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13)화 (13/107)

인싸 팽주성 (2)

제갈규는 연우혁의 말에 평정을 되찾았다.

원래 정파 출신이 아닌 무림인들이 열 명 이상 모이면 시체가 최소 한 구는 나오는 법이었다.

지금 팔강촌처럼 욕심에 눈이 먼 무림인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면 칼부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무림인이 누구에게 칼을 휘두르냐였다.

정파의 무인이면 모를까 낭인들끼리 싸움 붙은 것까지 일일이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건 판관이나 현령이 할 일이었지 제갈규가 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무림인들이 제갈규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팽주성이 깜짝 놀라 외쳤다.

“잠깐, 잠깐. 규 아우! 그게 무슨 소린가?”

‘역시.’

연우혁은 팽주성의 반응에 안도했다. 딱 봐도 친구 없을 것 같은 제갈규와 달리 팽주성은 벗들이 많은 협객답게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낭인 셋을 죽인 걸 알아낸 건가?”

“......”

연우혁이 정파무림의 미래에 대해 고뇌하는 동안 제갈규가 대신 대답했다.

“팽 형. 여기 있는 연 포쾌는 평범한 포쾌와 다릅니다. 상대의 옷차림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낭인 셋을 죽인 걸 알아낸 건가?”

“...그 답은 연 포쾌가 할 겁니다. 연 포쾌?”

제갈규는 팽주성의 질문에 자신도 답을 모른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다행히 팽주성은 제갈규가 모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연우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연우혁이 설명을 위해 대답했다.

“저기 무림인은 왼손잡이입니다.”

“어째서?”

“왼쪽 어깨가 내려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 그래.”

“그런데 저 무림인의 왼쪽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습니다.”

제갈규는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은 이해를 못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오른손잡이나 그렇게 차고 다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그래.”

“게다가 걸음걸이가 어색하고 자꾸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는 게, 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권사(拳士)일 겁니다.”

팽주성은 감탄했다. 실로 이 포쾌에게는 신통력이 있었다.

“그걸로 낭인 세 명이 죽은 걸 알아낸 거군!”

“팽 형. 한 명만 나왔습니다.”

“아. 그렇군 그래.”

“저 자의 발목을 보면 검녹색 피가 엉겨 붙어 있습니다. 독이 묻은 암기에 맞았다는 건데, 멀쩡히 걸어 나온다는 건 해독제를 먹었다는 겁니다. 저런 낭인이 이 상황에서 해독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상대를 죽이고 뺏은 거로군.”

독을 쓰는 무림인들은 언제나 그 독에 중독됐을 때를 대비해 해독제를 가지고 다녔다. 팽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하나는?”

“주먹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방금 죽인 두 낭인의 피일수도 있지 않나?”

“허리춤에 찬 검이나 발목에 난 상처 모두 시간이 좀 됐습니다. 검의 검올(劍兀, 검의 검신과 손잡이를 연결하는 부분)이나 상처에 묻은 피는 모두 말라붙었지만 주먹의 피는 아직 뚝뚝 떨어지니 한 명을 더 쓰러뜨린 게 분명합니다.”

팽주성의 눈동자가 부릅떠지고 두 뺨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만큼 감탄한 것이었다.

“규 아우! 아우가 왜 그리 극찬을 했는지 알 것 같네. 이 포쾌는 앉아서 천 리를 보겠군그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연우혁의 말은 진심이었다.

상대방의 정보를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읽어내는 영안과, 해결한 적 있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조합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뭐하는 놈인지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던 것이다.

당장 걸어오는 상대도 기억에 있었다.

이건 원래라면 무림인의 시체 네 구가 쓰러져있고 이 네 구가 왜 생긴 건지 맞혀야 하는 사건이었다. 어쩌다보니 우연히 죽었어야 할 무림인이 운 좋게 살아나서 걸어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크헉...”

팽주성이 감탄해서 탄성을 내뱉는 사이 걸어오던 무림인이 옆으로 쓰러졌다.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넘어진 무림인은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 수풀에 처박혔다.

팽주성과 일행이 내려가서 보니 그 주변에는 난잡한 싸움의 흔적과 시체 네 구가 놓여 있었다. 굴러 떨어진 무림인은 숨통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

“실로 안타깝군 그래. 관신여말(觀身如沫), 환법야마(幻法野馬). 단마화부(斷魔華敷), 불도사생(不覩死生).”

팽주성은 합장하며 불경의 구절을 외웠다. 그리고 시체들을 잘 눕혀 양지 바른 곳에 안치했다.

‘잠깐. 네 구의 시체면 그게 있지 않나?’

연우혁은 시체 중 독이 묻은 암기를 썼다가 목이 베인 시체를 찾았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 시체에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시체의 바지춤 속을 뒤지자 다른 무인들이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연우혁은 재빨리 찾던 것을 꺼냈다.

“보십시오.”

“이게 뭔가?”

“장보도입니다. 아마 이 인근 무림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림인들은 단순히 소문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문은 쉽게 무성해지지만 또 쉽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장보도는 욕망에 눈이 먼 무림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해주었다. 설령 헛소문이라 하더라도 장보도를 확인하지 않고 넘길 수 있는 무림인은 많지 않았다.

‘따라온 이상 공은 세워야지.’

이렇게 끌려왔으니 공이라도 세워서 돌아갈 때 뭐라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손해보는 장사였다.

“팽 형. 보십시오. 가짜 장보도까지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한 짓이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장보도일 수도 있지 않나? 가짜라 하더라도 누군가 이득을 보려고 가짜를 만들어 판 걸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자. 자.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다른 친우들과 합류하세나.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림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연우혁은 시체에서 잔돈푼을 챙기고 암기와 비도를 챙겼다. 가난한 포쾌는 무기를 살 돈도 마땅치 않으니 이럴 때 챙겨놔야 했다.

