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 팽주성 (1)
물론 그것만으로 연우혁이 상대를 판단한 건 아니었다.
등에 찬 커다란 도(刀)와 제갈규보다 머리 하나는 큰 근골. 심후한 내공보다는 단련된 외공이 먼저 느껴지는 외양.
‘오대세가 중 하북팽가 아닌가?’
“팽 형 오셨습니까?”
추측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죄 없는 객잔의 손님들을 깨워서 윽박지르던 제갈규였지만 하북팽가의 팽주성 앞에서는 꽤나 예절을 따졌다. 팽주성은 객잔 안을 둘러보더니 수염 난 뺨을 긁적였다.
“신기하군! 규 아우가 이런 곳에서 머무를 줄은 몰랐는데. 나야 이런 곳에서도 발 뻗고 잘 수 있다지만...”
“일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그리고 원래 이 정도로 어지럽혀진 객잔은 아니었습니다.”
제갈규는 난장판이 된 1층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다급히 변명했다. 객잔주인은 눈치를 보더니 슬쩍 부서진 잔해를 치웠다. 연우혁은 객잔주인의 일을 도왔다. 객잔주인은 아직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제 이런 곳에서도 잘 수 있다면 규 아우에게도 좋은 일이지. 잘 수 있는 객잔이 많은 게 좋지, 적은 게 좋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팽주성도 무림인인 만큼 객잔 안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갈규 같은 오대세가의 무인이 있는데도 소란을 피울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실은 그게 말입니다.”
제갈규는 살짝 민망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교묘한 두 도둑놈이 객잔에 들어온 손님의 전낭을 훔치는 수법을 들은 팽주성은 깜짝 놀랐다.
“그럼 객잔주인이 시킨 건가? 아니, 왜 저렇게 내버려둔 건가?”
부서진 나뭇조각을 싸리비로 쓸어내던 객잔주인은 깜짝 놀라서 떨었다.
“그게 아닙니다. 팽 형. 그러니까 도둑 놈은 야장하고 점소이였다는 겁니다. 점소이가 위에 신호를 보내고, 도둑 놈이 훔친 거죠.”
“으음. 모르겠군.”
팽주성은 다시 한 번 수염 난 뺨을 긁적였다. 그걸 본 제갈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북팽가 출신으로 도(刀)의 재능이 뛰어난 팽주성은 호탕하고 의협심 강한 성격으로 벗들이 많은 무인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건 아니지만 제갈규는 가풍 때문에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싫어하는 기색을 잘 숨기지 못했다.
때문에 무림에 벗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벗 중 하나가 이 팽주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팽주성에게도 단점이 있었으니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는 영 둔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팽 형에게는 나 같은 벗이 있으니 상관없다.’
제갈규는 그런 단점이 팽주성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본인 같은 벗이 옆에서 도와주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묻는 호탕함이야말로 팽주성의 장점이었다.
“하여간 도둑놈들은 다 잡았습니다. 이 연 포쾌 덕분입니다.”
“그래. 포쾌가 대단하단 거 아닌가.”
대충 긴 대화의 앞과 뒤만 들은 팽주성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런데 팽 형께서는 여기는 무슨 일로?”
“으핫핫! 규 아우. 전낭을 누가 가져갈 뻔해서 아직 얼이 빠져 있나보군. 내가 여기 왜 있겠나?”
“그게... 아. 설마 백면신투 때문입니까??”
“그래.”
“그런 허황된 소문 때문에 오시다니.”
“나만 온 게 아니야. 다른 친우들도 같이 왔다네. 참. 당령 소저도 왔고.”
잔해를 치우며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우혁은 제갈규의 표정이 변화하는 걸 보고 속으로 씩 웃었다.
제갈규가 당가의 소저한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영안이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백면신투는 오년 전에 한창 무림을 시끄럽게 했던 도둑일세.”
묻지도 않았는데 제갈규는 연우혁에게 설명을 했다. 그 어조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존중이 담겨 있었다.
무림에는 주기적으로 도둑들이 생겨났다. 당장 제갈규의 전낭을 노린 도둑만 봐도 생각보다 도둑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 대부분은 붙잡혀서 손목이 잘리거나 목이 잘리거나 둘 중 하나를 맞이하게 됐다. 가끔 둘 다 같이 맞이하는 도둑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극복하고 악명을 쌓으면 그 도둑은 나름 투(偸)가 들어가는 별호를 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백면신투는 그런 영광스러운 도둑놈 중 하나였다. 만약 오년 전에 남궁세가의 담벼락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좀 더 영광스러운 도둑놈이 되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처참하게 죽은 도둑과 관련된 소문 따위는 오년 정도면 사라져야 했지만, 근 반년 사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백면신투가 생전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무공을 베껴갖고 나왔다더라.
-백면신투가 그 무공의 비급을 어딘가에 숨겨놨다더라.
연우혁이 받은 어정쩡한 무공도 원칙적으로는 외부에 유출하면 안 되는 무공이었는데, 명문정파의 무공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 번 밖으로 유출되었다가는 인근에 말 그대로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아무리 정파라 하더라도 문파의 무공이 걸린다면 목격자를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소문은 무림인들을 자극했다.
비(非) 명문정파 출신 무림인들은 혹시라도 모를 비급서에 대한 탐욕으로.
명문정파 출신 무림인들은 혹시라도 모를 비급서를 회수하고 사문의 인정, 다른 문파의 감사를 받을 목적으로.
물론 제갈규는 심드렁했다.
