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 속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법 (16)화 (16/107)

냉수사 고송 (1)

연우혁이 한 명을 쓰러뜨리고, 염일림도 다른 한 명을 때려눕히자 다른 무림인들도 산적들을 일제히 끝장냈다.

가장 이 전장에서 여유가 있는 팽주성은 대도를 풍차처럼 가볍게 돌리며 산적들을 긋고 조각냈다.

“아까 편곤을 든 놈이 제법이던데. 염 아우가 상대한 건가?”

팽주성은 피 묻은 도를 털어내며 물었다.

아까 뒤쪽에서 편곤을 휘두르던 산적 놈이 제법 뛰어나 보여서 신경이 쓰였는데, 급히 달려오니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여기 포쾌가 상대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대단하군!”

팽주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주변에서 산적들을 눕히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다른 무림인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포쾌가 신통력이 있어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류의 경지는 되어 보이는 산적을 쓰러뜨리다니?

“숨겨둔 구명절초가 있었습니다. 운도 좋았고 말입니다.”

“생사를 건 싸움에 무슨 운이 있나. 승자가 강했을 뿐이지. 그렇게 안 봤는데, 숨겨진 한 수가 있었군그래. 한경의 양민들은 참으로 든든하겠어.”

“나는 짜증이 나고 말이다.”

싸늘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아무도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상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일제히 기겁해서 무기를 붙잡았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여기 있는 무림인들은 전부 제압할 자신이 있는 것처럼.

“냉수사(冷手蛇) 고송!!”

상대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본 제갈규가 고함을 질렀다. 말이 고함이지 사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고송은 흑색 무복을 걸치고 있는, 깡마른 체구의 무인이었다. 살짝 늙수그레해 보이는 이 평범한 중년이 무림에 악명이 자자한 냉수사 고송이라고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무림인이라면 무복 소매 끝에 튀어나온 비쩍 마른 두 손이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시푸른 색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두 손은 빙요수(氷妖手)라는 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손이었다.

하지만 고송의 악명은 마공을 익혀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무림에 사공이나 마공은 많았지만 모두가 악명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고송의 악명은 그 지랄 맞은 성질머리에서 나왔다.

누군가 자신의 일을 한 번 방해하면 양쪽 뺨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墨刑)을 가하고, 두 번 방해하면 코를 자르는 의형(劓刑)을 가하며, 세 번 방해하면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을 가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명문세가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적에서 고송의 지랄 맞은 성질머리를 알 수 있었고, 또 그 무공 실력도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무림인은 저런 짓을 했다가는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처절하게 척살당했을 테니까.

꿀꺽-

오늘 팽주성이 처음으로 침을 삼키며 긴장한 기색을 내보였다. 이 자리에 있는 무림인들 중 가장 경지가 높은 만큼 고송의 경지에 대한 압박감도 컸다.

‘냉수사 고송이 절정의 경지였군...!’

게다가 고송 정도 되면 온갖 싸움에 이골이 날 정도로 경험이 많은 고수.

이제 막 일류의 경지에 오른 팽주성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여기 있는 무림인들이 다 같이 덤벼도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큰일났다.’

그리고 유일하게 팽주성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뒤에도 있었다. 바로 연우혁이었다.

고송이 나타나자마자 영안으로 상대를 확인한 연우혁은 기겁했다. 팽주성은 가볍게 뛰어넘는, 아무리 봐도 사악해 보이는 마두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승산이 없어보였다.

상대가 경험이라도 일천하면 빈틈을 만들어서 도망을 쳐보겠는데, 괜히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게 아니라는 듯이 고송은 허랑한 듯 서있으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방법이 없나? 빠져나갈 방법이?’

“선배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팽주성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리자 고송은 제갈규를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내 별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나?”

화살이 겨눠지자 제갈규는 신음소리를 냈다. 설마 하니 마두가 그걸 듣고 겁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 선배님. 규 아우를 데리고 온 것은 저입니다! 부디 화가 있다면 저에게만 풀어주시길!”

“닥쳐라. 어차피 죽는다면 다 같이 죽을 놈들이.”

고송의 말에 무림인들은 더욱 더 긴장도를 높였다. 누군가 철전이라도 하나 떨어뜨린다면 바로 터질 것처럼 팽팽한 공기였다.

“고 선배님. 여기서는 하북팽가, 그리고 제갈세가와 사천당문의 이름을 봐서라도 제발!”

“...흥.”

태도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고송은 기세를 살짝 거뒀다.

상대가 오대세가의 이름을 존중하겠다는 기색을 보이자 팽주성은 안심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부하들을 너희가 죽인 거냐?”

“부하... 셨습니까?”

“그래.”

무림인들의 얼굴이 다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산적들의 솜씨가 어째 예사롭지 않다더니 고송의 부하였단 말인가?

만약 산적들이 고송의 부하였다면 서로 대화로 일을 마무리하기는 힘들었다. 고송도 사파에서 체면이 있는 만큼 웬 어린놈들이 자기 부하들을 도륙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연우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선배님. 부하라고 하지만 다 같은 부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들은 이번에 새로 들인 부하들이 아닙니까?”

“그것도 맞다.”

고송은 선선히 인정했다.

무림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당혹스러운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산적들의 허리춤 뒤편에 노끈으로 만든 덧신과 밧줄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고, 피부가 똑같이 검게 탔으며, 손가락에는 산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잡혀 있었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이 아니라 이 산채에 원래 있던 산적입니다. 아마 고 선배께서 산채에 방문하신 뒤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허...”

