 털겠는가. 아마 같은 객잔에 묵는 무인이 제갈규의 옷차림을 보고 탐심을 낸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빨리 캐물어 봐줬으면 좋겠는데.’
연우혁이 해결한 객잔 안 절도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이 중 무엇인지 경우를 좁히려면 수상쩍은 손님들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야 했다.
영안을 써서 훑어봐도 되겠지만, 이제 연우혁도 마구잡이로 능력을 쓰지 않았다. 무림인이 내공을 낭비하지 않듯이 신통력도 마찬가지였다.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익혀야 했다.
“한 명씩 신분을 밝히도록.”
제갈규의 으름장에 손님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자기가 뭐하는 사람인지 털어놓았다.
키가 작고 눈매가 가는 남자는 행상인이었다. 봇짐 안에는 우모붓과 황모붓, 먹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필묵을 갖다 파는 사람이었다.
보통 키에 근육이 있는 남자는 야장이었다. 친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 짐 안에는 끌이나 정 같은 도구가 있었다.
마지막 숙객(宿客)은 기녀였다. 짐 안에는 옷가지 한 벌과 화전(花鈿, 화장품의 일종)에 쓰는 가루가 전부였다.
설명을 들은 제갈규는 바로 기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객잔에 머물고 있는 거냐?”
“대협. 그저 객잔에 머문다고 해서 소녀(小女)를 이렇게 핍박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무슨 이유인지 밝히면 그만일 뿐. 나를 우롱할 셈이냐?”
“정인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기녀는 제갈규의 기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고백에 제갈규가 움찔했다.
“정인이라고? 어느 자가...”
“대협.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어떻게 정인의 이름을 팔 수 있겠나이까? 설령 그렇게 해서 정인의 이름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리하면 정인께서 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
제갈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지금 이 기녀는 ‘정인의 신분을 듣고서 후회하지 않겠느냐’라고 되레 협박하고 있었다. 허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도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다른 손님이나 객잔주인은 감탄한 눈빛으로 기녀를 쳐다보았다. 기녀가 보여준 신의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대협. 저는 의심가는 분이 한 분 있사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저 분입니다.”
기녀는 웃으며 하인을 가리켰다. 하인의 낯빛이 납색으로 변했다.
“모두의 짐을 뒤지고 방을 찾았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면 저 분을 의심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닥쳐라!”
제갈규는 흔들리지 않고 기녀를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제갈규를 모셔 온 하인이었다. 저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손님이나 객잔주인은 설득된 모양이었다.
“대협. 혹시 모르니...”
“차라리 포두를 부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제갈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옆에서 가만히 서있는 포쾌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이 혼란하게 흘러가는데도 포쾌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골똘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 거냐? 혹시 의심가는 자가 없느냐?”
“아. 죄송합니다.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저 야장이 은자를 어디에 숨겼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보십시오. 야장이라면 손톱에 철녹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 자의 손톱은 깨끗하지 않습니까. 저건 다른 일로 굳은 살이 배긴 자입니다.”
손님을 듣고 범인을 바로 깨달은 연우혁은 가짜 야장의 수상쩍은 점을 뽑아서 던졌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가짜 야장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