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11)화 (11/107)

지낭 제갈규 (4)

‘손톱이!’

제갈규는 야장의 손톱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오랫동안 시뻘건 화로 앞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쇠를 만지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흔적이 영구적으로 남고, 그 중 하나가 손톱의 색이 변한다는 것이라는 건 제갈규도 이미 알고 있었었다.

그러나 야장의 손톱을 확인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손톱의 색을 어느 누가 확인한단 말인가. 그저 몸이 단단하고 근육이 있으니, 그리고 야장이 쓸 법한 도구를 갖고 있으니 야장이라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제갈규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세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자가 이런 것 하나 발견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옆에 있는 포쾌한테 감탄했다. 이걸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리다니.

‘설마 공 총관이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나?’

제갈규는 총관이 대체 왜 그렇게 저 젊은 포쾌의 칭찬을 늘어놓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칭찬에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면?

정말 저 포쾌가 명석한 판단으로 도둑을 붙잡은 거라면?

그렇다면 총관의 칭찬도 말이 됐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은 포쾌가 도둑을 붙잡았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부끄러워졌다. 아랫사람들을 부리고 명령을 내려야 하는 제갈규였다. 그런 만큼 아랫사람이 가진 재주를 보는 눈이 필요했는데, 눈앞에서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정작 한 번에 도둑을 알아맞힌 포쾌는 여상한 표정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반응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그, 그러게! 대협! 저놈의 손톱이 깨끗합니다!”

“어머... 참으로 놀라운 일이나이다. 대협.”

“아,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제 손톱은 원래 특이해서 철녹이 들지 않았습니다. 제 짐을 확인해보셨잖습니까!”

야장은 당황해서 변명했다. 그제야 생각에 잠겨 있던 연우혁이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떠올랐습니다. 저 야장을 도와준 건 점소이입니다. 야장도 방 안에 있었던 만큼 하인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볼 수 없는 상황이지요. 점소이가 1층에서 신호를 보냈을 겁니다.”

야장과 달리 점소이는 얼굴을 관리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려움과 긴장으로 점소이는 꺽꺽 소리를 냈다.

연우혁은 머릿속에서 해결한 사건 중 어떤 사건이었고 또 그 사건의 내막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느라 조금 시간이 걸린 거였지만, 주변 사람들 눈에는 저 포쾌가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일의 내막을 유추해낸 것처럼 보였다. 행상인은 숫제 두려운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점소이의 방을 잘 뒤져보십시오. 전낭이 나올 겁니다.”

“점소이의 방을? 창밖으로 던져서 다른 놈에게 주워가게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닙니다. 대협. 저 둘은 한두번 도둑질을 한 게 아닌 자들. 밖으로 던졌다가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목격한다면 대번에 들킬 수 있습니다. 저들은 객잔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던졌을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말입니다.”

연우혁은 ‘ㅁ’자 구조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무를 가리켰다. 2층에서 1층으로 던지면 받기 쉬웠다. 게다가 손님도 없는 한적한 상황 아닌가. 아마 저 둘은 그것도 노렸을 것이다.

“큭!”

점소이가 의자를 옆으로 밀치고 달려 나갔다. 몸은 제법 날랬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였다. 제갈규는 바로 보법을 펼쳐 객잔의 문 앞을 막고 점소이를 제압했다.

“움직이면 베겠다!”

그러는 사이 야장도 움직였다. 야장은 한 손에는 끌, 다른 손에는 정을 들더니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연우혁은 급히 영안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무공을 익힌 자였다.

경지는 연우혁과 같은 삼류였지만, 삼류도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나름 심법으로 내공을 쌓고 초식을 펼칠 줄 알아야 인정받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삼류는 무공을 익히는 무림인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경지였다. 이것도 안 되는 흑도의 무뢰배나 왈패들이 수두룩했다.

연우혁은 속으로 후회했다.

‘범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바로 확인부터 할 걸 그랬군.’

옆에 제갈규가 있어서 괜찮겠지 싶었는데, 설마 상대가 그냥 도둑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도둑일 줄이야.

연우혁은 삼류에 갓 들어선, 굳이 따지자면 삼류 초입.

상대는 무공의 경지는 똑같은 삼류였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지 움직임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삼류 중입과 말입 사이의 경지였다.

하지만 연우혁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상단전으로 사용하는 신통력이었다.

‘움직임을 본다!’

“죽어라, 포쾌새끼야!”

야장은 눈앞을 막는 연우혁을 죽이고 창문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끌과 정이 위협적으로 휘둘러졌다.

무림의 병기는 길어지면 강해지고 짧아지면 위험해지는 법.

연우혁이 무림 경험은 적었지만 저런 부류의 기문병기에 잘못 당하면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회복 불가능한 상처가 남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았다.

‘다행히 독 같은 건 없다.’

달려드는 야장을 피해 연우혁은 뒤로 보법을 밟았다. 위국보법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보법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야장은 당연히 전진하면서 연우혁의 공간을 뺏으려고 들었다. 앞으로 전진하는 기세를, 뒤로 물러서는 보법이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그 때 야장의 앞을 탁자가 막았다. 연우혁이 탁자가 있는 쪽으로 유도한 탓이었다. 야장은 분노해서 탁자를 걷어찼다. 객잔주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틈을 타 연우혁은 조금 더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연우혁은 이번에는 의자를 끌어왔다. 걷어찬 탁자가 가볍게 막히고 다시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됐다.