상황도 잊고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설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건 무림인들만이 아니었다. 고송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짐승을 보듯이 연우혁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고송은 그제야 연우혁이 포쾌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무림인 놈들이 포쾌는 왜 데리고 다니는 거냐? 설마 포쾌에게 잡히기라도 한 거냐?”

“그게 아닙니다. 선배님.”

팽주성은 배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여기 포쾌가 사실 한경에서 손꼽히는 명포쾌인데...

‘음. 칭찬도 수치스러울 수 있군.’

연우혁은 고송이 그들을 쳐다보는 눈빛에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고송은 지금 팽주성을 비롯해서 여기 있는 무림인들을 모두 머저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대세가 출신이라 그런지 웬 사기꾼 놈의 수작에 홀딱 넘어간 게 분명하다고!

“내가 무림에 오래 살았지만 뛰어난 포쾌는 들어본 적 없고, 정직한 포쾌는 더더욱 들어본 적 없다. 뛰어나고 정직한 포쾌 같은 소리 하고 있군.”

“하오나...”

“닥쳐라. 한 가지는 믿어줄 만하군. 신통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여기 놈들의 정체를 맞췄겠지.”

고송은 홱 돌아섰다.

“따라와라.”

“예?”

고송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에서는 거역할 경우 오대세가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팽주성은 다른 무림인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네들을 빠져나가게 해주겠네.’

‘무슨 일이 생기면 다 같이 죽겠지.’

팽주희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팽주성은 못난 동생을 한 번 노려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 후미진 산채에는 왜 머무르고 있는지 아느냐?”

“정말 궁금합니다.”

연우혁은 냉큼 대답했다.

괴팍한 마두긴 해도, 이럴 때 재깍재깍 대답해서 호감을 사두는 게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팽주희는 연우혁을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백면신투가 숨긴 비급 때문이다.”

“...!!!”

“모르는 척 할 것 없다. 너희들도 소문을 듣고 왔겠지. 안 그러면 이딴 아무것도 없는 산채를 토벌하러 오대세가 출신의 후기지수들이 오겠나.”

고송은 오대세가 출신 후기지수들을 보는 순간 여기 일행이 무슨 목적으로 온지 알아차렸다. 고송 본인도 그것 때문에 온 거였으니 더더욱 알아차리기 쉬웠다.

“그 산적 놈들은 내 수발을 들라고 살려놓았다. 몇 초식 가르쳐줬더니 지깟 놈들이 무슨 녹림이라도 된 것마냥 침입자를 죽이겠다고 달려 나가더니... 크핫핫!”

고송은 진심으로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주제 파악도 못하는 잡배 놈들이 무공 실력 조금 늘었다고, 이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천하제일인이 된 것마냥 사냥꾼을 죽이고 약초꾼을 죽여대더니 마침내 적수를 만난 것이다.

이런 놈들이 처참하게 죽는 것만큼 웃기는 일도 드물었다. 이 맛에 무공을 가르치는 걸지도 몰랐다.

“으핫핫핫핫!”

연우혁은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팽주성도 연우혁을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이게 다 계산된 행동인데.’

아까부터 계속 영안으로 고송을 훑고 있었는데, 대답을 맞춰주고 같이 웃어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도 모르고 저런 시선을 보내다니.

뚝!

산채 앞에 도착하자 고송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팽주성을 보며 말했다.

“이봐. 팽가의 애송이 놈아. 아까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문의 이름을 봐달라고 했었지?”

“그랬습니다.”

‘위험하다.’

연우혁은 등에 진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송의 감정이 위협적으로 변했던 것이다.

“맞게 봤다. 내가 아무리 마두라 불려도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문 세 곳을 적으로 돌릴 순 없지. 한 곳도 버거운데.”

“......”

팽주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땀을 흘리며 경청했다.

“하지만 전부 다 죽여 버린다면 누가 알까? 응? 이 어르신이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전부 죽어버렸는데 말이다.”

“살인멸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고민하고 있다.”

고송은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진심으로,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을 죽이고 잘 처리해도 훗날 들킬 수도 있으니까. 아까 내 별호를 함부로 부른 건방진 놈에게도 손찌검 하나 하지 않았지? 이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비급은?”

“...예?”

“비급 말이다. 너희 애송이들이 돌아가서, 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여기로 다시 온다면? 내가 찾는 비급을 뺏어간다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고송은 비웃었다.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믿을 만큼 내가 머저리라면, 난 이미 땅 속에 묻혀서 썩어가고 있었을 거다. 이 어르신을 본 순간 너희들은 지금쯤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백면신투의 비급이 소문이 아니라 정말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그런데 그냥 넘길 리가 있나!”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지른 고함은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에게 강렬한 압박을 줬다. 별다른 무공이 아닌 그냥 살기를 담은 고함일 뿐인데도.

심령에 타격을 받은 무림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자. 너희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다. 백면신투의 비급을 찾아내라! 찾아낸다면 살려주겠다. 너, 제갈세가의 애송이. 네놈에게 손 하나 대지 않은 건 네 머리를 믿어서다.”

“하, 하지만...”

제갈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흔히 제갈세가의 명성에 대해 오해하곤 했지만, 제갈세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었다. 지혜를 사용하더라도 최소한 사용할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아는 정보라고는 여기 위치가 전부인데, 냉수사가 찾지 못한 비급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장보도 말고 다른 단서라도 있습니까?”

“없다. 있었으면 장보도를 여럿 뿌리지도 않았겠지.”

“단... 단서가 더 필요합...”

“찾았습니다.”

“!??!”

포쾌의 말에 고송까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1