“팽 형. 몇 번이고 말했잖습니까. 그 소문은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됩니다. 백면신투는 죽었고, 설령 백면신투의 부하나 제자가 있다 하더라도 무엇하러 그런 소문을 내겠습니까. 아마 어느 호사가나 괴팍한 놈이 헛소문을 낸 겁니다. 세간에는 남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보면서 웃으려는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음. 저 사람은 친구가 적을 거 같군.’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갈규의 말은 얼핏 보면 논리적이었지만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팽주성이 나름 먼 길을, 그것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달려왔는데 거기다가 ‘그거 헛짓거리요’라고 말하는 게 좋게 들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중책(中策)은 ‘힘내십시오 팽 형은 꼭 찾으실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거였고 상책은 ‘저도 같이 가서 도와드리겠습니다’였다.
연우혁은 제갈규가 참 친구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으핫핫! 맞네. 맞아. 말이 안 되지.”
그러나 팽주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박장대소했다.
“나도 들으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나. 그리고 다른 벗들이 오고 싶어 하는데 또 말릴 수는 없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팽주성은 제갈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여기 규 아우가 있으니 설령 헛소문이라 하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때. 나를 도와주겠나?”
“알겠습니다. 팽 형께서 그렇게 말하시니.”
‘저 사람은 친구가 많을 것 같군.’
“그리고 저 포쾌도 도와달라고 하면 어떤가?”
“?!”
팽주성이 갑자기 부르자 연우혁은 기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름이었던 것이다.
“연 포쾌 말입니까?”
“그래. 규 아우 말을 들으니 아주 똑똑한 거 같던데.”
“똑똑한 수준이 아닙니다. 팽 형은 신통력에 대해 좀 아십니까? 옛날에 고서에서...”
“아. 아. 그건 모르겠고.”
팽주성은 제갈규를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서책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여간 재주가 좋은 거 아닌가?”
“으음. 맞습니다. 데려가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규 아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가보군. 꼭 데리고 가세.”
졸지에 갑자기 동행하게 되자 연우혁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물론 연우혁의 상황을 보면 무림인과 친분을 맺긴 해야 했다.
계속해서 무공을 수련하고 높은 경지를 엿봐야 하는데 이건 무림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의 원래 구상은 좀 더 차근차근 준비해서 접근하는 것에 가까웠다.
포쾌로 공을 세워서 포두의 자리를 받은 다음, 잔뜩 뇌물을 바쳐서 판관이나 추관 같은 제대로 된 관직을 따내고, 관직을 앞세워 무림인들과 만나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이라니.
심지어 평화로운 만남도 아닌 탐욕에 눈이 벌게진 무림인들이 우글거리는 자리 아닌가!
“제, 제안해주신 건 영광스럽습니다만 저는 포쾌로서 맡아야 할 직무가 있습니다.”
“잠깐 빠지면 안 되나?”
“안 됩니다! 제 직위가 낮다지만 엄연히 나랏일을 하고 녹봉을 받아가는 사람입니다. 감히 어떻게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어... 포쾌가 말인가?”
팽주성은 당황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통 포두나 포쾌들은 쇄은 하나만 줘도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팽주성을 칙사 대접하던 자들 아닌가?
“맞습니다. 대협! 이 연 포쾌는 한경에서 보기 드문 명포쾌이자 진정한 충신입니다! 관리들에 이런 사람만 있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을 겁니다!”
“......”
객잔주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 떨면서 나서자 연우혁은 더 당황했다.
고맙긴 했는데 좀 과한 것 같았다.
“팽 형. 여기 주인의 말이 맞습니다. 이 연 포쾌는 뇌물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기 사재를 털어서 불쌍한 상인들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건...”
연우혁은 제갈규의 말을 말리려고 했다.
무언가 와전이 있었던 것이다.
객잔 기물을 부순 걸 물어주는 일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이걸 사재를 털어서 도와줬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연우혁이 백성밖에 모르는 청백리 같지 않은가.
기회를 봐서 적당히 은자를 모아야 하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사양하고 싶은 착각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그런 포쾌가 있었다니. 세가에 있었을 때 수십 명이 넘는 포쾌를 봤었지만, 그 중 연 포쾌 같은 포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연우혁은 지적하는 대신 빠르게 이 자리를 빠져나온 다음 한동안 무림인들을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제갈세가의 이름을 너무 우습게보고 있었다.
“그러니 팽 형. 포두한테 직접 가서 말하고, 연 포쾌의 재주를 빌리도록 합시다. 소문이 돈 마을이라면 한경에서 그리 멀지 않을 텐데 그 마을의 혈사를 막는 것도 마땅히 포쾌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규 아우. 아우는 정말 내 지낭일세!”
“과찬이십니다. 팽 형.”
‘무림인들 진짜 개짜증나는군.’
* * *
포쾌들은 연우혁을 데려가도 좋다고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포쾌들이 무림인의 옷자락만 보고서 모두 숨어버린 탓에 오 포두가 수락했지만, 어쨌든 수락은 수락이었다. 오 포두는 매우 감탄하며 연 포쾌를 쳐다보았다.
-낭중지추라더니. 옛말에 틀린 말이 없군 그래!
-신부작족(信斧斫足)이란 말도 있긴 합니다만...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문이 돌고 있는 팔강촌 근처에는 벌써 무림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갈규는 포쾌에게 매우 깊은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무언가 수상쩍은 무림인이 보이면 바로 말하게.”
“저기 걸어오는 무림인은 방금 사람 셋을 죽였습니다.”
“뭐라!? 잠깐, 혹시 정파의 무인을 죽였나? 혹은 양민들을?”
“아닙니다. 낭인 셋을 죽였습니다.”
“다행이군. 저건 수상쩍은 무림인이 아닐세. 다른 수상쩍은 무림인을 보면 말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