*   *   *

지금 팔강촌 주변에는 평소 보이던 행상인이나 떠돌이들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이 재빠른 사람은 무림인들이 보였을 때부터 멀리 도망쳤고,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기 힘든 사람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팔강촌 안에서 무슨 살벌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모인 무림인들 중 믿을 구석이 있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마을 안에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잃을 것 없는 낭인들이나 떠돌이 무림인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하며 서로 치고받았지만, 마을 안에서는 암묵적인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름이 조금 되는 무림인들끼리 부딪쳐서 좋을 게 없는 만큼 서로 싸움을 일으키지 말자는 규칙이었다.

팽주성이 데리고 온 친우들은 마을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촌장이 직접 쑤어 온 죽을 먹던 무림인들은 팽주성과 제갈규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팽 형. 이제야 오셨습니까.”

“팽 형!”

“아니, 저건 제갈규 아닌가? 저 자는 왜?”

“쉿. 조용히 하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갈세가의 지혜는 꼭 필요한 것 아닌가. 팽 대협도 그걸 알고 데리고 온 거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팽주성만 보고 반가운 얼굴로 일어난 것에 가까웠다.

반갑게 환대하던 무림인들은 연우혁을 보고 의아해했다.

“포쾌? 포쾌가 이런 자리에는 왜 온 거냐?”

“설마 주제 넘게 무림인을 추포해가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

무림인들 중 몇은 노한 기색을 얼굴에 드러냈다.

사람들이 많은 저잣거리라면 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가진 무림인이라도 포쾌를 베기에는 눈치가 보였겠지만, 여기는 보는 눈이 별로 없는 외진 곳이었다. 건방진 포쾌 하나 정도는 베어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림인들에게 포두나 포쾌는 탐욕스럽게 은자를 밝히면서 정작 눈이 마주치면 고개도 들지 못하는 쥐새끼들이었다. 호의를 보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다들 내 말을 들어보게. 이 포쾌는 정말이지 경국지재(經國之才)를 가지고 있네.”

“아닙니다. 팽 대협.”

팽주성이 지나치게 칭찬하려고 하자 연우혁은 대화를 끊기 위해 나섰다.

포쾌를 좋아하지 않는 무림인들 앞에서 그런 칭찬은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마뜩찮게 보는 자들이 있었다. 팽주성을 따르는 무인 중 하나인 염일림은 분노해서 외쳤다.

“이 자식. 한낱 포쾌가 어디 감히 팽 형의 말을 끊는 것이냐!”

“염 아우! 그게 무슨 말인가. 당장 사과하게! 녹봉을 받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아,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염일림이 원한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자 연우혁은 팽주성을 말리려고 했다. 사과를 받아봤자 딱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원수만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팽주성은 엄격한 얼굴로 염일림에게 사과를 시켰다.

‘가시방석 같군.’

연우혁은 싸늘해진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팽주성의 친우거나 팽주성의 부하에 가까워보였다. 물론 팽주성은 후자도 친우라고 하겠지만, 그건 본인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컸다.

‘오대세가 출신들은 몰라도 다른 가문 출신들은 맞먹기 쉽지 않을 테니.’

당장 염일림 같은 무인만 봐도 부하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팽주성이 아무리 호인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모여 있지는 않았다. 하북팽가라는 이름과 그 가문에서 나올 떡고물들을 기대하는 건 사람인 이상 당연했다.

‘저들은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고, 그럼...’

연우혁은 팽주성의 부하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진짜 친우들을 둘러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칼에, 어딘가 애교스럽게 보이면서도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소매 끝으로 드러나는 단련된 손가락을 가진 여자.

‘사천당가겠군. 제갈규의 표정을 보니 저 사람이 당령 소저고.’

오대세가 출신의 귀한 핏줄들을 구분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본인의 겉모습도 그렇지만 오대세가 출신이 아닌 무림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잡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팽주성과 맞먹거나 그보다 조금 더 큰 키. 그리고 외공에서 더 단련되었다는 게 느껴지는 근육질의 겉모습. 여자는 당장이라도 옆 마루에 놓인 대도(大刀)를 들고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아보였지만 눈을 감고 명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북팽가? 팽주성의 가족인가?’

“내 동생일세. 앗. 이미 알아챈 건가?”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하. 겸손은. 자. 들어보게. 이 포쾌는 왜 데리고 왔냐면...”

팽주성은 마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 포쾌가 어떤 포쾌인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제갈규가 한 설명과 자신이 직접 본 걸 섞은 다음 허풍을 삼 할 정도 섞은 설명이었다.

제갈규는 끼어들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포쾌인 것이지. 대단하지 않나?”

“그... 그렇군요.”

“놀랍습니다.”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못 믿는 이들은 팽주성이 교활한 포쾌에게 속았거나 허풍에 속은 게 아닌가 의심의 눈빛을 던졌다.

“포쾌라고 하셨습니까?”

“앗. 예.”

팽주성의 여동생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을 걸어왔다. 연우혁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들어보니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하찮은 재주입니다. 팽 대협께서 과하게 평가해주셔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가 예전에 불가사의한 일을 하나 겪었는데, 혹시 포쾌께서 이걸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뭐지?’

“일단 경청해보겠습니다.”

“포목점을 운영하는 어느 내외가 하루는 친족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났는데...”

“혹시 바깥양반이 아내를 죽인 겁니까?”

팽주성의 여동생이 놀라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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