야장은 짧은 사이에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저 젊은 포쾌 놈이 혓바닥을 놀려 일을 망친 것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무슨 운이 어찌나 좋은지 물러나는 곳마다 집물들이 늘어져서 길을 막아댔다.

‘통한다!’

연우혁은 안도했다.

영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완전히 꿰뚫어보면 어느 방향으로 투로를 뻗칠지도 예상이 가능해졌다. 그 예상을 바탕으로 의자나 탁자를 다급히 끌어왔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매우 좋았다.

‘아직 두통은 없다. 더 쓸 수 있겠군.’

연우혁은 심호흡을 하며 집중했다. 심안을 사용하는 요령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너무 집중해서 쓰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요 운만 믿는 개새끼가!”

‘허점!’

탁자를 밀어낸 야장의 자세가 노골적으로 무너졌다. 초식을 펼칠 때 나오는 내공의 흐름이 끊기고, 몸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렸다.

만약 상대가 훨씬 더 고수였다면 의도된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했겠지만 상대의 경지는 연우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우혁은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 결심했다.

‘일격에 제압하는 게 가장 좋다!’

물론 연우혁은 저번처럼 상단전의 내공을 끌어다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이 하단전에 쌓은 얼마 안 되는 내공만을 최대한 끌어다 쓸 생각이었다.

그래도 상대의 급소에 맞으면 제압은 충분하리라.

‘최대한...!’

연우혁이 갑자기 달려들자 야장은 당황해서 끌을 휘둘렀다. 포쾌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서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포쾌의 주먹이 번개처럼 뻗어져 나왔다.

“컥!”

야장은 가슴팍을 두드리는 강한 타격에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지만 야장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야장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늦게 달려 온 제갈규는 놀라워하는 눈으로 포쾌를 쳐다보았다.

“무공을 익힌 거냐?! 어떤 무공이지?!”

“위국권법을 익혔습니다.”

“아.”

그제야 포쾌들한테 주어지는 허섭스레기 무공이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린 제갈규는 민망해했다.

“...그래도 자질이 뛰어나군. 경지가 같아 보이는데, 이렇게 단숨에 제압하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무림에서는 운도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초식이었지?”

“진충보국입니다.”

말도 안 되는 초식 이름에 제갈규는 물어본 걸 후회했다.

*   *   *

객잔주인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사죄했다. 점소이가 손님의 물건을 훔쳐갔으니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객잔주인을 도와줬다.

“이 점소이는 보통 교활한 게 아니라 눈치 채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고맙구려, 포쾌!’

객잔주인은 바닥에 엎드린 채 생각했다.

평소 포두와 포쾌 놈들은 돈 뜯어가는 도적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되니 돈을 바친 보람이 느껴졌다.

물론 저 포쾌한테 돈을 바친 적은 없었지만...

제갈규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전낭도 도로 찾았고. 이번은 넘어가도록 하지.”

“대협께서는 실로 협의지사십니다! 제 자식의 자식에게도 대협의 은혜를 말하겠습니다!”

제갈규는 무시하고 하인이 갖고 온 전낭에서 은자를 꺼냈다. 원래 쪼개서 조각을 줄 일이었지만, 오늘 전낭을 찾아준 솜씨를 보자 제갈규는 은자를 쪼갤 생각이 사라졌다.

“받게.”

“이, 이건...”

포쾌가 당황하자 제갈규는 왠지 모를 쾌감이 들었다. 아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침착해하던, 통달한 도사 같은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아무 이유 없이 보상을 후하게 주진 않네. 자네는 받을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대협.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갈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연우혁은 객잔주인에게 도구를 빌려 은자를 아주 얇게 잘라냈다.

“이거 받으십시오. 탁자와 의자를 부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아니! 이건...”

객잔주인은 연우혁보다 더 당황했다.

살면서 은 조각을 주는 포쾌는 만나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손님들도 다 나갔는데 받으십시오.”

“이런 은혜를...”

객잔주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런 포쾌를 보니 평소 속으로 포쾌들을 싸잡아 욕한 게 부끄러웠다.

“자네 뭐하나?”

“탁자와 의자를 부순 것에 대한 사죄로 은자를 조금 나눠드렸습니다.”

“허.”

제갈규는 포쾌의 말에 살짝 멍해졌다.

저런 부분은 생각치도 못했을 뿐더러,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포쾌가 저런 걸 배려해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은자는 다시 포쾌한테 돌려줘라. 내가 지불할 테니.”

제갈규는 은자를 쪼개서 내밀었다.

원래라면 점소이도 관리 못해서 전낭을 도둑맞게 한 객잔주인에게 불쾌해야 했지만, 막상 객잔주인의 얼굴을 보자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은자를 베푸는 것만으로도 유쾌할 수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규 아우 있나?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

한동안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던 객잔 입구에 낯선 방문객이 나타났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무공. 그리고 제갈규를 편하게 부르는 사이. 연우혁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오대세가 무인이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